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6 - 어린 수녀의 편지
"끄으으···."
로버트는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두통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숙취를 마나로 풀어내니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일을 보고 오겠다며 내준 방은 음식도 술도 부탁하는 대로 나왔다.
재력이 대단한 집안다운 훌륭한 대접.
미리미리 비축하고 쌓아뒀던 술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방 가득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창가에 커튼을 치고 계속 있다 보니 며칠이 지났는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고 있으면 팔이 고장 난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냥 술을 들이부었다가 눈을 뜨면 숙취를 마나로 풀고 배고프면 안주를 대충 집어 먹고 다시 술을 먹고 자기를 반복.
턱에 거의 나지도 않았던 수염이 까슬까슬한 것이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걸 알렸지만.
자신을 여기에 넣어둔 애꾸눈 마법사는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아이작 이놈은 왜 안 오는 거야?'
설마 자신을 잊었을 리는 없고···.
손을 뻗어서 술병들을 우르르 굴려보니 아직 찰랑이는 녀석이 있어 그대로 손을 뻗어 입에 병을 물었다.
마나라는 것은 편하면서도 그 편안함이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숙취를 강제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
해야 할 일과 업무가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상에 복귀하기 위한 편의성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술을 계속 마시게 하는 동력이 된다.
휴일이 끝나면 길거리에서 흔히 들리는 말.
-내가 술을 다시 먹으면 고블린이다!!!
혹은 오크라고 자학하며 흔히 술을 끊어보겠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이유.
인사불성 상태에서 일으킨 말실수나 행동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숙취가 제일 큰 원인이 아닐까.
그러면서 취하는 감각과 즐거운 자리가 그리워 다시 돌아가곤 한다.
하지만.
숙취도 풀어낼 수 있고.
당장 할 일도 없는데 재력도, 시간도, 마나도 널널한 인간이 자제력을 잃고 술에 빠지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은 천지였다.
재력에 여유가 생기면 욕구의 천칭은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기본심리.
모험가 길드의 문을 열었을 때.
정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내 발은 당장 지하에 있는 선술집으로 향할 것 같았다.
다 큰 어른이 그리 자제력이 없어서야 되겠나.
머리에 있는 할 일을 재차 되새기며 접수원에게 향했다.
"잘 지냈어?"
"아! 모험가님!
옆에 놓여있는 과자를 하나 주워 먹으며 접수원의 탁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입맛에 맞는 과자는 아니었지만, 대화를 위한 자연스러운 제스처.
"별 일 없지?"
"마침 교단에서 모험가님 앞으로 우편이 왔답니다."
"매번 오는 그거?"
성수부터 시작해 교단에서 소모품을 많이 사기 때문인지 분기에 한 번 정도.
백금의 모험가 로만님의 앞길을 축복한다며 미사여구로 점철되어 구구절절하게 적은 기도문 비스름한 종이를 보내주곤 한다.
"내용은 저도 모르겠네요. 겉이 좀 달라서 확인도 했답니다."
하긴 접수원이 편지를 열어보는 것도 아니고 매번 오는 것이라 말해도 그녀는 모를 수밖에.
입이 허전해지니 생각 없이 과자를 다시 집으려다 손을 멈추고 본론을 꺼냈다.
"이참에 넓은 저택을 하나 장만하려 하거든. 괜찮은 물건이 있나 한 번 찾아봐 줘."
그녀는 내 말에 즉시 빈 종이를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모험가님이 원하시는 저택의 구조나 요구사항이 있으실까요?"
선을 넘는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게 현 접수원의 최고 장점일 것이다.
"마당이 있으면 좋겠고··· 서재로 쓸만한 넓은 공간, 위치도 좋고 치안도 나쁘지 않은 곳?"
"네. 더 있으실까요?"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정말 중요한 점이 있었다.
"아! 한밤중에 부랑자나 뒷골목 것들이 행패를 부리거나 시끄러우면 내가 다 죽여버릴 수도 있으니 그 점도 중요하네."
위치도 좋고 한적하면서 치안이 좋은 곳?
아무리 제국의 수도라 해도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들은 찾아낼 것이다.
없다고 해도 생떼 좀 부리면 만들어 내겠지.
뒤에 이어진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안 접수원은 서랍을 열어 붉은색 잉크를 꺼냈다.
빨간 밑줄까지 죽죽 그어 '한밤 중에도 조용한 곳'을 강조했다.
종이에 간단한 요건 작성을 끝내고 남은 칸을 채우기 전에 업무를 위해 질문을 이어왔다.
"기존의 집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매물로 올려드릴까요?"
"아니. 그건 그것대로 두고 쓰려고. 실거주는 나중에 옮기는 쪽."
미리 말을 해둬야 귀찮은 서류작업을 접수원이 처리해준다.
우편을 위한 주소 변경부터 이런저런 시간을 잡아먹는 행정적인 절차는 모험가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
청금만 되어도 그 정도는 어련히 길드에서 처리해주지만.
그것도 당연한 게 아니라 호의에서 오는 행동이다.
길드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얼굴이자 간판.
거기다 행정 업무를 해주는 접수원과는 웃는 얼굴로 지내는 게 좋지 않나.
지금까지 간간이 뿌려둔 물건들이 빛을 발할 시기라 당당하게 부탁할 수 있다.
"이해했습니다. 물건을 선정한 뒤에 우편으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그렇게 부탁할게."
일단 길드에서 해야 할 큰 일은 끝.
탁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자 접수원은 재차 교단에서 날아온 편지에 대해 언급했다.
"교단에서 온 건 지금 드릴까요?"
"음··· 까먹기 전에 챙겨두는 게 좋겠지."
접수원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벗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런 걸 기도문이라 하나? 축사? 축언?'
행운의 편지라 하기에는 격이 확 떨어지고··· 새삼 그 편지를 뭐라 칭해야 할지 마땅히 모르겠다.
매번 누가 쓰는 건지 모르지만.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편지는 매번 다른 내용으로 앞길을 축복해주기에 대단하다 느끼고 있었다.
악필인 내가 볼 때는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어 교단에서 편지를 받을 때마다 부적 같은 느낌으로 챙겨두긴 한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고맙다는 인사를 편지와 교환하는 순간 눈이 가늘어졌다.
발신지를 보면 교단에서 온 건 맞는데 겉이 완전히 달랐다.
평소라면 금색 테두리가 감싸져 있는 빳빳하고 고급스러운 종이인데 이건 달랐다.
"어! 진짜 너무 다른데?"
"그렇죠? 그래서 교단에서 온 건지 저희가 다시 확인했답니다."
아까 확인했다는 게 이 뜻이었구나.
"흐음."
이건 교단에서 자체 제작하는 튼튼한 종이가 아니다.
아마도 이건.
'잡화점에서 파는 편지 봉투··· 아닌가?'
교단이라는 중후하고 묵직한 발신지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외관.
편지를 열기 위해 앞면을 보니 교단을 인증하는 도장은 찍혀있는데 입구를 봉인할 때 사용하는 봉랍이 없다.
더더욱 내용이 궁금해진다.
드륵-
길드 구석에 비어있는 의자 하나를 잡고 앉아 입구 아래에 붙어있는 얇은 촛농을 짧게 자른 손톱으로 건드렸다.
간단하게 톡 뜯어지는 봉투를 열자.
힘을 조금이라도 강하게 주면 찢어질 것 같은 종이가 딸려 올라온다.
[ 로만 형제님께. ]
- 대륙의 악을 벌하시느라 바쁘실 백금의 모험가님께서 저 슈엘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 존귀한 분의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닐까,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다 이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우··· 이게 뭔."
시작부터 곡소리가 나올 만큼 부담스러웠다.
이건 누가 봐도 교단에서 온 게 맞구나.
악을 벌하고 자시고 나는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편지 봉투를 다시 한번 뒤집어서 확인해봤다.
일단 내게 온 건 확실하다.
교단을 증명하는 인장과는 반대되는 분위기의 편지지와 봉투는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다.
'슈엘이 누구지?'
흔하지 않은 이름 같은데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눈을 감고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다음 줄로 눈을 옮긴다.
-모험가님이 베풀어주신 덕에 어깨의 상처를 무사히 치료했습니다.
'아! 그 빵순이!'
복스럽게 먹는 게 인상적인 소녀.
먹보면서 생판 남인 나에게 간식을 스스럼없이 나눠줄 정도로 맑은 눈동자와 정신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순수함이라 인상적이었다.
- 비록 저는 모험가를 그만두기로 했지만, 전투 중 상처를 입고 교단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성법술을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해 보기로 했습니다.
'역시 그렇지.'
그래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찾은 게 장했다.
안주하는 자가 편하게 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세계가 아니기에 부지런히 달려 자기만의 장기를 확보하는 게 좋다.
이제야 밑에 줄이 빠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위인처럼 추켜세우는 낯간지러운 말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도중에 읽는 걸 포기하고 건너뛰어 마지막 핵심만 봤을지 몰라도.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예의를 차려보려고 단어 선정을 애쓴 게 보여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내가 감성이 좀 변했나?'
이 편지 한 장으로 숨길 수 없는 흐뭇함이 차오르고 정신적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 든다.
내 여자들과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해지는 불안함이 사라지고.
매번 병적으로 무시해오던 작은 것들에도 감상을 남길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일에 있어서 결단력과 집중력은 오른 느낌.
썩 나쁘지 않았다.
-저희 성녀님이 모험가님께 이번 일에 대한 답례를 꼭 하고 싶다고 하여 차후 시간이 되실 때 교단으로 편히 연락을 주신다면 ···.
갑자기 왜 성녀까지 나오는 지 모르겠지만, 그 수녀가 무사하면 된 것 아니겠나.
'시간이 되실 때 편히.'라는 문장이 들어간 이상 당장 성녀를 만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귀찮게 찾아갈 필요 없이 성녀의 특성상 곧 수도를 떠날 것이다.
괜히 지금 가면 또 자리까지 해서 잡혀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대로 있다가 성수나 포션이 바닥을 보일 때쯤 들려서 이걸 빌미로 한번 쓸어오면 딱 맞지 않을까.
덜컥-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편지를 인벤토리에 챙겨두고 길드의 선술집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