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99화 (199/250)

Chapter 199 - 잠든 연인

'이걸 어떻게 쓸까.'

게임에서는 한정적인 사용처가 정해져 있는 이 부정의 덩어리.

만들어진 악마의 살점을 현실에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열심히 고민했다.

게임에서처럼 교단과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다듬는 것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그로토 때와 마찬가지로 이걸 선업과 연결 지어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게 두 번째.

"···."

이 두 가지에서 한참을 멈춰있다 떠오른 것.

이이제이.

신중하게 생각해봤다.

이건 설정만 존재하지 게임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다.

기록에서 혹시 잊고 있는 게 없는지 다시 확인해보고 흑마법사들의 설정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정독했다.

'관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해···.

진짜 미친 것들을 이해하려는 건 불가능해도 그림 정도는 그려진다.

교단에 여신이라는 신앙의 존재가 있다면.

멘데스 펜타그램에게는 악마라는 신앙이 있다.

이들에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악마라는 존재는 교단의 관점으로 돌려서 보자면.

한낱 인간이 감히 여신이나 그 심부름꾼들을 빚어내려 한 것과 같을 것이다.

특히 그들의 행보만 봐도 내 의도대로 이루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생각을 안고 도달한 지금.

-아둔한 자는 둘째 편지에서 깨달았나이다. 믿지 않는 자와 짝을 짓지 말지어다. 어울리지 못할지어다. 정의와 불의는 짝이 될 수 없으니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니.

바닥을 적시던 피로 만들어진 역오망성의 마법진은 멘데스 펜타그램의 상징.

뿌드득. 꾸득.

시체가 된 노인의 살과 뼈가 조립되어 마법진 위에서 꿈틀거리더니 불길하기 그지없는 산양의 머리가 생겨나 입을 쩍 벌린다.

-메에에에에!!!

듣기 거북한 소음 그 자체에 눈가로 힘이 들어갔고.

마법진의 중앙에서 비명을 지르던 양의 머리는 몇 초가 지나자 눈이 감기며 잠잠해졌다.

복면 사이로 노출된 눈가를 관찰하던 모건은 오랜만의 손님이 흥미로운지 침묵을 먼저 깨트렸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 무엇을 했는지 묻지도 않는가?"

"방법을 알고 여기까지 찾아 왔는데, 무지한 건 상황에 어긋나지."

그는 내 말에 고랑과 같은 주름을 깊게 보이며 웃었다.

소속과 달리 교단의 사제라 해도 믿을 만큼 인자한 얼굴에서 오는 괴리감이 강했다.

"허허- 틀린 말은 아니군.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현명해진다고 말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이리 당연한 구석도 생각하기 힘들어진다네."

모건의 말에 나는 확신을 위해 넌지시 물었다.

"시간의 흐름에 늙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지 인간이라는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말을 들은 그는 허름해진 튜닉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나? 인간은 당연하고 장생 종이라 하는 엘프나 용인을 포함해 모든 생물이 오랜 시간을 들여 지식을 쌓고 수련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흩어지지."

"그냥 자연스러운 이치 아닌가?"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입가를 주욱 올리며 황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에서야 모건은 흑마법사다운 얼굴이 되었다.

"그 자연스러움을 거스를 수 있는 위대한 자들이 존재하지 않나! 자고로 인간이라 하면 초월적인 자들을 따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야."

모건이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것은 필시 악마.

천사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을 하려다 괜히 발작 스위치가 눌릴 것 같아 말을 삼키고 주제를 돌렸다.

"확인차 묻는데 이 마법은 거짓을 밝히는 마법이 맞겠지?"

모건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오른손을 들고 말했을 때 거짓을 고하면 이 산양이 아까와 같이 울 것이야. 한번 보겠나?"

모건이 깡마른 팔을 드는 걸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리 듣고 싶은 소리도 아니고."

"허허! 이 손님은 음악 취향이 영 맞지 않는군."

정정하고 인자한 얼굴을 한 노인인데 머릿속은 산양이 울부짖는 걸 음악 취급하는 정신병자.

이렇게 대놓고 정신 나간 놈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신용이 가.'

어느 정도 확신을 한 나는 인조 악마의 살점을 탁자에 올렸고.

모건의 얼굴에서 웃음이 뚝 끊겼다.

반응이 이리 솔직하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말하게."

선서를 하듯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마법진 위의 양머리를 한번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네마 나타스가 만든 물건을 가져온 것이다."

"···."

산양의 머리가 침묵을 유지하자 모건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이걸로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 제국에 피해를 줬지."

다시 한번 침묵.

그리고 거짓 없는 증언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푸직!

마법진 위에 자리하던 산양의 머리가 으깨지며 마법진이 핏물로 변해 사라졌다.

자리에서 어깨를 들썩이던 모건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 흐하하하!!! 재물에 눈먼 쓰레기들이 기어코 우리의 신을 모욕 하는구나."

도저히 참기가 힘든지 주름진 얼굴을 손톱으로 죽죽 긁으며 자학을 시작했다.

손톱에 걸린 살점과 핏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미친 새끼···.'

얼굴이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모건을 구경하던 나는 탁자에 있는 살점을 모건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증거로 쓰라고."

그는 살갗이 벗겨져 피로 덮인 얼굴에 하얀 이를 씩 보이며 웃었다.

"좋다.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 주지."

내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도 저리 믿음직하니 살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멘데스 펜타그램에게는 내가 왜 이걸 여기까지 찾아와서 고자질하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리 대놓고 쌈박질을 시키려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이제 알아서 하겠지.

내가 마을을 떠날 때 모건도 검은 로브를 입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우두머리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닐까 추측하며 나는 반대 방향으로 발을 부지런히 놀렸고.

그날은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숨길 필요가 없으니 리케와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네 명이 모여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드리트나 자매는 돌아갔다.

마냥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클로에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잠자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에클레어도 못 한 시간이 제법 지나 가벼운 스킨십을 할 때마다 둘 다 애가 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자매가 함께해야 한다는 거부감.

그 감정이 더 강한지 리케가 분위기를 조성하며 은근하게 꼬드겼지만, 에클레어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클로에도 에클레어를 힐끔거리고 얼굴을 붉히며 망설이는 건 피차일반.

맛을 알게 된 자매의 성욕을 해소시켜 주고 싶었지만, 막상 저택에 찾아가서 자매의 방을 순회하듯 도는 것도 꼴이 이상하지 않나 싶었다.

이런 고민을 말하니 리케는 침실에서 내 위에 올라타 장담했다.

"오빠는 걱정하지 마. 넓은 집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하게 다 같이 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만큼 신용 있는 게 있을까. 나는 웃으며 리케를 껴안고 침대를 뒹굴었다.

"좋은 집을 빨리 찾아야겠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빵집을 갔다가 돌아오니 길드에서 두툼한 편지가 도착했다.

안 그래도 찾아갈까 했는데 시기가 딱 좋았다.

리케는 아침을 먹고 옆에서 같이 구경하다 어디든 상관없으니 내가 좋은 곳을 고르라며 아카데미에 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바로 가서 싹 돌아봐야겠네.'

시간 끌 것 없이 오늘 다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문제가 있거나 밤에 시끄러우면 책임을 물을 상대가 있으니 한없이 여유로웠다.

"잘 다녀와."

"오빠도 다녀와!"

리케와 갈림길까지 향했다가 골목에서 짧게 입을 맞추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그녀는 아카데미로 발을 움직이고 나는 길드로 직행했다.

덜컥!

"나 왔다!"

길드에서 보낸 편지를 흔들며 나타나니 접수원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당자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어."

평소라면 천천히 하라 했겠지만, 오늘은 기대감에 조급해져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각자 쓸 수 있는 방도 정하고 내 여자들이 편하게 지낼만한 저택을 구비하면 인생이 얼마나 즐거울까.

구석에 의자를 하나 잡고 기다리니 모험가들 사이에 이질적인 발소리가 섞여서 들려온다.

"로만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백 머리에 안경을 쓴 깐깐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도 부탁 좀 할게."

"로만님을 도울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가보자."

현재 리케와 지내고 있는 집을 구할 때도 이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이름이··· 뭐더라?'

사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다.

이 친구는 생긴 것만큼이나 일 처리가 깔끔하다. 듣자 하니 경력이 쌓이면서 모험가 길드 수도 지부의 재정까지 총괄하고 있다고 하니 인재는 인재.

이런 인물을 보내주다니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길드에서 가까운 순번대로 향하겠습니다."

"좋아."

비어있는 저택은 각각 사정이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은 부정한 느낌이 드는 건 길드에서 알아서 제외했다는 것.

사실 자살해서 저택이 비었건 누가 암살을 당했던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내 여자들이 지낼 거라 생각하니 확실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것을 다 빼고 내가 말했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구경은 점심도 전에 끝났다.

간단히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다시 돌아본 나와 길드의 직원은 동시에 종이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군요."

"이거네."

새로운 사업을 위해 상단주가 다른 영지로 거점을 옮기게 되면서 비어버린 저택.

낙점이다.

··

··

고생해준 길드원에게 보너스를 챙겨주고 저택은 던전에서 쌓아둔 보석들을 꺼내 일시불로 처리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내게 소유권이 넘어오는 게 업무 처리가 시원하니 좋았다.

이 모든 일을 끝내고도 점심시간.

남은 시간은 전문가들을 불러 텅 비어있는 저택과 마당을 청소시켰다.

동시에 제일 중요한 일.

서재나 식탁 같은 가구는 내 여자들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니 아직 구비하지 않은 텅 빈 저택이지만.

침대는 제일 좋고 큰 것으로 당장 구입했다.

이건 4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 누워도 여유로운 크기로 방 하나가 침대에 먹혔지만, 그 꽉 찬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지나갈 때 본 적이 있는 저택이었는데 여기가 비어있을 줄이야···.'

저택 내부는 방도 많아서 제대로 쓰지 않고 창고로 사용될 방이 더 많을 것 같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마당이 화려한 정원의 형태가 아니라 텃밭 혹은 화단으로 쓸 수 있도록 공간이 따로 구비되어 있는 게 좋았다.

리케가 바라왔던 부분이라 반응이 기대되었다.

'이건 못 기다리겠다!'

결국 아카데미가 끝날 시간을 기다리다 리케와 클로에를 불러 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둘 다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나를 따라왔다.

····

"와-! 오빠. 우리 진짜 여기서 지내는 거야?"

리케는 마당의 형태가 특히 마음에 드는 듯 둘러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언니 저택이랑도 가까워서 좋은 것 같아요···!"

클로에는 리케와 화단에 무얼 심을지 이야기하며 벌써 신이 난 얼굴이었다.

높은 담벼락으로 가려진 마당을 여유롭게 보고.

안을 보자는 말에 따라 들어온 둘은 텅 비어있는 저택을 둘러보다 내가 침실을 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때?"

있는 집에서 자란 둘도 침대의 크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둘 다 누워봐."

"엄청 푹신푹신해!"

리케와 달리 많은 생각이 드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클로에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양쪽에 리케와 클로에가 내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리케는 입 모양으로 '변태'라고 말하고는 배시시 웃으며 내 볼을 만졌다.

나는 부정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반대편 팔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클로에는 마냥 좋아 보였다.

"헤헤- 좋아요."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 넓고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감고 10분 정도 있었을까.

한쪽에서 내 팔을 차지하고 있던 리케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있는 클로에를 불렀다.

"클로에. 그거 알아? 오빠는 한 번 잠들면 충분히 자기 전까지 절대 안 일어난다? 짧게 자는 대신 엄청 깊게 자는 것 같아."

눈을 감은 채 리케의 말을 듣고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머리를 굴렸다.

내 잠귀가 얼마나 밝은지 아는 리케가 이런 농담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럴 수가 있나요···?"

'···.'

저 장난에 클로에가 왜 혼란스러워 하나 생각해보니 여행 당시 클로에는 내가 자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잠자리를 이어가다 지친 클로에가 먼저 잠들고 뒷정리를 끝내고도 내가 먼저 일어났으니.

"진짜 어떤 장난을 쳐도 안 일어나. 볼래?"

리케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쿡 찌른다.

예상이 가는 미래에 나는 이를 악물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클로에도 옆에서 손가락으로 내 어깨와 가슴팍을 쿡쿡 찔러보더니 살짝 들뜬듯 목소리를 키웠다.

"지, 진짜네요!"

"그치?"

"헤헤···."

클로에와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장난을 치던 리케는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생각난 김에 원래 집에서 옷 좀 가지고 와야겠다. 들릴 곳도 있고."

"제가 도와드릴까요?"

리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클로에의 어깨를 눌러서 다시 눕혔다.

"클로에는 여기서 쉬고 있어. 오빠 자는 동안 옆자리만 지켜줘."

내가 보기엔 너무 뜬금없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변명과 탈출이었으나. 클로에는 리케의 말에 의심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조심히 다녀오세요!"

딸깍-

리케가 문을 닫고 나가자 클로에는 내게 몸을 더욱 붙여왔다.

"오, 오라버니··· 주무세요?"

꿀꺽-

소녀가 침을 넘겼다.

이게 군침이 도는 것인지 긴장으로 인한 마른침인지 당사자만 알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