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2 - 말은 무게를 가진다.
정령은 뛰어난 동체시력과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갖춘 앨리스에게 패턴이 점점 파악되었다.
손가락이 머리에 있는 새싹을 한번 스치고 정말로 잡힐 위기가 오자.
-시익!
머리와 등을 오가는 루트를 버리고 내 가슴팍 사이로 쏙 들어갔다.
"테로?!"
내 가슴팍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정령을 보자 앨리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에게 도망 다니며 정령이 전해오는 의사를 파악한 나는 난감함에 머리를 긁었다.
'장난이었는데 괜히 말했나···.'
정령이 가지는 기준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
주인에게 자진해서 떨어진 정령이 나서서 먼저 부탁하는 독특한 경우였기에.
이런 상황 혹은 이것과 상응하는 약속의 현장에서는 말의 무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났을 당시 내 나름 농담이라 여기며 꺼낸 말이 정령에게는 하나의 각인처럼 박혀버린 듯했다.
나는 '대가'에 대한 언급을 했고, 그에 따른 행동으로 주인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정령은 내게 무언가 보답을 하지 않고는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정령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막연한 느낌.
"앨리스. 이야기 좀 들어볼래?"
"예?"
한창 씩씩거리며 정령과 실랑이를 이어가던 앨리스를 진정시켰다.
"오기 전에 내가 한 말이 있거든."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와 상황을 듣고 소녀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절도 있는 동작이 인상적이다.
"인사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드려야 했는데··· 보상에 대해서는 의뢰금을 분할해 제가 어떻게든 ㅡ."
지금 일어난 해프닝의 해결이 아닌 민감하고 피곤하기 그지없는 돈 이야기.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질에 대한 화두를 꺼내기 시작하려는 소녀의 말허리를 급하게 잘라냈다.
"돈은 됐어. 나도 좋은 걸 봤다고 생각하니 타당한 대가야."
"··· 좋은 거라고 하시면?"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용인화는 제국에서 귀하기도 하고 멋있잖아? 각자 형태도 달라서 특별하지. 이때까지 본 혼혈 용인 중에 제일가는 눈 호강이었어."
실제 이름 있는 용인족들과 몇 번 피를 본 적이 있지만.
순수혈통인 것들은 확실히 강하다.
날 때부터 어금니를 보유한 포식자나 다름없다.
대체로 성격도 호전적이고 겉만 봐도 용'인'이라 칭하기엔 과할 정도로 용의 형상으로 변해있다.
그것들은 그걸 자랑으로 여기지만.
내 눈에는 혼혈이야말로 진짜 용인족이라 생각된다.
"기분 나쁘시지 않으셨나요···? 뿔도 생기고, 팔도 그렇게 흉측하게···."
"전혀?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 이야기보다는 이쪽 방법은 아는 거 없어?"
현 상황에서 중요한 건 내 머리 위에 둥지라도 틀 기세인 이 녀석.
-시시식.
앨리스에게 제대로 좀 해보라는 정령의 의사가 느껴진다.
"···."
정령사답게 앨리스가 정령의 심리를 대강 읽었는지 찌릿하게 노려본다.
그녀의 사나운 눈빛에 도와달라는 듯 뒷발로 다급하게 내 머리를 툭툭 치는 감각.
나는 도마뱀의 등쌀에 밀려 중재에 나섰다.
"보답해야 끝나는 거라면··· 내 일이나 잠시 도와줄래?"
강제로 시답잖은 업무 몇 가지를 만들어 도움을 받으면 해제될 일이 아닐까.
"배, 백금의 의뢰를 제가 어떻게··!"
날카로운 용인의 눈이 풀리고 동그란 눈으로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여기는 모험가 의뢰 때문에 온 게 아니야. 개인적인 일이고 사실 혼자서 가능하긴 한데."
"제가 방해되는 건···."
"흐음~"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와 머리에 안락하게 배를 깔고있는 정령을 느끼며 생각해보았다.
정말 굳이 필요한 걸 억지로 따지고 따지자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말동무 정도?
····
사실 앨리스의 걱정은 다른 쪽에 있었다.
어릴 때 노숙자에게 납치당할 뻔했던 기억과 자신을 가볍게 보는 남자들의 추파.
상상만으로 민폐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자꾸 악몽이나 다름없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성적인 요구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면 백금과 둘이 남은 이 상황은 절망이나 다름없으니.
반항을 해봐도 강간당할 위험이 오면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하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웬걸.
'마, 말동무?!'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하늘이 주신 기회구나!'
목숨을 구해준 것인데 그 정도야.
언변에 자신은 없지만 백금에게 치를 수 있는 대가라 생각하면 거저라고만 생각된다.
오히려 모험가 업무에 대해 배울 점이 있다면 말동무를 하게 해달라고 나서서 매달려야 할 상황이다.
'이건 두 번은 없을 진짜 소중한 경험이다···.'
어떻게든 힘내서 대화를 이어 나가 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앨리스는 로만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나는 주제를 머리에서 끄집어내서 입을 열었다.
시작은 이 숲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였다.
그는 시시하기 짝이 없을 이야기에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 오크가 목적이었고? 내가 뺏은 것처럼 됐네."
"아, 아닙니다! 이긴다 해도 부상은 입었을 거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으면 수녀님도 아마···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갈수록 예상외.
앨리스가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돌아봤을 때.
가장 의외라 생각한 점은 백금이나 되는 무소불위의 남자가 보이는 행동.
손 하나 까딱하면 처리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걸 빌미로 이상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거기에 거친 모험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화의 유려함과 단어 선정.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언사의 부드러움은.
백금이 보유한 무위와는 완전히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는 괴리감은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첫 만남을 상기하게 하여 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니지!'
공포로 잊고 있었지만 그때도 최악은 아니었다.
결국 포션과 격언을 해주며 끝이 났으니.
'생각해보면 그 첫 만남도 마무리는 지어주셨구나···.'
백금이라 하더라도 종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결국 누구나와 같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교단에서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번에도 말했지만, 모험가 사이에 선후배 같은 거 없다니까?"
그러니 어색한 말투는 버려도 된다고 하는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앨리스가 머리에 그려오던 백금의 모험가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유별날 정도로 신기한 사람이었고.
마치 고향인 에델만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동무가 되는데 대단한 주제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편해 소녀의 딱딱했던 어조도 풀려가기 시작했다.
*****
어색하게 억지로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말문이 터지는 순간부터 조금씩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같은 파티원에게 상당히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어리고 이쁜 여자만 보면 헤벌쭉해서는··· 이번에도 그렇지만, 의뢰에 진지하지를 못해서 답답해요. 검은 나쁘지 않게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하하! 남자가 다 그렇지. 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 생각했지."
앨리스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지 으아~! 소리를 내며 닭살을 털어냈다.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친구라 편하긴 하지만, 요즘 의뢰를 할 때마다 싸우는 것 같아요···."
"각자 스타일이 있으니 타협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 나야 솔로로만 지냈으니 모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거든."
"아··! 혼자 다니셨죠."
"어쩌다 보니. 내가 성격이 좀 모나서 다른 사람이랑 못 섞여."
누구에게도 없는 사전 정보가 있었기에 과거 히든 피스를 찾느라 두서없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귀중한 물건을 남들과 분배할 생각이 없다 보니.
어느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 내 욕심에 내가 파묻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기도 했다.
솔로라는 말을 곱씹던 그녀는 말동무라는 역할을 떠올렸는지 상념에서 깨어나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기다 모험가가 같은 파티에서 누군가와 사귀고 연애를 하는 건 독이라고 하잖아요. 애초에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고···."
"잘 알고 있네. 그건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앨리스의 말을 듣자 머리에서 수녀를 부축하고 돌아간 동명이인이 떠올랐다.
'그놈이 가진 감정은 좀 다른 것 같았는데···.'
다리털 수북한 남자의 부정한 감정 따위 역겹기만 하고 전혀 알고 싶지 않지만.
앨리스가 혼자 남겠다고 했을 때.
질투 어린 눈길은 내 여자들과 다니며 하도 받다 보니 이제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욕구와 욕심이 살아가는데 큰 원동력이 되긴 하지.'
나도 여자 쪽으로 한 욕심 하지만 그놈도 여자 욕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혹시 소꿉친구라고 다 잡은 물고기라 생각하는- 그 정도로 미련한 놈은 세상에 없을텐데.
'···있을 수 있나?'
순간 로버트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개연성이 거지같고 한 사람의 신념과 가치관으로는 믿기 힘든 일 투성이니.
"···."
아무튼 이 건에 대해서는 앨리스의 판단이 옳다.
의식주의 해결만이 아니라 생각보다 진지하게 모험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같은 파티에 오늘처럼 교단의 인물이나 누군가를 추가하는 상황이 온다면 연애는 틀림없는 금기.
그 행동은 다른 파티원이 볼 때 은연중에 차별받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암귀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다.
릴리네가 속한 라크의 파티도 그걸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험한 의뢰에 치이다 보면 아무래도 신경이 예민해지는 경우가 많고.
역할 분담에 있어서도 없던 불만이 생길 수 있기에 기본적인 규율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혼성으로 이루어진 파티에 속한 모험가가 같은 파티의 인원과 연애하면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어떤 행동을 해도 불합리하게 해석이 될 여지가 있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생기면 다른 파티원은 그게 감정에서 기인했다고 불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안 돌아갈 꺼야? 이제 도착해서 충분한데."
-시이이.
여기까지 오면서 나눈 대화는 충분히 유익하고 즐거웠다고 여기고 있음에도.
이 녀석은 머리에 딱 붙어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테로를 대신해서 죄송합니다···."
그만해도 된다고 했는데 오면서 몇 번이나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테로의 주인인 앨리스조차 내게서 정령을 떼어내는 걸 포기했다.
구두이지만 무형의 계약이 맺어진 경우.
그녀는 이걸 내가 억지로 해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좋지 않은 경우만 머리에 가득한 얼굴이었다.
"요 녀석도 주인을 생각해서 좋은 뜻으로 엮이게 된 거니 어쩔 수 없나···."
안도와 처지에서 나오는 한숨을 푹 쉰 앨리스는 내가 멈춘 주위를 둘러봤다.
"후- 그런데 여기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이 소녀를 어떻게 돌려보낼까 했지만.
옆에 누군가 이야기를 주절거려 주는 건 집중이 그리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당한 즐거움이 있었다.
'한 번 들리면 그걸로 볼일은 없으니 큰 상관 없겠고.'
비밀로 두고 계속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한 번이면 제일 중요한 아티팩트는 끝.
클로에가 아니었으면 평생 덮어두고 지냈을 장소니 누가 봐도··· 솔직히 상관은 없다.
"그건 이제 찾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