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8 - 안개 둥지에서 찾은 노인
'화난 건··· 아니겠지?'
릴리네는 로만과 장난을 치며 지내다가 뜬금없이 현실을 덜컥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이건 분명 로만의 의도와 무관하게 혼자 호들갑 떠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지금 같이 문장이나 단어 하나에 정신이 번쩍 드는 때가 있으니.
"···."
뚫어지게 자신을 보는 로만의 시선에 릴리네의 정신은 지진이 일어났다.
정말 자신의 말이 '추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걸까?
화가 났다기에는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변덕스러운 면이 있는 로만이기에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때까지 자신이나 파티원에게 분노를 보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화가 난 상태를 본 경험이 너무 강렬했다.
로만이 진짜 꼭지가 돌아가면 다른 모험가들처럼 단순히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하거나 주먹다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강인한 힘을 가졌음에도.
냉정하면서 철저하고 손속에 자비가 일절 없다.
'로만 씨는 금이 아니라 백금이야···.'
평소의 스스럼없고 부드러운 모습에 잊지 말자고.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되새긴다.
로만을 만나면 매번 잘 지내다가도 이런 기억이 자제력을 잃고 한 번씩 치고 올라와 미안하면서 곤란했다.
과거에 본 기억들이 떠오르며 혼자 숨 막히는 현장에서 자신을 건져 낼 구조선인 앨리스가 도착하였고.
이제 안심하고 쓰려오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마시는 순간이었다.
"나한테 앨리스가 취향이냐고 물어보던데?"
"···네?"
푸훕-!
로만이 빠르게 접시를 잡아 빼낸 덕에 릴리네가 뿜어낸 액체가 요리를 적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축축한 입가를 소매로 훔치며 릴리네는 닦을 것을 찾았지만 젖은 것이라 해봐야 목재 판때기뿐이니 닦을 필요조차 없었다.
"앉아. 식기 전에 먹어야지."
그릇을 원래 자리에 다시 놓고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서 있는 앨리스를 깨웠다.
"어어··· 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식을 덜어 릴리네와 앨리스의 앞에 두고 로만은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내 여자 취향이라···."
""···!""
음식을 먹으려다 다시 한번 덜컥 놀라는 여자 둘을 두고 생각을 이어간다.
내가 길드에서 입 밖으로 습관처럼 내뱉으며 처녀를 선호했던 건 유니콘의 피에 의한 것.
외형적으로 확고한 취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요즘은 모르겠다.
잠자리에서 메이드 복이나 가터벨트는 개인이 가지는 특색이 아니라 성벽이니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여자들을 품고 있는 지금 내 취향은 무엇일까?
가슴의 크기가 중요한가? 내 여자들의 가슴이 싹 사라지고 절벽이 된다 해도 지금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아니고.'
머리 스타일은? 내 여자들만 봐도 스타일이 다르니 이것도 아니다.
모두 미인이지만 얼굴의 형도 각자의 독보적인 특색을 강하게 풍기니 내가 이제 무엇을 제일 선호하는지도 장담을 못 하겠다.
외견에서 한쪽이 제일이라 선택하면 다른 쪽은 아니라는 말이 되니 아예 두루뭉술한 편도 좋지 않을까?
성벽 쪽으로는 말만 하면 다 들어주니 그것도 서로서로 시원하게 해소가 가능하고.
결국 제일 중요한 점은···.
"믿음이 가는 여자."
과거부터 내가 말하고 다니는 것들을 알고 있는 릴리네가 의문을 표했다.
"···기준이 변하셨네요?"
"변한 게 아니라 추가가 된 거지."
"으음··."
릴리네가 눈썹을 내리며 침음을 흘리자 나는 그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금발의 소녀는 지금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아까 그건 무슨 말이지?'
다시 물으면 저 언니가 진짜 고장 날 것 같은 직감에 입을 닫고 있었다.
앨리스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똘망똘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손을 움직였다.
사치스럽게 특제 소스를 듬뿍 바른 고기를 으적으적 씹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쓸 뿐.
"챔버스가 아직도 금주를 하는 건 좀 예상외인데?"
"자제력은 있는 분이잖아요."
"하긴 라크만 빼면 거기는···."
이어지는 건 자신이 끼어들기 힘든 이야기지만.
나름 분위기도 좋은데 지금 괜히 제자니 뭐니 하며 분위기를 깨트릴만한 주제를 꺼내기에는 아무리 그녀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생각보다 너무 보냈네."
-시익.
자리를 뜨려는 낌새를 보이자 테로가 로만의 머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뢰 가세요?"
그 말에 앨리스의 눈이 번쩍 뜨렸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륵-
"아니.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거든. 눈치 없이 끼었는데 둘 다 말동무하느라 고생했다."
"···전혀 아니에요. 로만 씨 덕에 잘 먹었어요."
"아닙니다! 영광이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입에 있던 고기를 급하게 넘긴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자.
킥킥 웃은 그는 앨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헝클이고 자리를 떴다.
"다음에 보자. 죽지 마라."
"네!!"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가는 로만의 말에 앨리스는 싱글벙글 웃었다.
로만의 뒷모습을 보며 릴리네는 생각에 잠겼다.
'뭔가··?'
확실히 무언가 변했구나.
예전에도 이상할 정도로 독특하고 부드러운 태도는 분명히 있었으나.
그 속에는 숨기지 못할 피로함과 화가 보이곤 했다.
헌데 지금은 정신이 완전히 안정기에 접어든 느낌이다.
*****
"음."
게이트를 타고 영지에서 나와 달리면서 정보를 기록 해뒀던 수첩을 펼쳐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 손으로는 인공 악마의 살점을 만지작거리다가 수첩과 함께 인벤토리에 휙 던지고 속력을 높인다.
'저녁 전에는 돌아가지겠지?'
생각보다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버렸다.
아직 해는 떠 있지만 일을 하는 동안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발을 멈출 수 없다.
얼굴에는 복면을 쓰고 몸은 펑퍼짐한 로브로 덮은 채.
수상하기 짝이 없는 행색으로 나무 사이를 내달렸다.
사락-
빳빳한 나뭇잎을 품은 나무들을 지나자 비가 올 것 같은 습한 냄새가 코에 훅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강.
강 위에 주저앉아 으름장을 놓고 있는 진한 안개가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강을 끼고 있으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안개가 일년내내 깔고 앉은 곳.
게임에서는 안개 둥지라 표시되는 지역이며.
강을 끼고 있는 마을 중에서는 '와포렘'이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크고 작은 마을 수 개가 강을 둘러싼 곳에서 헛발질을 오래 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초행길치고는 잘 찾아왔어.'
속을 까보면 주위와 다를 게 없이 대다수가 강에 있는 물고기를 건져서 먹고살고 있는 그림.
내 행색이 이럼에도 힐끔거리고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쁘다.
썩어버린 배를 손보고 있거나 잡아 올린 물고기의 내장을 빼내며 일상을 지내고 있다.
이 마을에 독특한 점이라 하면 어린아이 한 명 보이지 않고 최소가 중년에서 대다수가 노인.
음울한 분위기만 봐도 찾고 있던 마을이 확실했다.
탁. 탁. 탁.
안으로 파고 들어가 강가로 향한다.
강에 나가기 위한 배들이 묶여있는 나무에 팔 하나가 없는 노인이 멍하니 강을 보며 앉아 있다.
짤그락-
금속음에 고개가 이곳을 향한다.
"받으시오."
동화 두 개에 은화 하나.
동화 사이에 은화를 끼워서 노인에게 건넨다.
하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한 걸음.
비가 많이 오면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에 도착하자 노인이 무릎을 꿇고 동전을 닫혀있는 문 아래로 밀어 넣는다.
끼익-
그와 동시에 열리는 문.
"손님이 이리 찾아오는 건 십 년 만인 것 같군."
오두막에 들어가자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반겨준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책갈피를 끼우고 안경을 통에 집어넣는다.
'모건 블랙우드'
멘데스 펜타그램의 간부 중에서도 최고 위치에 있는 남자.
집단의 머리와 직접적인 연락이 가능한 몇 없는 인물 중 하나로 한평생 악마를 숭배하며 살아왔다.
고강한 힘과 집단의 우두머리에 가까운 위치에 비해 추레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지만.
이건 위장 같은 게 아니다. 이 미친 집단은 원래 이렇다.
머리에는 온전히 판데모니움으로 넘어가 악마가 되는 것뿐.
금화고 술이고 여자고 악마가 된다면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할 것들이기에 세속적인 것을 멀리한다.
줄곧 제국에 뿌리를 내리고 귀찮은 짓을 하는 네마 나타스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사이는 당연히 최악.
이들과 사이가 안 좋은 건 네마 나타스만이 아니다.
다른 흑마법사들이 악마를 욕보이는 짓거리를 하면 집단의 힘과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니 동종업계에서는 미친개나 다름없지만.
현실에는 관심이 없으니 사용하기에 따라 큰 패가 될 것이다.
"이걸 보여주러 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알려주기 위해."
내가 인공 악마의 살점을 슬쩍 보이자 그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더욱 진해졌다.
"···당장 말해라."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으며 집 안의 분위기가 격변하며 뒤틀려왔다.
"뒤부터는 중요한 이야기라 듣는 귀가 최대한 없었으면 하는데."
내가 뒤에 서 있는 노인을 보고 말하자 모건은 물기가 없는 건조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해주지. 자살해라."
"예!"
그의 말에 노인은 기쁜 얼굴로 서랍 위에 있는 단검을 뽑아 든다.
"판데모니움이 나를 반길 것이다아!!!"
푹!
한치의 불안이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자결.
쿵!
실 끊어진 인형처럼 노인이 쓰러져 피를 줄줄 흘렸다.
괜히 다른 흑마법사들이 미친놈들이라고 피해 다니는 게 아니었다.
"굳이?"
방문자에 대한 기선 제압이라기에는 인력이 아깝지 않나 싶었다.
"보고 있어라. 손님에게 피해가 갈만한 일은 아니다."
모건이 주름진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던 핏물이 움직여 진을 만들어 낸다.
-아둔한 자는 둘째 편지에서 깨달았나이다. 믿지 않는 자와 짝을 짓지 말지어다. 어울리지 못할지어다. 정의와 불의는 짝이 될 수 없으니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니.
품에서 글레이프니르를 잡고 있던 나는 익숙한 주문을 듣고 글레이프니르를 한번 쓰다듬은 뒤 다시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