Chapter 206 - 기도로 찾는 소녀
"앞으로도 궁금한 게 있으면 가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백금까지 오면서 모험가 눈칫밥이 몇 년인데 저 말뜻을 이해 못 할 일은 없다.
비슷한 경우야 이때까지 셀 수 없이 많았고 어떤 조건을 내세워도 지금까지 내 입에서 나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오늘을 제외하면.
'대놓고 제자도 아니고 가끔 조언 정도는 문제없으려나.'
마법 쪽은 애초에 조언이 불가하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꿀꺽-
앨리스는 질문을 하고 답을 기다리며 긴장한 얼굴로 침을 넘겼고.
잔을 잡고 있는 손이 미약하게 떨려오는 게 그녀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는 능하지만 숨기는 데는 재주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내 시간이 한가할 때는 상관없어. 길드에 그리 자주 올지는 모르겠지만."
"···!!"
말하고도 조건 하나 없이 허락이 떨어질지 몰랐던 앨리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핑계만 가득할 수 있는 시기에 기회를 잡으려 애쓰는 자에게는 단비가 쏟아져야 하지 않겠나.
간절한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앨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내게도 흥미로웠다.
-시이익!
거기다 같이 있는 테로도 귀엽지.
말문이 막힌 주인을 대신해서 머리의 새싹을 흔들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누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성취감과 흥분감에 눈을 번들거리며 다시 군기가 들어간 앨리스가 목청을 높이자.
테로가 그녀의 머리를 내려와 테이블을 후다닥 가로질러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귀엽긴.'
이 정령은 보기만 해도 기운이 넘쳐 사람을 신나게 한다.
"그리 기대하지는 마. 대단한 건 알려줄 것도 없으니 기합은 좀 빼고."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오늘만 해도 저한테는 무척 큰 배움이었는걸요."
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렸는지 오늘은 유독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허락이 떨어져 웃음의 기준선이 평소보다 후하게 낮아진 앨리스는 가벼운 농담만 건네도 특유의 활력을 뽐내며 즐거워했다.
어떤 말을 해도 좋은 리액션이 돌아오면 입을 여는 사람도 흥이 오르는 법.
꽃향기가 풍기는 자리에서 화기애애하게 사담을 주고받으니 시간을 녹이러 왔던 내 소기의 목적은 빠르게 달성할 수 있었다.
음식도 다 먹었고 잔도 깔끔하게 비었으니 지금이 미련 없이 자리를 끝낼 때.
"이제 일어날까."
아카데미가 끝난 둘이 돌아오기 전에 선물을 사서 돌아가야 한다.
"저는 얻어먹고 배우기까지 해서 복에 겨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에는 제가 사게 해주세요!"
턱을 긁으며 생각해 보니 받기만 하는 입장의 부담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금등급한테 얻어먹는 건 라크가 아니면 영 안내키지만··· 정 그러면 다음에 한 번 사."
"감사합니다! 제가 맛있는 걸로 대접하겠습니다!"
이제는 말투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본인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이 한참 아래 있는 앨리스에게 테로가 넘어갈 수 있도록 무릎을 굽혀준다.
-시이익!
테로가 폴짝 뛰어 그녀의 머리로 건너가는 걸 확인하고 허리를 펴 일어난다.
"이제 새로운 파티원도 구했으니 의뢰 나가려고?"
파티원이 있는 테이블을 힐끔 확인한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손발을 맞춰봐야 할 것 같아서 둘이서도 여유있던 걸 잡아뒀어요."
"이번에는 저번처럼 우연은 절대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앨리스가 안일하다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다.
매번 '죽지마라' 네 글자로 끝내던 말을 조금 늘렸을 뿐.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녀도 내 말 뜻을 이해했는지 불쾌한 기색 없이 웃었다.
앨리스는 '죽지 않을게요!' 라는 말과 감사를 남기고 파티원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
"오다가 봤는데 이뻐서 보여주고 싶었어."
정성스럽게 포장한 꽃 세 송이.
특별한 기념일이 아님에도 오라버니는 뜬금없이 선물을 주곤 했다.
낌새도 없이 일어나는 서프라이즈에 적응은 고사하고 이 기쁨은 매번 감정을 울컥하게 하여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은 분명 성장했다.
클로에가 성장을 체감한 건 꽃을 받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
"히히~"
그녀는 언니가 돌아와서 볼 수 있도록 한 송이는 포장 상태로 빼두고.
식탁 위에 있는 커다란 유리병에 꽃 두 송이를 넣어 장식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이어지는 평화로운 시간.
리케와 클로에는 저녁 식사 전에 하는 훈련을 끝내고 에클레어가 올 때까지 로만과 침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각자 연인의 한쪽을 차지한 상태.
리케는 로만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 쥐 죽은 듯 토막잠을 청하는 중이었고.
클로에는 신간 소설을 읽으며 영감을 받으려 애쓰고 있다.
'이것도 재미는 있는데 확실하게 오는 느낌은 아니네···.'
최근 오라버니에게 받은 꽃에 이름을 정하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해보며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직 좋은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리케는 어머니가 남겨준 책에서 단서를 찾았다 했고 언니는 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정 안되면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구하겠지만 그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에서 느낌을 받아보려 노력 중인 그녀였다.
'모르겠어···.'
애완동물도 아니고 무구가 될 이름을 지으라니 사치스러운 기회임과 동시에 막막한 일이었다.
얼른 오라버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할까 망설여질 정도로···.
고민으로 책에서 순수한 재미를 찾기가 힘들어지고 미미한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클로에는 오늘 독서를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책갈피를 끼우고 소설책을 덮은 클로에는 리케처럼 로만의 품을 파고들었다.
"흐으으···."
독서로 뻐근해진 몸을 움직이니 절로 목소리가 나왔다.
스륵-
눈을 감고 계시지만 지금 자는 건 리케뿐인 걸까.
가까이 붙으니 오라버니의 듬직한 팔뚝이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헤헤."
등허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 커다란 손.
복잡했던 그녀의 머리가 한순간에 맑아진다.
'언니는 오늘 언제 끝날까.'
이제 드리트나 자매는 여기에 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언니도 원래 저택에서 보내는 시간은 서재에 들려야 할 때 정도가 끝이고.
나머지 시간은 이 저택에서 보냈다.
드리트나 자매야 그렇다 쳐도 오라버니와 리케까지 있는데 갈등 하나 없이 행복하게 지내니 그게 제일 신기하면서 만족스러웠다.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던 오라버니와 둘만의 시간도 드문드문 있어 이 이상 바랄 게 없는 낙원 그 자체.
'이리 행복해도 되는 걸까···.'
행복함에 젖어있으면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해야 할 부모님이나 귀족들의 사회가 떠오른다.
든든한 오라버니와 언니가 있다고 해도 주위의 시선은 축하하기보다 언짢아할 걸 알고 있다.
순수한 악의는 무섭다.
꿈 같은 현실은 자신이 그려오던 어떤 미래보다 행복했기에 무너질까 봐 겁을 집어먹게 되고.
지금과 같은 일상이 평생 이어지길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불안감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검을 휘두르는 것과 아카데미를 열심히 다니는 정도.
거기에 모두의 안전과 행복.
더불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클로에가 교단을 들리는 나날이 늘어나기도 했다.
"오라버니···."
"응?"
침실에 있는 모두 눈을 감고 있지만 대답은 또렷하게 들려온다.
"내일 저랑 교단에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시원한 대답에 클로에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떤 이유인지 그것조차 묻지 않는다.
고개를 빼꼼 든 클로에가 반대편에 눈을 감고 있는 리케를 불렀다.
"리케도 같이 갈래요?"
눈을 천천히 떠서 보라색 눈동자를 굴린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학부 과제 해야 돼. 오빠랑 다녀와."
····
클로에는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한 티끌 같은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로만과 교단을 찾았다.
행복할수록 이 행복이 사라질까 벌써 겁을 집어먹는 자신의 태도가 우스웠지만.
오라버니는 교단까지 오는 길에 자신의 고민을 듣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건 누구나 당연하다 말했다.
언젠가는 그걸 순수한 원동력으로 삼아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용해서 좋다."
"그러네요."
정해진 시간에 교인들이 우르르 나가고 텅 빈 기도실.
기도실에 앉은 채 그녀는 눈을 감아 푸른 눈동자를 숨기고 여신님에게 간청하고 또 간청한다.
교단이나 신앙에 뜻이 있는 인물이 아님에도 기도했다.
자신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내줄 대단한 것은 없지만 그저 바란다.
"후···."
클로에가 정신을 몰두하여 잡념을 지우고 기도를 끝내니 오라버니와 둘이 있던 기도실에 인원이 늘어있었다.
맑은 날의 하늘을 닮은 눈동자와 그 눈동자와 같은 색의 부드러운 머릿결.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는 여성과 그 옆에 서서 듬직하게 호위를 자처하고 있는 성기사는 클로에와 일면식이 있었다.
"서, 성녀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자리에 벌떡 일어서려 하니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혔다.
정신 놓고 기도하는 사이에 오라버니와 인사가 끝났는지 시선은 자신에게 고정되어있었다.
"형제님의 기도를 보며 영탄했습니다.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에 여신님이 의로운 길을 보여주실 겁니다."
성녀가 자신의 기도가 신실하다고 추켜세우니 클로에의 마음은 부끄러움에 열이 차올랐다.
"저는 제 일상의 안정과 욕심에 찾아오게 된 것이라··· 기도라 할 만한 것이 아,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트라는 클로에의 솔직함과 순수함이 묻어 나오는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형제님. 기도라는 건 교단의 전유물이 아니랍니다."
옆자리에 앉아 클로에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아트라가 눈을 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렸다.
"저희는 소통을 위한 언어라는 것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여신님의 도타운 자애를 마주하고 신비로움을 직면하면 이렇게 손바닥을 마주했답니다."
클로에의 손을 사이에 두고 아트라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자 신성력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
"말로 꺼내지 않아도 형제님의 간절한 마음을 여신님은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녀와의 짧은 문답.
거기에 돌아오며 연인과 나눈 대화에서 클로에의 눈은 불길함의 티끌을 지우고 활기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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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클로에는 책이 아니라 교단에서 답을 찾았다.
로만과 손을 잡고 저택에 돌아온 그녀는 피와 마나가 찰랑거리는 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도는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라버니와 언니가 보여주는 헌신적인 사랑.
리케와 세리아가 보여주는 넘볼 수 없는 의지와 인간성.
자신은 늘 그것들을 보며 손바닥을 마주해 내면의 안정을 추구해왔다.
언제부터일까.
그녀가 흔들릴 때 필요한 것을 찾고 깨닫는 과정은 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에.
꽃을 양손으로 쥔 클로에는 눈을 감고 이름을 불렀다.
"프레이(Pray)"
클로에의 목소리를 듣고 꽃이 격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