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4 -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3-
선술집에서 주먹다짐 정도는 이제 길드의 인원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요리와 서빙을 이어가는 것이 승부가 나는 순간 패자에게 비용을 청구할 생각뿐이겠지.
"참아!"
나와 동명이인이라는 그 녀석이 앨리스를 말렸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불이 완전히 붙은 기색.
그런데 파티로 추정되는 나머지 둘은 반응이 달랐다.
'예전이면 같이 덤볐을 놈이 왜 저래?'
술의 힘을 빌렸다 해도 나한테 덤비던 기색은 어디 가고 저런 지방 덩어리들에 움츠러든 기색이라니.
"말리지 마! 이런 새끼들은 한 번 밟아줘야 한다고!!"
-시이익!!
앨리스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발언에 그녀의 머리 위를 지키는 테로도 격하게 반응했고.
구경꾼들이 손에 잡히는 술병과 음료를 들고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백금이나 청금이 치고받는 것도 아니라 근처에 있다 죽을 일은 없다 보면 될 것이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야 모르겠지만 일단 재미있으니까!
대부분의 모험가는 암울한 현실을 잊을 자극에 목말라 있다.
'···새끼들 살판났네.'
환호성을 지르며 북적거리는 모험가를 향해 손가락을 겨눈다.
우유와 먹으라고 제공받은 땅콩을 튕겨 시야를 막고 있는 모험가의 머리를 맞췄다.
탁!
흥분감에 취해 느낌이 안 오는지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땅콩을 튕겨서 머리에 명중시킨다.
딱!
느낌이 오는지 머리를 긁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이쪽으로 돌린다.
"이런 씹. 어떤 새·· 허억!"
눈이 마주치자 굳어버린 모험가에게 잔을 보이며 친절히 부탁했다.
"앞에 길 열어. 안 보인다."
"아, 알겠습니다!"
땅콩을 맞은 모험가가 앞에 있는 모험가들의 어깨를 두들겨 길을 텄다.
둥글게 감싸고 있던 모험가들 사이에 공간이 생기며 앨리스의 모습이 눈에 시원하게 잡힌다.
'다 처음 보는 놈들인데?'
앨리스와 시비가 붙은 덩어리들도 수도 출신 모험가는 아닌지 아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남자 얼굴은 공들여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특색이 저리 강한 것들인데 기억 못 할 리는 없지 않을까.
아마도?
"···."
겉으로만 보면 앨리스가 위험해 보이지만 딱히 도울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것이 겉모습 아닌가. 거기다 철칙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한 결과는 무난하게 예상이 간다.
모험가들이 길드 내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철칙.
나와 청금인 노팅엄이 한 판 할 때처럼 사사로운 싸움에서 마나를 사용하는 건 절대 금지하며 스킬도 당연하다.
이 조항을 어기면?
모험가 사이에서도 지탄을 받고 길드에서도 전력 손실 등을 건수로 잡아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험가 길드가 관리하는 범위 안에서 사상자가 나지 않기 위해 적용한 것이지만.
다른 집단에 양다리를 하는 마법사들 혹은 사제들이 속한 교단 같은 뒷배가 없는 자들에게는 억울한 철칙이 되기도 한다.
마나와 스킬 없이 싸우라고? 마법사나 궁수같이 근접전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어정쩡한 등급의 전위들이 길드 내부에서 가슴을 펴고 다니는 이유가 되기도 하면서.
야산이나 뒷골목에서 화살이나 마법에 머리통 뚫린 모험가가 발견되는 원인 중 하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길드는 지부 안에서 모험가들끼리 싸움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마법사 같은 귀한 전력이라면 파티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 이것도 높은 분들이 짱구를 최대로 굴린 결과인 것이다.
"싫다고 했잖아! 미친놈들아!"
남자들의 끈질긴 권유를 거절하는 앨리스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그녀의 키와 몸무게를 생각하면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몸무게의 두 배는 가볍게 넘을 법한 덩치들을 이기는 건 요원해 보이는 걸 넘어 불가능해 보였다.
그걸 알기에 남자들은 음흉하게 낄낄거릴 뿐이었다.
"흐허허. 성질머리가 있어도 반반한 년들은 그것도 맛이라 좋단 말이지."
그 말이 방아쇠가 된 듯 앨리스의 몸이 움직였다.
"죽어!!"
그녀가 뻗은 건 무언가를 때렸다간 자기 손목이 다치지 않을까 싶은 앙증맞은 주먹.
헛웃음을 보이며 손바닥으로 주먹을 받아낸 덩치의 팔꿈치가 밖으로 어긋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뽀각.
"아아악-!!"
마법사라 하는 그녀의 포지션과 자그마한 체구에서는 나올 수 없는 괴력.
주먹을 막아낸 놈이 팔을 잡고 나뒹굴었다.
"씨발 내 팔···! 저 년 잡아!!"
덩치의 눈이 통증에 충혈되어 붉게 변해있었고.
앨리스는 파티원을 뒤로 물리고 접시를 들어 바닥에 구르는 덩치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쨍강!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소녀 하나와 멍하니 있던 덩치들의 난전이 일어났다.
'시원하네.'
그녀의 대담한 행동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혼혈이라 해도 용인의 신체 능력은 보통 인간이 넘볼 구간이 아니다.
거기다 체술을 제대로 배우기까지 했으니···.
마나가 없는 개싸움에서 그녀를 이길만한 금등급이 몇이나 될까.
그릇이 날아다니고 의자와 탁자가 바닥에 나뒹굴며 피 터지는 주먹질이 이어지자 선술집이 광기와 환호성에 휩싸였다.
-아가씨 잘한다!!
-마법사 무시하는 새끼들 손 좀 봐줘!!
-새끼들아 덩치가 아깝다!
··
또각. 또각.
앞에서 눈이 즐거운 싸움이 이어지니 계단을 내려오는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는 모험가들은 없었다.
"···."
남자라 해도 믿을 법한 건장한 여성을 필두로 일면식이 있는 여성들이 줄지어 내려왔다.
"이, 이게 무슨?"
성녀는 선혈이 낭자하는 쌈박질에 심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 자주 있는 일이에요!"
말은 그러면서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슈엘은 마젤라의 뒤에 숨었다.
"마젤라··· 말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환호성을 지르는 무리를 보고 마젤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겁니다. 모험가 길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교단이 함부로 관여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아!"
성녀 무리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빵순이와 성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기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예의 있는 태도를 상대가 보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은 기본.
선술집의 안쪽으로 향하려다가도 모험가들이 바글거리며 길이 막혀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셋은 계단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다.
'왜 내려왔지?'
저 빵순이의 편지가 그랬으니 모험가 패를 반납하고 그만두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아무리 성녀라 해도 선술집은 모험가들만의 구역이라 들어오려면 접수원의 허락이 필요하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설마 여기로 오나··?'
지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건 나 하나에 저들의 시선도 내 쪽으로 못박혀있다.
이쪽으로 건너려다가 턱이 돌아간 남자가 날아와서 쓰러지는 바람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소극적인 그녀들의 행보를 보아 앨리스가 정리를 끝낼 때까지 움직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보좌인 성기사도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이 무리해서 모험가들 사이를 뚫을 생각은 없는 것 같고.
"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시이익!
입에 고인 끈적한 핏물을 뱉어낸 앨리스가 마지막에 쓰러진 남자를 발로 밀어냈다.
찢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는 앨리스의 야성적인 모습은 마법사라는 위치, 소녀라는 겉모습과 대조적이라 보는 재미가 있다.
두 번째로 쓰러졌던 놈이 의자를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이 씨발년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오러를 일으키며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확실한 살의.
관중들 사이에서 간 큰 행동에 대한 놀라움과 비난이 쏟아졌다.
-저, 저 미친!
-눈치 없는 촌놈 새끼···.
-병신아! 여기 수도 지부다!
··
"앨리스!!"
그제서야 상황의 위험성을 인지한 파티원이 나서려 했지만 상대의 검이 더 빠르다.
앨리스도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마나를 끌어올려 빠르게 발을 뻗었지만 부상은 이미 각오한 얼굴이었다.
··
··
텁.
한 손에는 그녀의 종아리가 잡히고 한 손에 검이 잡혔다.
"사소한 다툼에 마나는 쓰면 안 되지."
"···!!"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맨손에 잡힌 남자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한숨 자고 머리 식혀라."
탁!
앨리스의 발을 놔주고 빈손으로 떡대의 이마를 밀치자 눈이 스르륵 풀리며 정신을 잃은 몸뚱이가 슬라임처럼 흘러내려 바닥에 쓰러졌다.
-···뒤졌나?
-털 거면 빨리하고.
쓰러진 놈들에게 모험가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 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헛웃음이 나오는 모험가들의 빠른 적응력에 기가 막혔지만 그러려니 한다.
"아··· 가, 감사합니다!"
"끝까지 방심하면 안 되지. 정해진 규칙이 있다해도 마나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니라서 그걸 어기는 놈들은 존재하거든."
엘리스는 갑자기 차렷 자세를 하더니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에 기합을 넣었다.
"넵! 알겠습니다!"
"그래도 잘 봤어. 미래가 기대되네."
감상료로 자그마한 포션을 꺼내 그녀의 손 안에 쥐여줬다.
"···!"
"바로 마셔. 늦으면 흉 진다."
멍하니 서 있는 앨리스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자리에 오니 모험가들이 감상을 나누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극이 끝나고 평론하며 나오는 관객들 같은 모습.
'저 세트는 무조건 여기로 오겠는데.'
계단을 보면 웅성거리는 모험가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걸 셋이 묵묵히 기다리는 게 교단의 인물다웠다.
이 정도 되면 무슨 용건인지 궁금하긴 하다.
땅콩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저 무리보다 빠르게 앨리스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왜?"
"감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입을 보니 핏자국은 있지만 벌써 새살이 돋아나는 게 포션을 바로 마신 듯했다.
거절하지 않고 기회를 바로 잡는 앨리스의 처세술은 모험가에 어울렸다.
"됐어. 안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심심했거든."
시간이 남는다는 말에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고 이어서 살짝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더니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 행동이 민폐가 아니고 시간 여유가 되신다면···! 제 몸놀림에 부족한 점을 시원하게 꾸짖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을···?"
"부탁드립니다!"
막상 아쉬운 점을 꼽으려 하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투를 정식으로 배운 상태라 조언은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턱을 긁으며 생각에 빠져든다.
-시이이.
고민이 길어지자 테로가 내 몸을 타고 머리에 올라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자리에 합석해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사겠습니다!"
실력을 늘릴 기회를 한 번이라도 잡기 위해 애쓰는 그녀를 보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은 없는데. 파티원들은?"
"저 녀석도 자기가 부른 여자랑 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제가 방해겠죠."
동명이인이 여길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져 내가 시선을 돌리자 눈을 빠르게 피한다.
"좋지. 그리고 금등급한테 얻어먹을 생각은 없으니 이걸로 해결해."
금화 하나를 던져주며 우유의 리필.
본인이 먹고 싶은 것도 사 오라 하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주문을 위해 후다닥 달려갔다.
앨리스가 빠진 뒤 웅성거리는 모험가들을 뚫고 등장한 성녀 무리에게도 물었다.
"앉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