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205화 (205/250)

Chapter 205 -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4-

아트라는 수도 지부의 모험가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이곳은 불세출의 모험가들을 배출해내는 수도 지부이고 가장 많은 모험가를 보유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막막한 재능과 현실의 벽을 마주하여 희망을 잃은 채 자극에 목마른 자들이 가장 많았다.

'모두 상처가 많으시구나···.'

이런 생각조차 실례일지라도 아트라의 감상은 단순하게 그러했다.

모두 막막한 현실을 피하고자 무언가에 의존하고 취해있었다.

나이를 먹고 현실에 부딪히며 살아갈수록 꿈이 가득한 희망찬 미래보다는 두려움 가득한 미래를 그리게 되니깐.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

핏물이 허공에 떠오르는 폭력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험가들을 보는 순간 성녀의 속에는 그 감정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앉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먼저 온 손님이 계신 것 같으니까요."

요리를 기다리는 앨리스를 본 아트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슈엘이 신세를 진 건 백금 한 명만이 아니었으니.

로만도 합석은 예의상 한번 건네 본 말이기에 재차 권하지 않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수녀님은 좀 괜찮으신지요?"

마젤라의 옆에 있던 슈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모, 모험가님 덕분입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그··· 제가 편지를 보냈는데···."

슈엘이 앙증맞은 손으로 수녀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망설이자 로만은 드물게도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이건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아··!"

그걸 본 어린 수녀의 얼굴이 순수한 빛을 찾으며 밝아졌다.

"이때까지 교단에서 받은 편지 중 제 앞길을 이리 진심으로 축복하는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이 저에게 큰 힘이 되어 늘 품에 가지고 다닌답니다."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니 틀린 말도 아니고.

언변이라는 건 결국 상대방이 듣기 좋도록 선택하기 나름이다.

"그, 그런 과분한 말씀을··!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다 생각합니다··· 보답을 제대로 못 해 죄송합니다··."

"세상에 정신을 치유하는 약만큼 귀한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저야말로 이 편지는 과분한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어···으·· 그!"

상대의 반응이 너무 예상 밖이라 슈엘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백금의 상냥한 태도에 아트라와 마젤라도 놀란 마음을 삼키며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입원했을 당시에도 그랬다고 듣긴 했지만.

교단을 벗어나 밖에서도 백금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슈엘에게 존대를 할 줄은 몰랐다.

슈엘이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을 더듬고 있으니 아트라가 한걸음 나서 고개를 숙였다.

"모험가님께 저도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로만의 얼굴을 본 아트라가 슈엘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은혜를 찾아 떠돌고 헤매다 보면 믿음을 굽히지 않아야 하는 저의 처지를 여신님이 시험하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트라는 천천히 움직여 어린 수녀의 뒤로 이동더니 그녀가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았다.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슈엘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교단의 모두가 소중하고 인연에 소중하지 않음이 어디있겠냐 해도. 그날 슈엘에게 일이 생겼다면··· 정말 말로는 못 할 고된 나날이 이어졌을거라 생각합니다."

"···."

"방에 틀어박혀 믿음과 헌신에 대한 의심을 반복하고 여신님에게 한탄과 원망을 늘어놓았을 겁니다."

아트라의 솔직한 말에 마젤라도 한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가정이라 해도 성녀가 여신에게 원망을 늘어놓는다는 말에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됩니까?"

매번 웃는 얼굴이지만, 성녀의 얼굴은 지금까지 봤던 웃음 중에 가장 솔직해 보이는 미소를 보였다.

"제가 속마음에 담아두고 입안에 숨긴다 해도 여신님은 이미 알고 계실 텐데. 무결하고 신실한 척을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랍니다."

뭐라 답하기 힘든 성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다 주제를 바꿨다.

"수녀님. 이번이 아니면 앨리스도 만나기 힘들지 모릅니다? 모험가는 바쁘니까요."

"슈엘. 감사해야 할 분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끼지도 말고 전해야 한답니다."

연신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남긴 슈엘은 음식을 기다리는 앨리스에게 총총 다가갔고.

앨리스는 안도가 섞인 웃음을 보이며 슈엘을 보듬었다.

그걸 셋이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로만이 침묵을 깨트렸다.

"지금은 성녀님도 피곤해 보이시는데 물질적인 성의나 보답 같은 주제는 꺼내지 맙시다."

"···."

아트라가 당황하여 습관적으로 마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수녀님에게 받은 편지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라··· 뭣하면 나중에 소모품이나 길드로 좀 보내주시면 됩니다."

"모험가님의 말씀. 이해했습니다."

마젤라가 대신 답하는 것으로 슈엘이 빠진 자리는 끝을 맺었다.

··

··

슈엘은 만족감과 행복함이 가득한 미소를 가지고 교단에 돌아와 업무를 돕기 위해 수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트라도 이제 마젤라의 감시 아래에 수면을 해야 할 시간.

몸도 확실히 한계라는 느낌이라 눕는 순간에 잠들 것 같았다.

"마젤라."

"예. 성녀님."

교단에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을 마친 아트라는 휴식을 위해 방에 들어가기 전 마젤라를 잡았다.

"제가 피곤한 게 그렇게 티가 나나요··?"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 했는데 그 말이 줄곧 걸리셨구나.

백금 정도 되는 인물이 하는 말은 그만한 울림이 있는 걸까.

"그리 신경 쓰실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비범한 인물이라 눈치챈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젤라의 말을 듣고도 아트라는 자신이 표정 관리가 미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뚱한 얼굴로 납득을 끝낸 아트라는 방문을 반쯤 열었을 때 마젤라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업무 시작 전에 꼭 깨워주세요. 저번처럼 마젤라 혼자 하지 말고요."

"물론입니다."

그날 마젤라는 성녀를 찾아가지 않았고 아트라는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났다.

*****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하던 교단의 인물들이 떠나고.

앨리스도 슈엘을 만나 정신적인 위로와 안심을 얻은 얼굴이었다.

음식을 눈앞에 두고 앨리스는 눈을 빛내며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먹으면서 편하게 들어.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야."

"네!"

"일단 거리는 다리를 잘 쓰는 편이라 괜찮아. 그리고 체구를 덮을만한 순수한 근력도 있지."

뒷말을 이어가기 전에 잔을 잡으니 앨리스도 나를 따라 잔을 잡고 우유를 들이켰다.

"배운 게 있다 보니 동작도 매끄럽고 나쁘지 않아. 그런데 제일 큰 문제를 뽑자면···."

그녀는 이제야 배울 것이 나온다는 걸 깨닫고 귀를 쫑긋 세웠다.

"말은 '죽어!'라 했지만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지? 아까 상대가 오러를 뽑았을 때도 그렇고."

"···그건."

앨리스가 내 말에 눈을 껌뻑였다.

그녀는 실제로 제압하는 것이 초점이었으니 대답하기에는 궁색한 말뿐이었다.

"길드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마나와 스킬은 사용 금지지만 그 싸움에서 사람이 죽는 건 불운한 사고. 아까 같은 경우는 죽였더라도 길드에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을 거야."

"···."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지는 않을 거 아냐?"

"네."

에델만에서 모험가 활동을 할 때도 범죄자나 도적들을 소탕하는 의뢰에 참여했던 기록이 적지 않았다.

"이런 다툼이라도 우습게 누를 실력 차이가 아니라면 죽기 살기로 싸워.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훨씬 어려우니 그냥 죽인다고 생각하고 전력으로 때려."

제일 중요한 설명을 끝내고 급소를 노릴 때 성공하지 못했던 동작에 이유를 짚어주자 그녀는 내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가 음식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이해가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앨리스가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배움의 시간이 끝나자 그녀는 아까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돌아왔다.

지금부터는 모험가끼리의 사석이니 딱딱함은 버리고 편하게 하라는 내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응력이 빨라.'

아니면 이게 그녀의 본래 모습이겠지.

"그래도 그걸 혼자 나서서 해결할 줄은 몰랐어. 파티원은 예전에 나한테도 덤빈 녀석이라 깡은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어요. 최근에 겁도 늘고 자신감이 많이 죽은 것 같은데··· 자꾸 에델만이 그립다고 찡찡거려서··· 하."

답답함이 깃든 한숨.

표정이 뽀로통하니 동명이인에 대해서 앨리스는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아까는 결국 무슨 일인데?"

"으음··· 그게."

고기를 입에 넣은 앨리스의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침음을 흘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그런 놈들이 여기서 꼬이면 뻔하지."

"에델만 지부는 작다 보니 저한테 그런 짓을 하는 모험가는 거의 없었는데. 수도에 오고는 자주 있는 일이라서 아직 적응을 못 한 것 같아요···."

"적응할 필요 없어. 화낼 일에는 웃어넘기는 게 아니라 화를 내야지."

모험가 이전에 그녀도 한 명의 여성.

시답잖은 것들이 성희롱하거나 가볍게 보고 접근하는 태도에 상처받지 않을 리가.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지만 이때까지 언어나 행동으로 당해온 도발이나 희롱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정신은 상당히 문드러져 보였다.

"제가··· 그렇게 가벼워 보이나요?"

이야기 흐름으로는 속뜻이 뻔한 이야기였지만 칼같이 부정해 봐야 설득력은 적거나 없다.

아예 그쪽으로 연상 자체가 안되는 느낌을 주는 게 좋겠지.

"뭐가 가벼워? 몸무게?"

모른 척 묻는 내 모습에 우중충한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앨리스가 킥킥 웃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밖으로 꺼내는 것들은 정상이 아닌 거야. 그걸 알면서도 듣는 쪽은 상처가 안 될 수가 없지."

"···맞아요. 저 진짜 기분 나빴어요."

모험가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위로가 되는 시간은 처음이었다.

앨리스는 모험가라는 직업의 특성이라며 억지로 눌러놨던 부정한 마음을 로만의 앞에서 꺼내 보였다.

이걸 웃어넘기지 못하고 꿍한 내가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저것들이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시이이··.

테로가 주인의 어깨로 옮겨가 위로하듯 애교를 부렸고.

앨리스는 테로의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런 놈들이 꼬이는데 자기 탓을 할 필요는 없어. 결국 하는 놈들이 정신 나간 거니까 그쪽 탓을 마음껏 해. 욕을 하든 두들겨 패든 다 좋아."

"네··!!"

"만약 그것도 못할 상대면 의뢰 나가서 죽으라고 교단에서 기도라도 하면서 풀어. 여신님도 그런 놈을 만드셨으면 책임이 있지 않냐고 따져야지."

교단의 인물이 들으면 발작할 말에 깜짝 놀란 앨리스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오늘은 정말 배우는 게 많네요."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고."

그 말을 끝으로 음식을 비우는 로만을 보고 앨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잡담을 이어가며 자리가 끝이 난다는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생각은 깊어졌고.

그릇과 잔이 비었을 때 앨리스의 생각은 한 방향으로 확실해졌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제일 이상적이지만 거절당하면 그때부턴 이리 접근할 건 수도 없다는 추론.

앨리스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한 바퀴 겉돌기를 택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궁금한 게 있으면 가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