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7 - 성공한 자가 없는 것이지 도전은 많았다.
모험가 길드의 지하 선술집.
자극적인 요리, 술, 담배, 지하 특유의 습한 냄새에 적응한 모험가들에게는 이만큼 안락한 장소가 없다.
저렴한 요리에 저렴한 술 저급한 언어가 판을 치는 이곳에 이질감이 드는 여성들도 가끔은 존재한다.
여자에 눈 뒤집어진 모험가들이라 해도 생존을 위한 눈치는 있는 법.
술에 취해 발정 난 남자들이 가득한 이곳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무슨 일이 생겨도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양털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 머리를 가진 여성과 억센 느낌이 드는 어두운 금발의 소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남자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로만씨의 제자?"
앨리스의 뜬금없는 말에 릴리네가 되물었다.
"네! 이때까지 없었나요?"
모험가 사이에 스승과 제자는 생각보다 흔한 그림이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에 있는 대다수는 앨리스가 꿈꾸는 이상적인 형태와 거리가 있었다.
같은 파티에 낮은 등급을 넣어 짐꾼 부리듯이 부리며 돈도 제대로 주지 않는 일이 일상다반사.
그게 그러면 도움이 안 되는 질 나쁜 사기냐고 릴리네에게 묻는다면···.
당사자가 자진해서 들어가는 형태이기도 하고 따라다니며 보고 배우는 건 있으니 막상 사기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앨리스가 말하는 건 이 기본적인 틀과 단어만 같지 내용은 완전히 벗어나는 이야기다.
금 등급이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한 동이나 은을 제자랍시고 부리는 그림은 흔해도.
청금이나 백금의 제자로 금 등급이 들어가는 일은 릴리네도 본 적이 거의 없다.
이건 금이 가진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걸까?"
릴리네는 어딘가 세리아를 떠오르게 하는 이 소녀의 질문에 부드럽게 답해주며 귀를 기울였다.
"방법이 없나 해서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점은 저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와 열기는 거짓 없이 진심이라는 것.
"으음···."
릴리네는 볼을 긁으며 이 소녀가 상처받지 않고 납득할 수 있는 말을 고민했다.
솔로에 최연소로 백금이 된 모험가의 제자라, 된다면 당연히 좋겠지.
모험가의 삶에 있어 단연코 일생 최대의 기회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를 노린 모험가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았던가.
그녀가 길드에서 본 것만 해도 재력가의 자식, 아름다운 여성, 현재 청금으로 올라갈 거라 유력한 후보라 꼽히는 재능있는 자 등등.
하지만 결과는? 로만은 여전히 혼자 다니고 있다.
'지금도 제자는 절대 안 받을 텐데···.'
릴리네도 앨리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단언하기 조심스러웠다.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나···?'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베테랑들이 가볍게 겁을 주는 느낌으로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모험가에게 금 등급은 흔히 '재능의 무덤'이라 한다.
같은 금이라 해도 위아래로 실력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면서 경력도 적으면 한자리에 많으면 앞자리가 다른 두 자리까지 다양하다.
한 명 한 명이 지내던 마을이나 영지에서는 나름 날고 기며 천재니 크게 될 놈이니 불리던 자들이 속해있다.
승급을 위해서 달성해야 할 수치는 금 등급 까지 확고히 정해져 있기에 타고난 능력이 있다면 여기까지는 빠르게 올라올 수 있다.
허나 청금부터는 다르다.
그 위는 아예 별개의 세계.
금 중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진짜 중의 진짜만이 길드의 특별 심사를 통해 청금으로 올라갈 수 있다.
청금이 그러한데 백금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 모험가들 사이에서 금 등급은 빨리 올라가지 못하면 발이 멈추는 종착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전성기가 지나고도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금에서 방황하며.
기술 좋은 베테랑이라느니 경험으로 지금껏 먹고사니 하는 말을 버릇처럼 떠들며 썩는 게 당연한 미래같이 되어있다.
이걸 넘어서기 위해 조급해진 자들은 백금이 아니라 바로 위인 청금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보려 하지만.
청금도 유별난 인간들이 많고 사적으로는 만나기도 힘들다 보니 사제지간이 맺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으음~ 로만 씨가 제자를 받는 건 본 적이 없네. 시도는 분명 많았는데."
"역시 그렇겠죠···."
기가 살짝 죽은 앨리스를 눈에 담자 릴리네의 눈에는 힘이 빠진 세리아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승급에 대한 소문 같은 걸 듣고 조급해하지는 마. 앨리스는 실력이 있으니 그만큼 빨리 올라왔잖아?"
갑자기 위로의 분위기가 되어가는 이 대화.
'···?'
앨리스가 볼 때 지금 릴리네와 본인은 생각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자신은 승급을 위해 배움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다. 크게 보면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뜻은 그게 아니었다.
"그게 조급하다기보다는 ㅡ."
릴리네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앨리스가 머리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시익!
"앗!"
머리에 움츠리고 있던 테로가 움찔거리며 감정을 보이고.
동시에 릴리네가 앨리스의 어깨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
자신과 눈이 마주친 것일까? 아니면 이 언니와 마주친 것일까.
이쪽을 보며 가볍게 웃더니 다가오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 선술집의 분위기가 바뀌었고.
웅성거리며 모여있던 모험가들이 부딪힐 위험도 없는데 한 칸씩 거리를 벌렸다.
반갑기는 하지만 하필 이 타이밍.
릴리네는 눈을 굴려 앨리스를 확인한 뒤 인사를 건넸다.
"···로만 씨. 잘 지내셨어요?"
덜컥!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앨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시이이!
"물론 잘 지냈지. 릴리네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고 앨리스는 기운차서 좋네."
부드러운 인사부터 우렁찬 기합이 들어간 인사까지 거기에 정령의 격렬한 반응이 더 해지니 지하의 습함이 물러갈 정도로 활력이 대단했다.
세 가지를 동시에 받으며 비어있는 의자 위에 손을 올리고는 묻는다.
"앉아도 되겠어?"
"물론이죠."
"앉으세요!"
둘의 허락에 자리를 앉자마자 테로가 폴짝 뛰어 로만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시이.
"···!"
그 상황에 앨리스만 안절부절못할 뿐 로만도 테로와의 만남이 은근히 기쁜 얼굴이었다.
정령을 보는 사람이 과반수인 테이블.
로만이 뜬금없이 어딘가를 보거나 웃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릴리네 한 명뿐이었다.
테로가 귀나 머리카락을 야금야금 물든 몸을 타고 돌아다니든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받아주며 로만은 자연스레 과일을 집어 먹었다.
"자리에 칙칙한 것들이 없잖아? 이건 또 귀한 자리에 와버렸네."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정말 둘밖에 없는 걸 확인한 로만이 웃었다.
"다들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됐네요."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들었다.
"뭔가 더 시킬 거 있어?"
"저는 아직 남아서 괜찮아요. 술 드시려고요?"
릴리네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건강하려면 역시 우유지. 앨리스도 뭐 마실래? 음식을 더 시켜도 되고."
그는 자신이 계산하겠다는 표시로 금화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뒀다.
감사를 하면서도 릴리네는 고개를 기울였다.
"우, 우유···?"
선술집 메뉴판에 있긴해도 로만이 우유를 마시는 건 릴리네도 처음 봤다.
로만과 자리하면 그는 항상 도수가 높은 술 아니면 물이었다.
릴리네는 뜬금없는 깜찍한 메뉴에 인지 부조화를 느끼고 있었다.
앨리스가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잔에 한참 남아있던 주스를 한 번에 비워냈다.
"파하-! 저도 우유로 부탁드립니다!"
큰 의미가 없을지라도 따라 해보겠다는 듯 손을 번쩍 들며 로만을 따랐다.
로만도 거절하지 않고 기합이 들어가 호의를 받는 앨리스가 마음에 든 듯했다.
"우렁차서 좋다! 요리는?"
갑자기 아카데미 교관처럼 힘이 들어간 로만의 목소리.
앨리스의 머리는 아델만에서 무투 교육을 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제대로 기강이 잡혀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배에 힘을 주고 목청을 더욱 높였다.
"레드 보어 다리를 바싹 구운 것과 선술집 특제 궁극의 미식 소스를 추가해 먹고 싶습니다!!!"
주위에 웅성거리며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로만과 앨리스는 둘만의 세계에 갇혀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부끄러움은 온전히 릴리네의 몫이었다.
"좋아! 아주 활기차군! 주문하고 와!"
"감사합니다!!"
주문을 위해 금화와 메뉴판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는 앨리스를 릴리네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
이목이 쏠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떠나.
기이한 만담 같은 것을 주고받는 이 관계는 무엇인가.
둘 사이가 어딘가 이상하면서 릴리네는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기분을 받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앨리스의 바람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씨··."
"응?"
릴리네의 눈이 주문을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앨리스에게 향했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신 거예요?"
"마음에 들다니?"
의문에 다시 의문으로 물어오는 로만을 보며 릴리네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번과 달리 제법 이뻐하는 것 같은데··· 혹시 앨리스가 진지하게 취향이에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앨리스가 특유의 거친 기운은 있어도 미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흐음~ 딱히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이뻐한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 로만을 보고 릴리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물었다.
"아니면 동생같이 느껴진다거나?"
집요한 그녀의 질문에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로만이 릴리네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따라 마법사님이 왜 이리 추궁하실까?"
"추, 추궁은 아닌데요···."
정신을 차리니 백금에게 주제넘었다는 생각에 기세가 꺾인 릴리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탁자를 탁탁 치며 생각을 빠르게 끝낸 로만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모험가 일을 단순히 먹고 살려고 한다기 보다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쁘고 싹싹한데다 열심히 하니 미워할 점은 없잖아."
-시이이.
머리 위에 자리를 잡은 테로의 소리가 로만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 이상 말을 하지않고 로만이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며 웃자 릴리네는 끙끙거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고작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몇 년 같이 느껴지는 이 시간에서 릴리네를 구원한 건 앨리스였다.
"직접 들고 왔습니다!"
그녀가 나무로 된 쟁반에 요리와 잔을 담아 테이블로 다가왔다.
"고마워."
요리와 잔이 테이블에 자리하고 쟁반을 빈 테이블에 올려둔 앨리스가 상태가 이상해진 릴리네를 슬쩍 보고는 말을 꺼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아니··! 딱히!"
아직 정신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릴리네를 본 로만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한테 앨리스가 취향이냐고 물어보던데?"
"···네?"
푸훕-!
속을 식히고자 주스를 마시던 릴리네가 그대로 액체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