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0 - 정령은 머리 위에 두는 게 보기 좋다.
에클레어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레 드러냈다.
클로에와 포옹이 끝나고 자매는 손을 잡고 내게 다가왔다.
리케는 내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허리에 매달려 드리트나 자매를 지켜봤다.
"로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이가 없고 웃기지만··· 고맙다."
"소중히 할게."
클로에만 지목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팔을 벌리니 여자 셋이 도란도란 모여 안겨 온다.
자세가 우스꽝스러워도 표정은 셋 다 만족스럽고 포근해 보였다.
"···불편해도 나쁘지는 않군."
"클로에 가슴 숨막혀··."
리케가 클로에의 옆가슴에 묻혀있다가 고개를 겨우 돌렸다.
"죄, 죄송해요··!"
한 품에 안으니 거대한 꽃다발을 안고 있는 기분.
세상에 이 이상 없을 사치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대로 식당까지 갈까."
그대로 세 명을 딱 붙여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어 올렸다.
힘을 주는 기합이 들어가지 않아도 가볍게 쑥 들린다.
"으와··!"
"누가 볼까 겁나는 행색이군···."
"뭐 어때요. 이런 건 그냥 즐겨야죠."
에클레어는 부끄러운지 한탄하지만 리케는 내 품으로 더 강하게 파고든다.
"무겁지는 않으세요··?"
"전혀? 깃털이네."
주는 행복함에 비해 내 여자들은 가볍기만 하다.
음식을 준비한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향하며.
내 품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여자들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오늘 리케랑 클로에가 힘을 냈거든. 특히 클로에가 언니 걱정된다고 ㅡ 읍!"
클로에가 황급하게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읏···! 오, 오라버니!"
에클레어를 힐끗 보았다가 터질 듯이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내 품에 숨긴다.
이때까지 해온 일에 비하면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는 핀트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건 기대가 되는구나."
에클레어가 보이는 즐거운 표정은 저택이 비었다며 서재를 찾아왔던 클로에와 다를 게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에클레어는 흐뭇한 표정을, 클로에는 간지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클레어와 클로에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었던 식사가 끝나고.
다 같이 붙어 앉아 차를 마시며 주제를 바꿔 이야기를 시작했다.
"놀러 와도 지내기 편하게 집도 큰 걸로 하나 장만할까 싶은데. 지금 집은 그대로 두고."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고 이런저런 추억이 있는데 처분하기엔 아깝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난 오빠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
리케가 제일 먼저 차를 비우고 내 허벅지의 한 곳을 차지했다.
에클레어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고 클로에는 리케가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을 적응하기엔 길이 멀어 보인다.
"음. 확실히 리케가 아카데미에 다니기 애매한 위치라 생각했다."
"길드에 말하면 이런 건 목록을 쭉 뽑아와 주니깐. 문제가 있으면 따지기도 좋아."
"백금을 수도에 잡아두려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지."
리케가 입에 넣어주는 쿠키를 받아먹으며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뱉었다.
"이참에 침대도 엄청나게 큰 거로 살까?"
"오빠하고 싶은 대로 하자. 네 명이 누우려면 큰 게 필요하긴 하겠다."
리케와 쿵짝거리며 장단을 맞추자, 드리트나 자매가 동작을 멈췄다.
"···네 명이 눕는다고?"
"흐으···!"
자매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언니는 오빠랑 따로 주무시려고요? 클로에도? 필요하시면 다른 방에 다른 침대로 준비해드릴게요."
맨정신일 때 직접적으로 '그것'을 언급하지 못하는 둘의 성격.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리케가 주도권을 잡고 드리트나 자매를 흔들었다.
""···.""
··
··
그리고 제일 중요한 클로에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유를 설명해도 클로에는 괜찮다고 펄떡거렸지만.
에클레어는 굳은 표정으로 정말 부탁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평소라면 덩달아 괜찮다고 말려왔을 에클레어가 이렇게 행동을 보이는 건.
그만큼 그날의 사건이 흉터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구색이 잡히니 이제는 정말 사소한 내용이 나왔다.
"그냥 솔직하게 ㅡ."
세리아를 기절시킬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토의하고 있는 리케와 클로에를 두고 에클레어와 잠시 마당에 나와 밤바람을 맞았다.
둘이 되니 에클레어는 슬그머니 팔짱을 끼며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로만."
"응?"
"항상 받기만 하는 입장에서 이런 걸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만···."
"편하게 말해."
에클레어는 마당에 굴러다니는 돌을 툭 차서 날리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붉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물건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지··? 혹시 위험한 일인가?"
"전혀. 위험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
뽀얗기 그지없는 에클레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져주니 치켜 올라갔던 눈매가 조금씩 내려간다.
"···위험하지 않으면 됐다만."
"이런 물건들이야 내가 기록해둔 게 있거든. 여성용 무기는 내가 쓸만한 게 아니라 기록만 해둔 거야."
실제로 사실이긴 하나.
누가 들어도 제대로 납득이 가지 않는 두루뭉술한 대답에 에클레어는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다치지만 마라···."
"그러려면 힘이 나게 해줘야지. 보수는?"
내 반응에 그녀는 피식 웃고는 클로에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곳까지 나를 끌고 갔다.
"클로에의 일만이 아니라 언제나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목덜미를 만질 때부터 기대감에 젖어있던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고 발뒤꿈치를 들어 입을 맞춰왔다.
*****
쿵! 쿵! 쿵!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변종 오크.
흔히 오크의 피부는 초록색이거나 붉은색이다.
하지만 저 변종의 피부색은 푸르딩딩한 반점이 오른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고 덩치도 거의 두배에 육박한다.
흔히 오크라는 생물은 일정 개체를 제외하고는 은 등급만 되어도 충분히 상대하고 남는 개체지만 이놈은 달랐다.
특유의 무리 생활을 하지않고 식성도 괴이하다.
인간은 물론이요, 다른 몬스터에 동족까지 포식한다.
주제에 머리도 흔한 오크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저 덩치로 숲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다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녹슨 검을 내던졌다.
그것에 맞은 수녀가 어깨 한쪽이 너덜너덜해져 나뒹굴었고.
반사적으로 투척을 피해 상처없이 생명 줄이 붙어 있는 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빠각!
작은 체구라고는 믿기 힘든 괴력.
오크가 내던진 녹슨 쇳덩이를 발로 후려차 날린 소녀가 파티원에게 통보했다.
"10초!"
"젠장···! 무리라고!"
앨리스의 말에 로만이 울상을 지으며 칼에 푸른색 오러를 끌어올렸다.
"죽기 싫으면 닥치고 버텨!"
뜨드득- 뿌득-
급하게 끌어올린 마나가 요동치며 소녀에게 뿔이 돋아나고.
눈 밑에 단단한 비늘 몇 조각이 올라와 자리하였다.
한 쪽 팔은 용인족의 '그것'으로 형태가 완전히 변해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동공이 가느다란 형태를 보이며 용인이 가진 특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자.
-구어어어!!!
침을 질질 흘리며 직진으로 돌격해오는 오크 조차 위협을 느끼고 괴성을 지른다.
"으아아! 개자식아!!"
스각!
로만이 오러를 사용하여 따가운 자상을 픽 남겨 오크의 시선을 끌고는 다급하게 발을 움직인다.
이리저리 땅을 박차며 가로지르니 거슬리는 벌레를 쫓으려는 듯 로만을 향해 오러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검과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은혜로운 대지여. 하늘을 빌려 석문을 열어라. 적에게 무거운 짐을 내리고 견디지 못할 과중함을 짊어지게 하라.
튼튼한 몸뚱이를 믿고 마구잡이로 끌어올린 마나에 속이 울렁거렸다.
주문을 외우며 앨리스는 눈을 힐끔 움직여 수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의뢰를 위해 동행했던 교단의 어린 수녀 하나가 여신의 곁으로 떠나기 직전.
'망할··!'
이래서 은등급이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금등급으로 찾자고 했는데.
로만을 구타해서라도 뜯어 말렸다면 저 소녀가 다치지 않았을까.
자의로 동행했다고 하지만 가슴이 콕콕 쑤셔온다.
자신이 더 강하게 말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험가들 사이에 이런 일은 흔하지만 책임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느낌.
소녀 하나가 피어나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을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테로."
그녀의 머리 위에 자리한 정령에게 생각이 그대로 전해진다.
정령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일지라도.
결국 크든 작든 쓰기 나름.
-시이익!
정령이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위협하듯 바짝 세우니.
로만을 밀어내고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몬스터의 발 아래 땅이 움푹 파이며 중심이 살짝 무너진다.
-그륵··!
"뒤져!"
쾅!
앨리스가 비늘로 덮인 주먹을 들어 땅을 내려치자 오크의 머리 위에 그늘이 졌다.
-흑석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육각형의 돌기둥.
어두운 색만큼이나 압도적인 질량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마법이다.
두르고 있는 마나도 없으며 제대로 겨냥하는 것도 고난이도.
낙하하는 속도도 조절하지 못하는 단점이 가득한 마법이지만.
적중만 한다면 부족함 없는 힘을 보장한다.
콰아아앙!!!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돌기둥이 박혀 들었다.
먼지가 폴폴 날리고 가라앉자.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머리가 박살 난 오크가 눈에 들어온다.
로만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옆에 드러누워 헉헉거리고 있다.
"하아아-."
도박수에 가까운 공격은 다행히 대성공.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지만, 앨리스는 정신을 잡고 끙끙거리며 울고 있는 수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수녀가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도 뒤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뒤, 뒤에요··!"
"···!!"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이쪽을 보며 다가오고 있는 변종 오크가 하나 더 있었다.
'분명 한 놈이라 했는데···?'
억울함을 토로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탄하느라 정신을 놓는 순간 접근하고 남을 것이니 쉴 틈은 없다.
"로만! 일어나!"
목소리에 반응한 건 누워서 쉬고 있던 로만뿐만이 아니라 멀리 있던 오크도 마찬가지.
앨리스의 목소리를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멀리서 자리를 지키던 오크가 땅을 울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익!
"테로··?!"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
앨리스의 머리에서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테로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어, 어디가!"
정령은 계약을 한 계약자에게서 도망가지 않는다.
속박이 있어 계약자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게 가능했다면 첩자가 되었겠지.
첩자가 되어도 정령의 장난기에 믿을만한 정보가 있으려나 모르지만.
"···치잇!"
테로의 장난과 변덕이 이정도인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처음있는 상황에 앨리스는 크게 당황했지만 정신을 놓고있을 때가 아니다.
동족이 당하는 걸 보고 있었다면 흑석주 같은 도박수는 좋지 않다.
다른 마법을 위해 마나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
앨리스의 고개가 멍하니 돌아가고.
침을 흘리며 미친듯이 뛰어오던 몬스터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건 로만과 수녀 뿐.
"애, 앨리스님?"
"쉿."
수녀를 조용히 시키고 앨리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한 곳을 주시했다.
먹고 먹히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생물들이라면 느낄 수 있는 위협.
특히 먹이사슬에 얽혀있는 몬스터들은 이것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진짜 포식자가 등장하면 치고박던 원수지간도 드잡이를 멈추고 시선을 돌리게 되는 법.
앞의 변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살기의 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가 자연스레 낮아졌다.
호흡을 멈추고 눈도 껌뻑이지 않은 상태로 몇 초.
부스럭-
"어?"
테로를 머리에 올린 한 남자가 숲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