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3 - 클로에는 허락을 받고 싶어.
"이렇게 가련하면서도 고고하게 아름답고··· 봉오리에서 피어나고 싶은데 과거의 나처럼 땅을 찾지 못했구나."
손을 뻗은 리케가 클로에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리케?"
"정말 똑같네."
그녀는 언니와 내가 너무나도 판박이라서 귀엽다며 키득키득 웃었다.
자매가 이 정도로 닮으면 남자 취향이 같은 것도 필연이자 운명일 것이라고.
"흐우우···."
클로에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사과처럼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비단 언니만의 것이 아니야.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둘 다 힘들 거야."
"···."
무거운 이야기지만 리케의 상냥한 손길에 의해 분위기는 무거워지지 않았다.
"그 답···올곧은 언니라면, 자매면서 눈치를 못 채고 있던 본인을 먼저 용서하지 않겠지?"
분명 답답하다고 하려 했던 것 같은데···.
클로에의 눈가가 순간 꿈틀거렸지만 따라오는 뒷말에 머릿속이 엉키고 복잡해졌다.
"···."
"거기에 마지막까지 가서는 자신에게 그런 사실을 숨겼다는 걸 슬퍼할지도 몰라."
한참을 생각하던 클로에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도저히 지금 표정을 밖으로 보일 수 없었다.
"언니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싫어요···!"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간절한 목소리에 리케는 클로에의 등허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연인이 해주는 이 손길은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 강했기에.
"겁먹을 필요 없어. 만약 반대 입장에 언니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면 클로에는 어떻게 했겠어?"
"읏··!"
리케의 말에 관통당한 클로에의 머리가 방향을 정해서 굴러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민하고 고심하는 소녀의 옆에 앉아서 리케는 자리를 지켰다.
보라색 시선을 들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구경하다가.
바람에 저항하지 못하고 나뒹구는 나뭇잎도 여유롭게 눈에 담았고.
하얗고 뚱뚱한 고양이가 여생도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가는 것도 보았다.
스윽-
"아··."
한참이 지나 생각이 끝난 클로에의 고개가 손바닥에서 벗어나 햇볕을 마주했다.
··
··
-언니. 오늘 저녁 먹고 서재로 가도 괜찮아?
에클레어는 서재에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클로에를 기다렸다.
도저히 몸이고 정신이고 진정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보면 휘영청 떠 있는 달이 눈에 담겼지만.
머리에 드는 오만가지 생각 때문에 느긋한 감상으로 아름답다고 언급할 틈도 없었다.
"후···."
클로에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사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듣기만 해도,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게 끔찍한 날이었다.
자신이 없었기에 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겠지만.
혹여 클로에의 옆에 로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지나간 불길함은 가정만으로 정신이 매스껍고 울렁거렸다.
동생에게 올 뻔했던 위기를 로만에게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사고를 치고 5기사라는 직책을 내려놓을 각오가 단번에 들었다.
당장 검을 들고 교단에 쳐들어가 말로이 백작가의 장남을 붙잡아 이야기를 들어볼까 했으나.
정보 길드와 음지의 이곳저곳에 발을 걸치고 있는 로만은 자신의 옆을 지켜주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은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대처법을 제안했다.
'정말 밑바닥부터 시작했으니 가능한 것들이겠지···.'
로만은 지금까지 쌓아둔 인맥으로 조사를 하여 정보의 교차검증까지 확실히 끝내고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필립인가 뭔가 하는 남자를 잡아 처리한 뒤.
꼬리의 끝을 잡은 채 머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머리가 확정되자 말로이 백작의 영지까지 게이트도 쓰지 않고 단신으로 뛰었다.
백작이라는 거물을 로만이 직접 죽음보다 더 한 반죽음으로 만들었지만.
에클레어는 혹여 이 행태가 누군가에게 걸리든 말든 뒷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순히 클로에를 노리는 위기가 사라졌다, 그렇기에 속이 후련하다.
그것 이외에 감상은 없었다.
자신에게 '기사'라는 직책이 중요하다 해도 클로에를 위해서라면.
당장에 버릴 수 있는 방패이자 장식에 불과하다고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건 영지에서 클로에와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부터 한 다짐이었으며.
검을 잡은 순간에도 그 우선순위는 변함 없이 이어져 왔고.
동생을 두고 홀로 전장을 떠돌 때도 틀림없이 그랬다.
그렇기에 로만이 자신을 보고 기사로서 대단하다 할 때마다 당당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로만과 리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가···.'
소중한 것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약점이 되어 삶은 고단하고 힘들어진다고 누군가 그랬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
'그 말은 전혀 공감할 수 없군.'
힐끔 보기만 해도 상황은 알기 쉬울 정도로 반대였으니.
서로가 맞물려서는 되려 자신이 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음직했다.
하여튼, 현 상황을 보자면.
최근 미쳐 날뛰는 업무 강도는 그녀의 자충수라 해야 할까.
말로이 백작의 일까지 추가로 언급되어 황제파 귀족들의 안전을 재정비하느라 바빠졌지만.
동생이 그런 상태니 미친 듯이 업무를 하는 와중에도 클로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혼자 마음에 감정을 쌓아두고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는 게 에클레어의 속을 더 쓰라리게 했다.
그렇다고 로만을 억지로 밀어줄 수도 없고.
자신은 다가가서 어설픈 감정을 완전히 버리고 상황을 이어 줄 말솜씨도 없다.
하여 제일 적합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진 리케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래.
분명 하긴 했는데···.
이건 너무 빨라서 당황스러웠다.
바로 다음 날.
아카데미를 다녀온 그사이.
클로에의 정신과 마음에 어떤 결착이 나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리케는 대체 뭘 한 건지···.'
에클레어의 조바심을 담은 손가락이 책상을 때리며 분주하게 박자를 만들고 있으니 클로에가 서재로 찾아왔다.
똑- 똑-
-클로에 드리트나 입니다.
"들어오거라."
끼이익-
서재의 문이 조심히 열리고 곧바로 잘 수 있는 편안한 옷에 외투를 걸친 클로에가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언니도 일 때문에 피곤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편히 앉거라."
관계가 회복되고 클로에가 찾아오게 되면서 생긴 의자.
그것을 자연스레 당겨 앉은 클로에는 자신을 빤히 보며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활력과 생기를 찾은 눈동자에 안심이 되었지만.
동생이 무슨 말을 꺼낼지 에클레어의 안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증거로 평소와 같이 일어서서 홍차를 준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자매가 시선만 교환하고 있으니 클로에는 어딘가 해탈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언니도 알고 있었지?"
"무엇을···?"
"내가 오라버니를 사모하는걸."
평소처럼 늘어지지 않고 똑 부러지는 어조로 물어오는 클로에의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음···."
"미안해. 언니···."
클로에는 사과를 하는 동시에 손을 뻗어 에클레어의 손등을 덮었다.
덜덜 떨리는 클로에의 손은 허무하고 덤덤함을 가장한 표정과 속마음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위로나 허세 같은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 클로에가 미안할 필요는 없다."
"으으··."
클로에가 그리고 있던 싱거운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고.
숨김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생을 보고 안심한 에클레어는 일단 한 손에 손수건을 장전했다.
"모범이 되어야 하는 나조차도 시작은 글러 먹고 떳떳하지 못했으니··· 뻔뻔하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
손등을 뒤집어 클로에와 손깍지를 낀 에클레어는 의자를 당겨 서로의 무릎이 닿을 만큼 거리를 좁혔다.
"언니···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 더 사과하고 싶어."
클로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전에 눈가를 한번 정리했다.
"그래? 속 시원하게 말해봐라."
"나 그날 우연히 서재에 왔다가 봤어."
급속도로 얼굴이 붉어지는 동생을 본 에클레어는 묘한 불안감에 잠식되었다.
"···서재?"
"언니가 오라버니랑 ㅡ"
듣는 순간 정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간단한 애정행각도 클로에의 앞에서 보이면 부끄러울 것 같은데.
준비운동도, 차근차근 올라가는 계단도,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최고점에 도달한 부끄러움은 에클레어의 정신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아··! 윽! 어, 어어··?!"
"리케 말대로 언니는 내가 봐도 진짜 귀엽네. 내가 정말 언니와 닮았을까?"
말을 더듬으며 고장 난 에클레어를 보며 클로에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웃었다.
"···."
웃음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뱉은 클로에는 달이 떠 있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고.
그대로 누군가를 생각하며 홍조를 지우지 않은 채 미소를 그렸다.
클로에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땐 죄책감뿐이었는데··· 이제는 부러운 게 더 커."
클로에의 기세가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에클레어를 덮친다.
당돌하게 푸른 눈동자를 빛내는 클로에의 말.
에클레어는 제대로 이해도 못 한 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가?"
얼이 빠진 에클레어는 뭐라 제대로 답을 내지 못했지만 클로에는 멈추지 않고 속에 있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늘 저택에 돌아왔을 때의 결연한 눈빛을 한 클로에가 에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했다.
"리케한테도 이야기 해서 허락을 받았지만, 언니의 허락을 받고 싶어."
"내 허락을?"
충격에서 조금은 진정하게 된 에클레어는 무슨 일인지 들어보자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나 오라버니랑 수도 밖에 가보고 싶은 도시가 있는데··· 오라버니한테 같이 가달라고 말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