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4 - 모르푸스
와장창!
밖에 있는 것들과 차이가 없는 리빙 아머들을 찢어버리며 중앙으로 향했다.
'재밌겠어.'
상기하다 떠오른 것이.
이 녀석은 게임을 시작하고 초반 튜토리얼 부분만 지나도 진입해서 만날 수 있다.
허나 굳이 올 필요는 없다.
조건이 없는 것에 비해 무식한 데미지와 쉴 틈 없는 공격으로 악랄하다 불리는 녀석.
초반에 알몸이나 다름없는 장비로 고생해서 잡아봐야?
로버트가 쓸 장비를 주는 게 아니다 보니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짜다는 평만 가득한 몬스터다.
'그것도 초중반 한정이지만.'
저벅- 저벅-
보스의 앞에 섰다.
내 머리가 이미 스토리를 알기에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녀석은 분위기가 음울하면서 중후한 것이 고고한 멋이 있다.
특유의 가라앉는 배경음악이 일품이라 불렸는데.
그 멜로디가 머리에서 확 떠오르지 않아 아쉬웠다.
'역시 실제로 보니 더 멋있네.'
모 게임의 시작점에서 뉴비 절단기 역할 겸. 크리에이터들의 영상 시간을 책임지는 필드 보스.
무식한 말을 타고 황금 할버드를 휘두르는 그 기사처럼.
단순히 변종 리빙 아머라 보기에는 강렬함이 느껴지는 하나의 개체.
이놈 또한 '왜 여기 이런 게 있지?'라는 의문이 들 만큼. 이 던전과 숲에 존재하는 생물들 중에서는 규격 외.
저 몬스터는 무난하기 그지없는 이 던전과 어울리는 수준의 보스라 할 수 없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정신 사납게 관절을 빙글빙글 회전시키지도 않으며.
피로와 지친 기색에 물든 자세로 무너진 돌기둥 위에 앉아있다.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는 시선.
허벅지 위에 올라가 안으로 모인 양손.
바닥에 널브러진 커다란 대검.
그 날붙이를 보면 까맣게 굳은 무언가로 점철되어 있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온 망토는 끝이 완전하게 삭아버렸다.
-하아아···.
초연한 한숨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텅 빈 갑옷 안에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비어있는 갑옷의 안을 뿌연 무언가로 채우기 시작했다.
-막시마 기사단은···?
"내가 다 죽였지."
-모두 편해졌는가. 부럽군···.
"부럽긴 곧 똑같이 될텐데."
절그럭-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리빙 아머는 곧이어 바닥에 있는 대검의 자루를 잡았다.
-여신이 나의 속죄를 듣고 자비를 베푸셨는가··· 드디어 괴물 중에서도 진짜 괴물이 왔군.
'대사가 다른데?'
내가 로버트는 아니지만, 원래 대사는 '시험해볼 만한 자가 왔군.' 에서 변하지 않는다.
단숨에 끝낼 만큼 강해져도 그 대사의 변화는 없었다.
철컥.
기괴한 움직임 없이 한 명의 인간처럼 움직이며 리빙 아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옷 안은 곧 증발할 것 같은 마나가 안개처럼 몽글몽글하게 뭉쳐 이루어져 있지만.
투구 밖으로 삐져나오는 안광만은 멀리서 지켜보던 앨리스가 얼어버릴 만큼 살벌했다.
-막시마 기사단의 단장 리베르토 모르푸스다.
"모험가."
지금은 비록 리빙 아머라 해도 원래는 한 명의 기사.
절제와 고고함을 중시하는 기사라 볼 수 없을 만큼 모르푸스는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 들떠 보였다.
-좋군···정말 좋아! 주제넘은 부탁일지 모르네만, 나를 좀 쉬게 해주겠나? 부하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쓰러져 자던 날이 그리웠지.
플레이어를 시험하듯 말하며 달려들어야 하는 녀석인데.
현실에서 마주하니 한 명의 호쾌한 기사님이 되었다.
자신은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며 검을 휘두르고.
마지막에서야 인정한다며 가진 걸 넘기는 녀석은 어디 갔는지.
벌써 죽어서 편해질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어쩔 수 없나.'
앨리스의 앞에서 연달아 인벤토리를 쓸 생각은 없다.
애초부터 주먹이면 충분한 것을.
글레이프니르와 최근 들어 연습 외에 실전을 치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꺼낼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소피아···.
이제 곧 만날 수 있을까.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기사가 자세를 잡는다.
-시이익!!
풍겨오는 육중한 기운에 테로가 발악하듯 꼬리를 바짝 세워 울었다.
"선공은 양보해줄게."
선공은 양보하지. - 원래 모르푸스가 할 대사를 선수 친다.
불같이 화를 내야 할 도발에 그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쿵!
박차는 힘에 돌바닥이 뒤집어진다.
모르푸스의 신형이 당겨낸 고무처럼 쭉 늘어지며 쏘아졌다.
··
··
꿀꺽-
소녀의 목이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꿀렁이며 침을 넘겼다.
앨리스는 현재 자신의 수준에서 직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위험도에 한계가 있다.
1에서 10이 있다면 10을 넘어가면 그 이상은 그저 자신의 목숨을 단번에 빼앗을 수 있는 상대일 뿐이다.
백금의 모험가도 그렇지만 저 리빙 아머인지 기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몬스터도 앨리스의 견적을 넘어섰다.
기사가 자리에서 대검을 잡고 일어나 안광을 빛내기 시작했을 때.
앨리스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백금의 모험가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낀 것이지만.
강자가 의도를 가지고 풍기는 날카로운 살심에 노출된 앨리스는 신경이 전부 얼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무, 무기는?'
백금이 순수하게 주먹을 사용하는 무투가라고 들어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백금이라 해도 장비가 없다면 저건 위기이지 않을까.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이라도 던져줘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쿵!
바닥의 돌이 굉음에 깨지며 공중으로 뿌려지는 순간.
기사는 그의 앞에 도달해 대검을 내려찍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재빠른지.
멀리서 봐도 거리를 좁히는 걸 눈에 제대로 담지 못했다.
"어?!"
그리고 이어지는 기가 막힌 장면.
떨어지는 대검의 옆면을 합장으로 잡아낸다.
앨리스가 실전에서 처음 보는 칼날 잡기.
이건 분명한 생사결이고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실패하면 반으로 갈라지는 저 위험한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처음 봤다.
대검이 그대로 합장에 휘둘려 기울어지고 백금의 발차기가 투구를 쳐올렸다.
캉-!!
빠르게 회전하며 공중에 떠오른 투구와 갑옷의 마나가 재차 결속되며 달라붙는다.
-크아아아!!!
적의 우렁찬 함성만으로 앨리스는 뒤로 한 걸음 밀려서 물러났다.
몬스터가 발악하며 휘황찬란한 리빙 아머를 허공에서 와르르 쏟아냈으나.
그는 보스의 무구인 대검을 빼앗아 일검에 리빙 아머를 쓸어내고 검을 내던져 벽에 처박았다.
이어지는 근접전은 압도적.
검을 잃은 보스 또한 능수능란하게 주먹을 뻗어왔지만.
속절없이 모험가의 손에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닮은 몬스터는 처절할 정도로 파괴와 복원을 거치며 발악했으나.
백금의 체술은 잔혹할 정도로 실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신화적이라 해야 할지.
야성적이라 해야 할지.
앨리스는 이상할 정도로 피가 들끓는 느낌을 받으며.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모든 장면을 최대한 눈에 담아내려 애썼다.
파지지직-!
자세를 낮춘 백금이 주먹을 쥔다.
그 손에서 튀는 검붉은 번개.
'···저게 오러?'
자신이 알고 있는 푸른 오러가 아니었다.
보는 순간 전신에 흥분감이 휘몰아치며 소름이 끼쳤다.
앨리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걸로 끝을 맺겠구나.
끝이 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째앵-!
내지른 주먹을 타고 검붉은 오러가 종횡무진 날뛰며 몬스터의 전신을 가로지른다.
전신에 검붉은 선이 아로새겨지며 유리처럼 깨진 갑옷의 파편이 흩날리고 중앙이 뻥 뚫렸다.
찌그러지고 깨져도 계속해서 모습을 복원해오던 리빙 아머의 수복이 멈췄고.
움직임이 고장 난 마도구처럼 움찔거리며 발작을 일으켰다.
갑옷의 착용자처럼 내부를 채우고 있던 마나가 한 줌도 남지 않고 흩어지는 게 느껴진다.
보스의 전신이 재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불현듯 발작을 멈춘 기사는 품에서 투명하게 빛을 머금는 무언가를 그에게 건네주었고.
둘의 사이에서 무언가 짧은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전우처럼 모험가는 웃었고 리빙 아머는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고는 할 일이 끝났다는 듯.
-···하하하하!!!
정말 후련하다는 냥 속 시원하게 웃더니 그 자리에서 재로 변해 휘날리며 사라졌다.
"···."
말도 안 되는 격렬한 전투를 끝내고 그가 자신 쪽으로 다가왔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온 그는 무릎을 살짝 낮췄다.
"이제 돌아가야지?"
-시이···.
전장의 한가운데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 기운이 쭉 빠진 테로가 엘리스의 머리 위로 풀쩍 뛰어넘어 가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앨리스의 입장에서는 테로가 돌아와 민폐가 끝난 게 다행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눈으로 보고 재차 실감하고 나니 말이 처음으로 돌아가 어색하게 나왔다.
이때까지 주제넘게 너무 편하게 군 것 아닐까.
"왜 또 말투가 이상해졌어?"
피식 웃은 그가 앞서서 복도를 걸었다.
돌아가면서도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테로와 장난을 치는 모습.
아까 그런 전투를 한 무인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내 머리가 맛있나 보네."
"···?"
지켜보던 전투를 복기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더니 테로가 어느 순간에 백금의 머리로 이동했다.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백금의 머리카락을 야금야금 물고 있었다.
-시익.
"테로!!!"
예의 없는 행동에 기겁해서 불렀지만, 자기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테로가 백금과 놀며 그저 즐거워하는 게 느껴진다.
"괜찮아. 귀엽잖아."
"그래도···하아."
한숨 소리를 들은 테로가 그제야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자신의 머리로 돌아왔다.
"···."
리빙 아머가 정리된 던전에서 빠져나가는 건 금방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아직 숲에 햇빛이 떨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앨리스는 던전을 클리어 한 시간이 말도 안 되게 짧았다는 걸 실감했다.
"파티원들이랑 집결지가 있는 거지?"
"네! 오늘은 정말 면목 없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를 ㅡ."
그는 재차 이어지는 사과에 질색이라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을 끊었다.
"됐어. 덕분에 지겹지는 않았으니. 그리 미안하면 다음에도 테로나 한 번씩 보여줘."
어지간히 테로가 마음에 든 듯한 표정이었다.
온전히 능력이 아니라 외견이나 행동이라 해도 정령을 백금에게 인정받은 느낌이라 솔직히 기뻤다.
"···물론입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의 어색한 말투 때문인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 치고는 가볍게 웃는다.
"고생하고. 죽지 마라."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숲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