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2 -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1-
제국의 3기사 유르게나 디 벤타.
그의 일상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누구도 지켜볼 수 없는 수련실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잡아먹는 영지의 운영과 실무는 검에 집중하는데 방해.
안 그래도 하루가 짧고 시간이 부족하다 느끼고 있는 유르게나에게 서류와 드잡이를 하거나 손님을 만나 담소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하여 몇 년 전부터 장남에게 영지 관리를 맡겨 놓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야 체감한다. 영지고 여자고 자식이고 보석이고 거추장스러운 것.
자신은 3기사라는 이름과 검 하나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위치.
'더욱 자유로워야 한다.'
육신도 정신도 영혼도 지금보다 자유로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최근 들어 본인의 생각과 시야가 협소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
검에 대해 고찰하며 어찌하면 더욱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하루 종일 그것만을 생각한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부모도 자식도 재력도 권력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기에 그는 물심양면 성장을 돕겠다는 네마 나타스와 손을 잡았고.
집단의 고위 간부 중 하나가 된 지금까지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흑마법사와 연결점이 발각되어도 자기 대신 죄를 지고 불에 뛰어들 자식은 많다.
부족하면 더 만들면 되는 것이니.
그는 그만큼 힘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
"후."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특별할 것 없는 명상이지만 유르게나의 훈련은 혈육조차 볼 수 없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몇 번째 첩의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자식 중 하나가 허락도 없이 수련실의 문을 열었다가 목이 날아간 뒤.
그가 수련하는 시간에는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았다.
'···막혔다.'
여기서 무얼 해야 더 강해질 수 있는가?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동작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는 한계라는 걸 느낀다.
네마 나타스가 영약을 제공해도 이미 어지간한 영약은 효과를 볼 수 없는 신체라, 육신이 아닌 검법의 성장이 절실한 상황.
생각이 많아 최근에는 명상으로만 시간을 보내고 검을 한 번도 뽑지 않았다.
"오늘도 안 되겠군."
답답함에 혼잣말이 나왔다.
성장의 단서를 찾기 위해 오늘은 또 무엇을 해봐야 하나.
해왔던 것들이 답이 되지 않는다고 새로운 무언가를 체험하는 게 답을 주는지 그것조차 불안했다.
별실로 멀리 떨어져 있는 수련실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오니 시종장이 유르게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가주님.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음?"
누렇게 때가 탄 편지봉투 .
평소라면 가문의 저택에 반입조차 되지 않았을 물건이지만.
집배원이 아니라 까마귀가 물고 와 창가에 두고 갔다고 한다.
그것과 더불어 후줄근한 봉투와 상반되는 독특한 문양의 봉랍과 번쩍이는 우표가 시종장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3기사의 앞으로 왔으나 보낸 자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편지.
찌익-
이 우표와 봉랍이 뜻하는 집단을 알기에 유르게나는 시종장을 돌려보낸 뒤 봉투를 찢어서 열었다.
··
··
그 편지는 유르게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네마 나타스 내부에서도 그로 인해 회의를 진행하였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확실한 답은 잡히지 않았다.
그 미친 것들이 무슨 일로 대표하는 자를 찾는지 의심 가는 구석이야 많았지만 확신은 없었기에.
'영지 밖으로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안개 둥지에 자리한 마을을 향해 걷는다.
도착한 곳은 마을이라 할 만큼 집의 형태는 제법 있으나 음산한 기운만이 감돌고 인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인기척.
그것을 찾아가니 허름한 오두막의 문이 자신을 반기며 열렸다.
끼익-
"자리에 앉지."
유르게나는 상대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감각을 곤두세웠다.
'모건 블랙우드···.'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
저 웃음은 불순물 한 점 없는 광기에 물들어 있는 답도 없는 인간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유르게나는 검을 허리에 찬 채로 모건의 맞은 편에 앉았다.
편지의 내용에 의하면 모건은 현재 멘데스 펜타그램을 대표할 권리가 있고.
그것에 따라 이야기를 나눈 끝에 모건과 안면이 있는 자신이 네마 나타스를 대표할 권리를 얻었다.
이제부터 한마디 한마디가 소속한 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이것에 대한 답을 좀 들어야겠어."
모건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불길한 물건.
자신이 흑마법사는 아니지만 내부 사정은 알기에 저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있다.
'···저걸 어떻게 얻은 거지?'
구석에 처박혀서 악마 숭배나 하고 있을 폐쇄적인 집단은 절대 얻을 수 없는 물건이다.
살아온 나날이 있으니 지금 상황에도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유르게나도 당면한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른손을 들거라."
침묵을 지키는 유르게나를 본 모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한다.
붉은 마법진과 그 중앙에 있는 산양의 머리를 보고 유르게나는 무표정을 지킨 채 답했다.
"응하지 않겠다."
"질문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 물건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시원하게 인정하는 것인가?"
그 뜻과 다르다며 고개를 저은 유르게나는 모건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마 나타스를 대표하는 내가 멘데스 펜타그램이 하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대들의 아래가 아니다."
유르게나의 반항에 모건은 화를 터트리지 않고 잔잔하게 웃음을 흘렸다.
"큭큭··· 자식이 생기고 수염 좀 났다고 속세와 권력에 찌든 네놈의 혀가 뱀처럼 움직이는구나."
"그대가 나를 비하해도 되는가? 이건 웃어넘길 수 없는 행위다."
유르게나의 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건의 눈과 입이 주욱 올라가며 소름 끼치는 형상을 그렸다.
"네마 나타스가 브라이트 가의 물건을 탐했을 때도 우리는 조용히 넘어갔지."
"···."
부정한 마나와 광기가 휘몰아치는 중심에서 유르게나는 팔짱을 끼고 덤덤한 자세를 유지했다.
"목적은 예상했지만, 언동을 보이지는 않았으니 움직이지 않은 것이란다. 꼬마야."
쿠구구구-
불길한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하자 오두막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유르게나는 허리에 있는 검에 손을 올리고 다리에 긴장감을 유지했다.
쿵!
모건의 옆에 나타난 흉측한 제물함.
그의 함은 교단의 인간들이 보면 눈을 뒤집고 기절할 형상을 하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천사가 칼과 창에 찔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제물함.
검을 잡은 유르게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제물함을 넣어라. 네마 나타스와 대적하려는 건가?"
"그런 말을 할거라면 애초에 이런 걸 만들지 말았어야지."
쨍-!!
"이건 선전 포고이자. 우리 멘데스 펜타그램이 앞으로 향할 길이다."
인조 악마의 살점이 부서지며 모건의 손에서 흩어졌다.
"미쳤군···."
날려서 흩어지는 가루를 본 유르게나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미쳤다는 말에 모건은 신앙을 인정 받아 되려 기쁜 표정이었다.
"우리의 매개자께서는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의 머리를 불러라."
매개자.
멘데스 펜타그램에서 악마와의 창구 역할을 한다는 실질적인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
오늘은 드물게도 해가 떠 있을 때 업무가 끝났다.
마젤라와 교단으로 돌아온 아트라는 개인실에 들어가 조금 휴식을 취하려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성녀님!"
"슈엘! 더 쉬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수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빙빙 돌리며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했다.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제가 쉬면 다들 일이 많아질 거고···."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요?"
한 번의 일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구나.
아트라는 흐뭇하면서도 뭐라 말 못 할 씁쓸함을 느꼈다.
"성녀님 이번에는 언제 떠나세요?"
"글쎄요. 아직 계획이 없네요."
아트라의 말을 들은 슈엘이 기쁜 듯 눈을 빛냈다.
"오래 있으시면 좋겠어요···!"
여전한 부분도 있구나.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시기인 슈엘과 손을 잡고 교단을 걸었다.
프리밀러 가주의 심문부터 사이가 깊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귀족들의 심문까지.
교단은 부정한 것을 절멸시키겠다는 사명과 황실이 내린 힘을 등에 업은 채 조사를 이어갔다.
인력에 부족함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결백을 증명한다는 건 단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아트라는 수도에 발이 묶여 평소처럼 순례와 전도를 위한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제 편지가 모험가님에게 잘 도착했을까 걱정이에요···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은데··."
무려 백금.
짧은 모험가 생활을 해본 슈엘의 입장에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조금은 알기에.
아무리 교단을 통했다고 해도 잘 도착했을지 불안했다.
"으음~ 저랑 같이 모험가 길드로 가서 물어볼까요?"
"정말요?!"
둘의 대화에 끼지 않고 뒤에서 침묵을 지키던 마젤라가 입을 열었다.
"슈엘. 성녀님은 지금부터 휴식을 취하셔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아트라의 뒤에 서 있던 마젤라의 말에 슈엘이 쭈그러들었지만, 성녀는 괜찮다며 웃는 얼굴로 마젤라를 설득했다.
"걱정하지 마요. 멀지 않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어요."
호위 겸 보좌의 입장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허락할 수 없었다.
"안 됩니다. 어제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셨으니 주무셔야 합니다."
체력에 있어서는 일반 제국민 보다 약한 성녀님의 몸 상태가 한계에 달하고 있다.
자신이나 대다수의 성기사나 사제들은 신성력을 사용하면 하루 이틀 안 자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묵직한 느낌이 있을 뿐 버틸 수 있지만.
성녀님은 꼭 수면을 해야 한다.
그런 몸으로 교단의 일정을 억지로 따라오고 있으니 체력은 점점 빠르게 떨어지고 현재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백금이나 되시는 모험가님이 계실 확률도 터무니없이 낮고. 만약 계신다면 보답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
이 정도로 타당한 이유라면 마젤라가 조금은 넘어왔을까.
허락의 여지가 느껴지지 않는 마젤라의 딱딱한 표정.
성녀는 슈엘과 함께 고민을 하다 한 마디를 더 꺼냈다.
"옆으로 빠지지 않고 금방 다녀올게요. 마젤라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마젤라님··! 부탁드려요!"
올려다보는 두 여성의 간절한 눈길.
마젤라는 초롱초롱한 시선을 피해 눈을 질끈 감았다.
'최대한 빨리 갔다 오면 시간은···.'
머리로 계산을 간략하게 해본 마젤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아··· 편지가 도착했는지 확인만 하는 겁니다."
""예에~""
아트라와 슈엘이 해냈다며 하이파이브를 치고 꺄르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