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1 - 정령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다.
숲에 들어섰을 때 한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건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시커먼 기둥이 떨어질 때는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관계도 없는 무관한 곳에 얼굴을 들이밀 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은 클로에를 위한 물건을 찾아야 하기에.
"응?"
-시익!
"뭐야. 왜 여기 있어?"
까맣고 똘망똘망한 귀여운 눈동자.
물기가 느껴지는 매끈한 몸뚱이.
기억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도마뱀 형상의 정령이다.
"주인 이름이···앨리스였나?"
보기 드문 미녀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을 잘 찾아보면 들어있다.
-시이익!
빨빨거리며 다가온 정령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딱히 해를 주려는 느낌도 아니고 촉감도 궁금했기에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 머리 위를 자연스레 차지했다.
정령과 맞닿는 부분에서 촉촉하고 말랑한 느낌이 나지만 내 몸에 수분이 묻지는 않는다.
거기다 정말 신기한 점은.
정령은 어지간해서 정령사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계약에 묶인 정령이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네. 사이가 그 정도로 좋은 건가?'
미미하지만, 도와달라는 감정이 흘러 들어온다.
이게 정령사와 정령의 소통방식이라면 상당히 귀중한 경험.
아마도 저기서 전투를 벌인 인물도 이 정령의 주인인 그 소녀일 가능성이 높다.
검은색 돌기둥을 떨어뜨린 게 당사자라면 제법이지 않은가.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나 비싼 몸인데 정령이 감당되겠어?"
말뜻을 알아듣는지 머리 위에서 당황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 멀지 않은 전투 장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
부스럭-
나오자마자 보이는 전황은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
저기 있는 남자야 저번에 그 녀석일 것이고.
'아! 저 오크?'
저런 놈도 있었지.
기억에서 완전히 잊고 살았던 녀석을 만났다.
이곳의 환경이 문제인지 어디서 이상한 걸 주기적으로 주워 먹는 오크라도 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게임에서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계속해서 리젠되는 몬스터였다.
그리고 눈을 돌리니 흠칫 놀라는 소녀.
건강함이 돋보이는 피부와 어두운 금발도 인상적이지만.
'호오···.'
순혈 용인족이 아닌 혼혈만이 가지는 독특한 형태.
그러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다.
여기저기서 많은 걸 본 나도 처음 보는 스타일.
새로운 무언가를 보는 건 언제나 도움이 된다.
'좋은 걸 봤어.'
마지막으로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를 잡고 울고 있는 교단의 수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은 눈물과 절망, 부정적인 감정으로 엉망이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를 놀란 눈으로 보기에 유심히 보다가 알았다.
"어?"
일면식이 있는 수녀였다.
-그아아아!!!
몸을 옥죄는 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괴성을 지르는 변종 오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팍!
인벤토리에 대충 잡히는 손도끼를 잡아 던지자 오크의 머리가 마른 장작처럼 쩍! 쪼개지며 핏물이 주위를 적셨고.
머리를 잃은 거구가 자기 피로 적셔진 붉은 대지 위에서 춤을 추듯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쿵!
환상 혹은 꿈이나 다름없는 장면.
전장에 묵직한 침묵이 스멀스멀 퍼졌고.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냥 편하게 움직이는 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오크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바닥을 기고 있는 수녀의 어깨에 포션을 부었다.
"수녀님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모험가 일은 후방도 위험하니 안심하면 안 된다고."
"흐윽··· 형제님··."
성녀의 권유로 교단에 입원해있을 당시 안면을 튼 사이.
배식받은 교단 밥을 거르고 내 여자들이 오기를 기다릴 때.
몇 번 이야기를 하며 빵이나 간식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다.
"이걸로 그때 먹은 빵값은 한 겁니다?"
치료하는데 여유 있도록 포션과 성수를 한 병씩 더 건네주자.
그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내 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감사하다며 눈물 콧물을 찔찔 흘리며 자신에게 성법술을 사용하느라 바빴다.
중상이라 완전히 치료는 못해도 죽을 고비는 넘길 것이다.
'참···.'
원래라면 절대 돕지 않았을 거다.
모험가는 그런 직종이고 얼마 전까지 나는 그런 인간이었으니.
하지만 저 어린 수녀를 보는 순간 몇몇 얼굴이 스치지 않았다면 거짓이라.
그럼에도 당장 필요하다면.
여기서 칼을 뽑아 망설임 없이 휘두를 수 있다는 마음이 한편에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하자는 마음만은 내 여자들이 붙잡아 줘 심장의 중심에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다면. 오늘 같은 행운을 기대하시면 안 될 겁니다."
"히윽··!"
모험가 일도 병행하고 있는데 후방이라 다친 적이 없다며 자신 있게 말하더니.
'방심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공포로 물든 얼굴을 보니 이 이후로는 다시 모험가 일을 이어가지 않을 느낌이다.
저 어린 수녀에게 선택은 지금 시점이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경계에 한 번 서봤을 때.
심장은 이 길을 계속 걸을지 물어오기에.
거기서 모험가를 이어가는 인간은 정말 죽을 때까지 모험가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지금 같이 공포에 질려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넌 왜 아직 여기 있어?"
-쉬익.
요청에 따라 사건을 해결했음에도 정령은 여전히 내 머리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녀석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였나?"
"네, 네!"
자세를 낮추고 굳어있던 소녀가 표정에 긴장을 유지한 채 허리를 폈다.
"얘 좀 데려가."
정령이라 지칭하지도 않았고 머리를 굳이 가리키지 않았지만.
앨리스의 날카로운 동공은 어울리지 않는 난감함을 담아 내 머리 위를 향하고 있었다.
조심스러움을 한껏 담아 슬금슬금 내 쪽으로 그녀가 다가오자.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구부려 정령이 이동하기 쉽도록 몸을 낮췄다.
"죄송합니다! 저희 테로가···!"
"됐어. 한번 느껴보고 싶었거든."
"후-."
그녀는 내 말에 안심한 듯 긴 숨을 내뱉고 조금은 편해진 걸음으로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멋있네. 마법도 잘 봤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녀의 동공이 부릅! 떠졌다.
"···가, 감사합니다!"
분명 모험가 사이에 선후배 같은 게 없다고 말했는데 그녀에게는 군기 비슷한 것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뿔이 스멀스멀 자리를 찾아 사라지고 용인족의 형태를 하고 있던 팔도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원래 용인족도 아닌데 원하는 순간에 변할 수 있다니.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만한 멋이 있다.
"잘 가라."
정령과 작별을 고하고 고개를 살짝 숙여준다.
-쉬익!!
머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주인이 손을 뻗자 내 등을 타고 쪼르륵 도망간다.
"테로! 뭐 하는 거야!"
정령의 행동에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
내 등으로 도망간 정령을 잡으려고 앨리스가 돌아가자 도마뱀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다시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시이.
"장난칠 때 아니라니까! 진짜 화낸다?"
키 차이가 워낙 심하니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이 유독 애처롭게 느껴졌다.
'내가 잡아도 되나?'
정령이 마음대로 내 몸을 타고 오르긴 했지만.
함부로 타인의 정령을 만지는 건 하면 안 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아 나도 대응하기가 난감했다.
게임에서는 지원하지도 않는 세세한 부분이라 확신도 없다.
얼굴이 퉁퉁 부은 수녀와 저기서 은근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남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못 하고 있다.
정령이 안 보이는 자들에게는 앨리스가 혼잣말하며 난리를 치는 이상한 쇼나 다름없으니.
도마뱀 형상을 한 정령과 정령사의 실랑이가 길어지던 도중.
포션을 먹고 통증에 앓는 소리를 삼키며 기다리던 수녀의 침음을 들은 앨리스가 파티원에게 다가갔다.
"로··! 아니··· 아무튼 수녀님은 제대로 치료받아야 하니까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 거기 교단에서 봐."
그녀의 말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앨리스! 다 같이 가야지!"
"금방 갈 테니 먼저 돌아가."
"그래도 뭘 믿고 남자랑 둘이··· 위험하게···."
최대한 작게 속닥거렸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남자를 죽일까 살릴까 고민이 되는 순간에 앨리스가 파티원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야··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할 판에, 지금 그딴 농담할 때야?"
앨리스의 살벌한 목소리- 옆에 있던 수녀까지 몸이 굳었다.
"···."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다 죽었겠지. 내 말은 벌인 일이 있으면 도의적인 책임은 지라는 거야. 시간이 남으면 모험가 길드에 개체 수까지 보고해."
자기보다 큰 남자를 쥐고 흔드는 행동에서 모험가가 천직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정황상 찔리는 게 있는지.
남자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아직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수녀에게 향했다.
'화끈한데.'
에클레어는 화를 펑펑 터트린다는 걸 아예 모르기에 싸늘하고 차분한 느낌으로 분노가 흘러나오지만.
앨리스라는 소녀의 감정은 아주 확실하게 표출되어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였다.
둘을 돌려보낸 앨리스는 내게 후다닥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테로는 얼른 회수하겠습니다!"
"숙여줘? 아니지. 내가 잡아도 되는 거야?"
"아 그게···정말 죄송하지만 ㅡ."
악의를 가진 공격도 아니고, 정령은 이런 식으로 '호의'를 가진 상대의 손을 타면 안 된다고 한다.
정령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이유.
자신도 애초에 이런 경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한다.
계약자와 유대, 결속에 끼치는 진위에 대해 확실히는 모르지만.
정령사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라고 한다.
본인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고.
'난감한데.'
정령사라는 게 이리 불편하고 구닥다리다.
괜히 엘프들이 수백년을 들여 올려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이게 진짜 정령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도 문제였고.
자기들이 독보적이고 선택받은 것이라 광고를 위한 말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다른 문제였다.
게임에서는 없던 사항이라 구분이 가지 않았다.
"테로··· 자꾸 이러면 화단에서 노는 것도 금지시킨다?"
-샤아악!!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정령의 발악이 내게도 느껴진다.
소녀와 정령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