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 - 유리 꽃
맥락은 다 무시하고 골인 지점에 도착.
지금 내가 이 던전을 찾아온 것도 리케 때와 마찬가지로 중간 과정을 모두 건너뛴 상황이다.
누구도 개봉하지 않은 그의 유서를 찾을 필요도 없었지만.
마지막에 그가 사라지기 전. 어깨를 두들기며 남긴 말이 인상 깊었다.
-이름 모를 친우여. 행복하게 살아주게.
살아생전.
전선을 지원하고 임무를 끝낸 모르푸스가 돌아왔을 때.
약혼자가 기거하고 있던 영지는 적국의 습격을 받았고 소피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소피아에게 보여주려 했던 꽃은 완전히 시들어 말라버렸고.
모르푸스는 일생 겪어본 적 없는 슬픔과 우울함에 잠겼다.
자신의 목을 죄고 익사시키려 드는 감정에는 화풀이가 필요했다.
그저 적을 베고 또 베어 넘겼다.
막시마 기사단의 단원들은 마치 본인의 복수인 양 자신을 따라나섰고 전선을 지날 때마다 단원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전쟁은 극적으로 승리했지만.
화풀이할 전선을 잃고 집에 틀어박힌 모르푸스는 깨달았다.
감정에 휩쓸려 아끼던 단원 모두를 자신이 죽였다고.
믿고 따라왔던 단원의 가족들은? 자신으로 인해 똑같은 악순환을 겪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갑옷을 입고 검을 들었다.
시들어버린 꽃을 품에 안고 속죄를 위해 길을 떠났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사치.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그는 걸었다.
단원들의 가족을 한 명씩 만나 사죄를 보인 모르푸스는 뒷골목의 마법사에게 부탁해 자기 자신을 산 채로 깊은 구덩이에 파묻었다.
-누구도 찾지 않을 숲속.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게 내 운명이다.
후회와 사념이 긴 시간 뭉치고 뭉쳐져 만들어진 던전.
그가 로만에게 건네준 것은 원래 소피아의 품으로 가야 했던 꽃이었다.
모르푸스의 오랜 심력과 마나로 만들어진 꽃이 로만의 손을 거쳐 클로에에게 전해졌다.
건네받을 당시에는 유리처럼 속이 텅 비어버린 꽃 한 송이였다.
줄기에는 세계의 기반이나 다름없는 마나를 채워주고.
봉오리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채우면 완성된다.
이 안에 자리한 마나와 피는 서로 섞이지 않고 층을 유지하며.
혈액은 응고되지 않은 채 찰랑이며 각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 이 아이는 특별한 포장을 거친 뒤.
클로에의 검은 브로치와 함께 그녀의 품을 지키게 되었다.
거기에.
돌아오다 허전한 마음이 들어 꽃다발을 사 셋에게 선물하니.
그녀들은 진심으로 놀라며 기뻐해 줬고.
특히 클로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꽃을 선물하는데 특별한 날일 필요는 없다.
특히 제국의 남자들 관점에서 꽃?
사용처가 불분명하고 귀찮게 관리까지 해줘야 하는 꽃은 선물이 아니라 짐 덩이라 느낄 수 있으나.
여성들의 관점은 또 다르다.
꽃다발 하나로 다들 웃는 모습을 보여주니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쁘네.'
웃는 모습이 셋 모두 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가 마지막에 건넨 말과 마음을 지금은 확실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살다 보니 선업이라는 개념에서 인식은 멀어졌지만.
모르푸스 같은 시원한 성격을 마주하니 해방과 같이 좋은 일을 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박에서 해방된 모르푸스의 행방은 현실에서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게임에서는 기사단원들과 소피아와 만나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모르푸스의 그림이 나오며 던전은 끝난다.
"···후."
가슴을 울리는 감정은 즐길 만큼 즐겼다.
이제는 레오 플로이드의 목을 떨어뜨리고 남은 인공 악마의 살점의 사용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였다.
··
··
점심시간에 식사를 끝내고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녀가 세 명.
오늘은 리케와 클로에가 개인실까지 빌려 호화로운 식사를 세리아에게 대접했다.
한명 한명 특색이 다들 강하지만.
지금 제일 주목할 점은 표정이 일치하지 않고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잿빛 머리의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고.
검은 머리의 소녀는 폭탄 발언을 쏟아내면서도 무덤덤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머리의 소녀는 입에 묻은 소스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거, 거짓마알!!"
"···우리도 숨기기 싫어서 알려준 건데 왜 그렇게 부정하는 거야? 나쁜 일은 아니잖아."
리케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세리아의 입이 꾹 닫혔다.
"그래도···!"
남자에게는 티끌도 관심 없을 것 같은 둘인데.
그 두 명이 같은 남자의 연인이 되다니?
아무리 맛있는 걸 먹인다 해도 세리아가 대뜸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정보였다.
자신이 그리 단순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그때 아카데미를 안 나온 게···그럼 그때 술을 산 것도?!'
성실한 클로에가 아카데미까지 무단결석으로 빠지고 남자와 단둘이 여행이라니.
리케의 말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5기사인 언니와 갔을 거라 생각했다.
좋은 게 좋은거라고.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건 당연하다.
클로에도 리케도 둘 다 행복하면 세리아도 만족한다.
그런데도.
이 기분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강에 떠다니는 알 신세?
'으음···.'
떠올려 본다.
백금의 모험가면서 아카데미 교관이라는 기이한 자리를 자처하고 있는 교관님.
언니의 이야기만 들어도 이리저리 유별난 사람이고 실제로 자신의 느낌도 그렇다.
오늘.
백금이라는 등급은 무력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하다는 걸 세리아는 바로 지금 체감했다.
'어떻게?'
이 둘을 사랑에 빠져 해롱해롱하게 만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언니에게 말해서 답을 구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불가능한 영역이다.
세리아가 정말 잘난 남자의 얼굴과 몸을 가진다 해도 이 둘을 어떻게 꼬드길 자신? 절대 없다.
"어··· 그럼 에클레어님은 알고 계셔?"
갑작스레 든 의문에 고개가 클로에를 향하자.
클로에가 개미가 기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허락은 받았어요."
변방의 귀족들도 아는 드리트나 가문의 실권자가 내린 허락이라니. 그럼 이미 모든 게 진행됐구나.
'···!'
생각해보니 이렇게 되면 둘이 아카데미를 훌쩍 떠나버릴까.
세리아의 심장이 덜컥였다.
"그, 그럼 아카데미는 그만두고 혼인한다거나?"
리케는 지금 복잡한 사정으로 예외라 하더라도 상식은 그렇다.
드리트나라 하면 제국에서 영향력이 있는 가문.
그곳의 차녀에게 상대가 생겼는데 가문의 입장에서는 당장에 혼사를 진행하지 않을까.
중대사에 대한 대답은 클로에가 아니라 리케에게서 나왔다.
"아니. 혼사는 나중이고 만약 하더라도 아카데미는 계속 다닐 거야. 오빠도 언니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라 했고."
"진짜?!"
"그리고 혼례는 같이 올린다 해도 진짜 중요한 순서는 따로 있는 거니까."
군살 없이 늘씬한 아랫배를 쓰다듬는 리케의 농염한 색기에 세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이유를 불문하고 동성임에도.
그 모습을 본 세리아와 클로에의 침이 꿀꺽 넘어갔다.
"···."
"가게가 좀 더, 덥네요!"
클로에만이 리케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의 열을 날리고자 손으로 부채질을 연신 거듭했다.
그 반응에 더 깊이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직감한 세리아는 의자에 기댄 채 슬라임처럼 늘어졌다.
"둘 다 행복하면 된 거긴 한데··· 너무 크게 놀랐어. 진 빠진다아···."
좌석 밑으로 미끌어질 듯 흘러내리는 세리아를 클로에가 급하게 잡아 일으켰다.
리케는 이런 것을 절대 받아 주지 않으니 이대로면 남작가의 여식이 바닥에서 굴러다닐 것 같았다.
"죄, 죄송해요! 늦어질수록 말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그랬는데 역시 급했나 봐요···."
"클로에. 자꾸 받아주니 세리아가 더 하잖아."
오라버니의 유무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른 리케의 모습에 클로에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받아줘도 되는 거잖아."
"보통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해?"
클로에의 옆에 딱 붙은 세리아가 항변하자 리케는 태연하게 홍차를 잔에 채웠다.
"흥! 리케는 무서워서 실전 교관님이랑 딱 어울리네."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
밀크티를 마시며 태연하게 받아치는 리케의 말에 세리아가 토라져 클로에의 팔에 더 강하게 매달려왔다.
"클로에! 리케한테 뭐라고 좀 해줘!"
"네에?! 아하하···."
클로에는 난감하게 웃으면서도 머리에서는 세리아가 모르는 리케의 일면이 떠올랐다.
리케가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때 감정을 드러내는 애교스러움을 보면 세리아가 어떻게 반응할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 궁금하지만.
세리아에게 보여줄 일도 없을 것 같아 클로에는 입을 꾹 닫았다.
*****
업무와 행사가 밀려 수도를 벗어나지 못한 게 되려 다행이었다.
"다행이에요. 무사히 돌아와서."
"성녀니이임···."
얼마나 무서웠을까.
좋지 않은 소식을 듣는 건 수천 번이 넘어도 적응할 수 없었다.
아트라가 성녀가 되기 전.
어릴 때부터 같은 보육원을 거쳐 교단에서도 줄곧 봐왔던 아이라 모험가를 한다고 했을 때 늘 걱정이 자리했었다.
결국 우려하던 사건이 터졌지만, 다행인 건 상처가 났을 때 처치를 해둔 것.
눈에 보이는 흉터도 크게 없고 후유증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있다고 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는 공포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이제 모험가도 그만두겠다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도 응급 처치에 질 좋은 포션을 사용해서 다행이에요."
성법술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값비싼 포션까지 상비하고 있다니.
아트라의 머리에서는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대비책까지 준비해둘 정도로 진지하게 모험가에 임하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빵과 간식만 찾던 그 어린 소녀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게 놀라웠다.
"읏! 그, 그게···그 포션은··."
줄줄 흘리던 울음을 뚝 그친 수녀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