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3 - 리빙 아머
"그건 이제 찾아야지."
긴 설명은 필요 없이 행동으로 보인다.
앨리스는 눈을 껌뻑이며 내 걸음을 쫓아왔고.
키 차이 때문인지 내가 두 걸음 걸으면 앨리스는 세 걸음 정도 걷는 듯했다.
'이건 아니고.'
뒤따라오는 소녀를 두고 나는 나무 사이를 지나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숲에서 가끔 보이는 몬스터들이 남긴 영역표시.
흔한 것으로 따지자면 나무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때도 있고.
자신들이 포식한 생명체의 골통을 밖에 걸어두는 경우도 있다.
숲을 집중하고 걷다 보면 각자의 개성 넘치는 표식이 있으며.
경험이 적은 모험가들은 오래 살고 싶다면 이걸 놓치지 않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오!"
-시이.
내 목소리에 날름거리며 정령이 반응한다.
이렇게 굵고 튼튼한 나무면서 존재감은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흐리다.
손끝에 걸리는 자국은 얼핏 보면 짐승의 손톱자국과 다를 게 없었지만.
이 날카로움은 칼잡이가 남긴 검상이다.
"찾으셨나요?"
앨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여 긍정을 표했다.
"조금 떨어져 있어."
"네!"
군말하지 않고 멀어지는 그녀를 두고 나는 정령을 최대한 써먹기로 했다.
"이 나무를 뽑게 도와줄래?"
그냥 주먹이나 발로 부수고 날려서 뿌리째로 뽑아도 되겠지만.
얼른 이 아이를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볼일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도 억지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슈익!
요구에 따라 마나를 미미하게 사용하며 몸에 힘을 주는 모습.
자꾸 들고 다니니 귀여워서 정이 들 것 같다.
흔히 개나 고양이를 넘어 파충류까지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 나.
취향을 저격하는 형상을 한 정령에게 머리 위를 내준다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프슥! 팍!
정령이 힘을 사용하자 나무의 주위가 파이기 시작했다.
부분부분 거친 소리를 내며 파이는 것이 투명한 삽으로 들어내는 것 같다.
잠시 기다리니 자신이 할 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정령은 내 머리 위에 배를 탁 붙인 채 늘어졌다.
"고맙다. 고생했어."
-스으···.
지금이라도 발로 그냥 차서 날릴까 고민이 됐지만.
정령이 힘내준 값은 이용하기로 했다.
앨리스가 아직 멀리서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무를 그대로 민다.
빠득- 뿌드드득!
앞뒤로 움직이는 게 끝이 아니라 순수한 근력으로 위로도 당겨준다.
대충 몇 번 흔드니 뿌리가 들려 옆으로 넘어간다.
"엽."
쿠웅!
땅을 작게 울리는 진동에 숲의 소동물과 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들린 나무 밑동 아래.
흙을 발로 슥슥 밀어서 치우자 문고리가 눌어붙은 거무튀튀한 문짝이 있었다.
다행히 누구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라 만족감이 차오른다.
"좋아 좋아~ 잘 찾았어."
당기면 끊어질 것 같은 저 고리를 잡을 필요는 없다.
손가락에 오러를 일으켜 문에 구멍을 내고 그대로 걸어서 당긴다.
끼이이익-
해가 들어오는 푸른 숲이라기엔 칙칙함이 느껴지는 돌계단.
어둠으로 끝이 어딘지도 보이지 않는다.
"앨리스."
"예!"
"밖에서 기다릴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제가 방해될까요?"
자신의 안위보다 효율을 먼저 걱정하는 앨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음침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 정도 수준은 아닌데. 분위기가 칙칙하잖아."
"방해가 아니라면 가고 싶어요··! 저도 모험가니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백금의 무위를 견식 할 또 한번의 기회- 앨리스의 눈이 호기심에 번쩍였다.
"기세 좋네. 가볼까."
가슴속에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무언가를 추구하는 열정이 널리고 널린 모험가들과는 남다른 소녀였다.
저벅-
계단이 시작되는 입구는 내 키로 허리를 펴지도 못할 만큼 낮았다.
거의 주저앉다시피 해서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허리를 펼 만큼 천장이 높아지며 공기가 다른 세상처럼 확 변했다.
"엇!"
앨리스도 이 감각을 느꼈는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가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소리 내도 괜찮아. 발밑만 조심해."
모험가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질 낮은 던전과는 다른 독특한 던전이다 보니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여기에 있는 보스는 한 번 사냥하면 다시는 리젠 되지 않는 네임드 몬스터.
큰 줄기가 되는 퀘스트와 엮이거나.
주인공 혹은 히로인에 관련되어 파워 인플레를 일으킬 여지, 아티팩트를 주는 녀석들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짜여있다.
····
계단이 끝나고 불현듯 등장한 복도는 완전한 어둠이 아니라 빛이 존재했다.
허공에 날리는 먼지 같은 것들이 미미한 빛을 뿜어내며 복도를 밝혀왔다.
절그럭- 절그럭-
그리고 저 복도 중앙에 서 있는 갑옷.
관절이 접히는 부위와 이음새만 봐도 속이 텅텅 비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움직임.
안에 착용자가 들어있다면 저리 관절과 상반신이 제멋대로 빙글빙글 회전한다는 게 불가능하니 정체를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리빙 아머?"
"맞아. 똑똑한데."
"···실제로는 처음 봐요."
거리가 제법 있다 하더라도 직진으로 뚫려있는데 앨리스와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일정한 간격을 맴돈다.
범위 안에 들어가야 반응하는 타입.
"한판 해볼래? 집중만 잘하면 무난하게 이길 거야."
"아! 괜찮을까요?"
작은 소녀의 몸에 흐르는 용인의 피.
새로운 상대를 마주하니 겁먹기보다는 눈을 번쩍인다.
'어떻게 싸우려나.'
전투 도중에 참전해 보지 못한 것. 이 혼혈 소녀의 방식이 궁금했다.
순수한 마법인가? 아니면 뛰어난 신체 능력을 이용한 무기술 혹은 맨손 격투?
단순한 마법사라 하기에는 테로를 잡으려 할 때 보여준 움직임이 기민하고 뛰어났다.
"저기까지 함정은 없으니 안심하고 가도 좋아."
"···!"
"리빙 아머는 머리가 약점이 아니라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쓰러지는 형식이니 보이는 곳 어디든 때려."
"예!"
그녀가 품는 건 의문보다는 고양감.
신이 나서 흥이 올라 보이는 소녀의 등을 툭 쳐주자 그걸 신호로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탁! 탁! 탁!
앨리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경쾌한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절그럭.
놀란다거나 적대적인 감정 표현도 없이.
리빙 아머는 상반신을 빙글 돌려 범위에 들어온 소녀를 향해 검을 움직였다.
부웅-
앨리스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검을 피해낸다.
"흡!"
팔보다 힘과 리치가 우월한 다리를 이용한 체술.
빠악!
회전력을 실은 발차기에 맞은 리빙 아머의 갑옷이 움푹 파이며 벽에 처박혀 분리된다.
깡통처럼 와르르 무너졌던 갑옷들이 다시 일어나 형체를 만들기도 전에.
그녀의 주먹과 발이 쇳덩이를 자비 없이 찌그러트렸다.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고 돌아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감탄했다.
"오오~ 제대로 배운 티가 나는데?"
앨리스는 내 쑥쓰러운듯 머리를 긁으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이쪽으로 제자를 양성하시거든요. 저도 어릴 때부터 거기 섞여서 배웠고···."
"어쩐지 체계가 깔끔하게 잡혀있더라."
"그 정도 까지는···!"
던전 내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사담과 완전히 죽어버린 긴장감.
분위기를 이어서 복도를 가다 보니.
처음과 달리 리빙 아머의 수가 늘어나 최소 둘은 뭉쳐서 일정 거리를 왕복하고 있다.
"이제 뒤에 있어. 함정 같은 쪽은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시간을 잡아먹어서."
"아·· 넵!"
정령의 도움을 받아봐야 멀리 있는 녀석의 시선을 끌어 불러오는 정도.
필요 없는 절차였지만 정령이 발가락을 빡! 세우며 힘쓰는 걸 보니 곧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함정이라 해봐야 단순하다.
리빙 아머를 잡을 수 있는 대상들의 수준에 걸맞는 정도.
함정을 밟든 말든 직선으로 복도를 꿰뚫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내 걸음을 보며 앨리스도 다리를 길게 뻗어 똑같은 보폭으로 따라온다.
화살이 날아오면 그냥 잡고 창이 솟거나 바닥이 꺼지는 건 그때그때 대처하며.
시간 끌 것 없이 복도를 돌파한다.
쨍강!
직선으로 공기를 가른 주먹은 갑옷이 들고 있는 검을 수수깡처럼 작살내고 리빙 아머 상반신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흐음···."
현실과 게임을 완전히 대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거의 다 온 것 같다.
주먹을 털어 움직임을 멈춘 쇳덩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앞으로 걷는다.
"저기가 끝인 것 같아요."
앨리스의 말대로 복도의 끝이 보이고.
입구와 달리 여유로운 크기의 문이 반겨준다.
그리고 다른 리빙 아머와 달리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게 두 마리.
'확실히 아무도 안 왔어.'
양손으로 한놈 한놈 투구를 잡아서 종잇장마냥 구겨 구석에 던져두고 문 앞에 섰다.
쾅!
발길질 한 번에 문짝이 바닥을 나뒹굴며 내부가 훤히 보였다.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
"잘 보이지? 이제 위험하니 여기서 보고 있어."
이곳의 보스는 지금 앨리스 수준에서 처리하는 건 무리다.
문밖을 경계로 기다리게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타는 주인의 목소리에 정령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넌 따라오려고?"
-시이.
"뭐··· 위험할 것 같으면 머리 말고 등에 가 있어."
꼬리를 흔들며 긍정의 뜻을 보내오는 정령의 행동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에 들어오기 전 내 손에 죽은 녀석.
그 오크조차도 푸르딩딩한 변종이 존재하듯이 다른 몬스터들도 특별한 개체들이 존재한다.
고블린도 있고 코볼트도 존재하고 그 슬라임조차.
특히 보석이 잔뜩 박힌 왕관을 쓰고 있는 슬라임킹은 게임 광고를 위한 배너에 자주 사용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럼 그것들보다 수준이 높은 리빙 아머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리빙 아머들 사이.
유달리 눈에 띄는 한 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