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2 - 리케는 그렇게 말했다.
검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추레한 남자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쩌적-
오러를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는 검을 바닥에 내던지자.
째앵!
머금고 있던 오러에 칼날이 박살 나며, 내던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흩뿌려졌다.
그 소음과 동시에 제일 오래 얼어있던 한 남자가 정신을 차렸고.
바깥에서 눈가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아이작을 일으킨 필립이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필립은 아이작을 부축하면서도.
내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졌는지 끝도 없이 확인하며 허겁지겁 발을 움직였다.
"""···."""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자가 많은 이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이 만든 침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분위기에서 자유롭고 주도적인 건 나 하나.
경비대의 제일 앞에 서서 멍하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년은 일면식이 있었다.
그에게 성큼성큼 향하자 상대도 나를 바로 알아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헙···! 모험가님!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도의 경비대 여러분이 이리 빨리 찾아와주셔서 감탄했습니다."
굳이 이런 어법을 택한 이유는 있지만, 돌려 까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태는 끝났다 해도 시간으로 봤을 때 빠르면 빨랐지 늦지는 않았다.
듬직한 어깨를 두들기며 진심으로 칭찬했음에도 그는 알기 쉽게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엎어져서 길을 막고 있는 시체를 발로 차서 구석으로 밀어냈다.
"어디 촌구석에서 온 왈패들이 지고하신 제국의 지배자가 계신 수도에서 깽판을 부리고 약자들을 핍박하길래 제가 좀 나섰습니다."
경비대원은 한칼에 목이 날아가서 뒹굴고 있는 시체를 다시 확인했다.
꿈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그는 로만의 뒤에 있는 검은 갑옷을 슬쩍 봤다가.
피 칠갑을 한 모습에 화들짝 놀라 눈을 빠르게 돌려 로만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금의 모험가님이 이리 수도의 치안까지 신경 쓰고 지켜주시니 저희 경비대가 가슴펴고 봉급을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역시 얼굴을 터놓은 사람을 만나면 긴말할 필요가 없는 게 최고로 편하다.
"조사해서 문제가 있다면 모험가 길드로 연락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온전히 제가 한 일이니, 과한 손속으로 가게에 보상이 필요하다 하면 길드에 연락해주십시오."
"그럴 일은 필시 없겠지만··· 알겠습니다."
소문에 민감하고 서로 물어뜯을 타이밍만 보는 상권.
그곳에서 앞으로도 장사를 하려면 그런 철면피 행동을 할 일은 극히 드물기에 이건 뒷말을 위한 시동에 불과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그 부분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노렸을지도 모르지만, 제국에 해가 될 만한 의도를 가지고 침입해 왔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범한 모험가라면 말도 안 되는 월권이지만.
앞에 책임을 언급한 내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귀찮은 일 처리도 대신 해줬으니 이 짬 높은 경비대원 정도의 눈치가 있다면.
윗선에 보고 후 적당한 이유를 달아 모험가 길드로 서류를 보내 줄 것이다.
'그래봐야 딱히 새롭게 알만한 사실도 없겠지. 필립···필립이라···?'
심증이 너무 확실하게 박혀버려서 의미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나.
자신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이작의 근처에 존재하는 '필립'이라는 줄기만 잡으면 된다.
그 뿌리의 끝을 찾아내 도려내면 끝이다.
····
일을 가볍게 마무리하고 둘은 소란스러운 정문이 아니라 뒷문을 통해서 나왔다.
"클로에. 괜찮아?"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으로 지쳐 보이는 그녀의 옆을 걸으며 로만이 물었다.
"···."
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살면서 '기사'에 가까운 일을 한 건 처음이었다.
착실히 살아가는 가게 점원들을 핍박하고 운영에 훼방을 놓는 도적을 해치웠다.
가게의 점원들에게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축적한 지식과 훈련으로 저지른 살인이 후회나 두려움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니다.
'···.'
단순히.
소중한 시간을 망친 적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 감정이 너무나도 시커멓고 질척해서 발걸음이 무거웠기에.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은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어둠이 드리운 길을 둘이 걸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생각만 해도 설레야만 하는 상황임에도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으읏···흑··! 흐으으··."
기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중간부터 허망하게 날린 시간과 기회가 상기 된다.
클로에는 바로 옆에 로만이 있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고 서럽게 울었다.
이제 자신이 마음 속으로 정해둔- 선을 그어서 넘지 않고 만날 기회는 그때 미뤄진 약속 단 한 번.
매번 오라버니와 만날 때마다 불길한 사건들에 휘말리니, 마치 자신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습관적으로 소매를 이용해 흐르는 눈물을 훔치려 하자.
오라버니가 손을 잡아서 막더니 부드러운 감촉의 손수건으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줬다.
"울지 마. 나쁜 건 다 그놈들인데 왜 울어. 응?"
상냥하게 다독이는 목소리를 듣자, 눈에서는 눈물이 더 쏟아졌다.
주체 못 할 만큼 울음소리가 커졌고.
그녀의 서러움을 막기 위해 로만이 클로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셔츠에 그녀의 얼굴을 묻게 했다.
"마음껏 울고 털어내."
몸을 꽉 붙이는 포옹은 아니었다.
고개만 셔츠에 살짝 파묻는 우스운 형태의 가벼운 접촉이었으나.
클로에는 로만의 옷이 축축해질때 까지 엉엉 울다가 겨우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
활자로 적기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플로이드 가주가 끝도 없이 길어지고 연관 된 귀족까지 털어버리는 조사에 견디지 못 하고 교단의 인원, 제국 공무원들과 큰 갈등을 빚었다든지.
모 백작가의 장남이 불의의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는 소문이나.
얼마 뒤 마치 운명처럼.
그의 부친인 말로이 백작가의 가주가 야밤에 저택을 들이닥친 누군가에게 습격당했다고 한다.
밤손님은 온몸을 검은 로브로 가린 누군가였으며.
초장에 마주침과 동시에 시야를 잃은 가주는 무엇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습격에 마나를 이용한 차음까지 완벽한 범행.
결과적으로 범행을 일으킨 대상은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누구의 의뢰를 받고, 어찌 삼엄한 경계를 유령처럼 뚫고 왔는지 모른다.
솔직한 상황으로 말로이 백작을 노릴만한 경쟁 상대는 세 자리가 가뿐히 넘어갈 테니.
실제로.
병상에 누운 백작이 의뢰를 사주한 자라 의심되는 인물이라며 짚은 사람만 열을 가뿐히 넘었다.
황실도 게이트 사업의 일등 공신인 말로이 백작을 위해 조사관을 대거 파견하였으나.
습격 대상이 얼마나 철저한지 전문가들이 모두 달려들었으나 이렇다 할 증거 하나 찾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자비로 백작이 수도에 옮겨져 성녀를 마주했으나.
성녀도 보자마자 이건 치료할 수 없다 단언 할 정도로 상처가 지독하고 악랄하였다.
이만큼 해줬는데 해결이 안 되니 더는 해줄 게 없는 황실도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그렇게 말로이 백작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양팔과 양쪽 눈,다리 힘줄까지 불로 지져져 사지의 자유를 완전히 잃었다는 이야기가 제국을 시끄럽게 하였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이건 어떤 면에서 죽음 보다 더 한 고통이었다.
돈이 썩어나지만 보이지 않고 마법적인 지식이 머리에 가득하지만 팔이 없으니 증명하려면 입으로 해야 한다.
한순간에 명문 마법사 가문의 가세는 기울었다.
앞으로 그 많은 재물과 백작 가문의 주인 자리에 누가 앉을지에 대한 토론이 불길처럼 일었고.
결국 그 이야기도 관심 있는 자에 한에서 시끄러운 주제였다.
제국 사회에 떠도는 소문에 큰 관심이 없는 클로에.
그녀 또한 변했다.
로만이 긍정해준 단 한번으로.
우습게도 클로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개인에게 받고 있음에도.
클로에는 선을 넘지 않겠다는 결심을 어기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을 갉아먹어도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았고.
하루하루 초췌해지는 그녀를 봐도 누가 어찌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매 중 언니가 친동생에게 연인을 떠밀어줄 것인가?
아니면 언니의 연인인 남자가 동생에게 먼저 들이댈 것인가?
제국에 있는 도의적인 선에서 보자면, 그나마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
걱정이 태산인 에클레어와 대화한 끝에 리케는 클로에와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
위로를 위해 받은 포옹.
이 기억 하나면 죽기 직전까지 겨울도 따뜻할 것 같다.
오늘도 창밖을 보며 멍하니 정신을 어딘가로 보내고 있는 클로에의 볼을 누군가가 찔렀다.
"클로에."
"어···리케?"
점심시간이 아닌데 리케가 기사 학부의 강의실로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세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나가서 이야기나 할까?"
"아··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고 남은 시간도 여유로웠기에 리케의 옆을 걸으며 한적한 장소로 향했다.
"우리 질질 끌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일단 말해두는데 클로에한테 화내러 온 거 아니다?"
주위에 누구도 없는 벤치에 앉아 리케는 숨김없이 본론을 시원하게 꺼냈고.
"···!"
자신의 마음을 들킨 클로에는 부정하지 않고 리케에게 고개를 숙였다.
"리케에게도 언니에게도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그러니 약속할게요! 절대 이 이상은 무엇도 할 생각이 없어요! 제, 제멋대로 감정을 가져서··· 죄송해요···."
클로에의 정신력은 리케의 상정을 넘어선 쇠고집이었다.
상사병이 주는 정신적 고통을 정말로 견뎌낼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마음은 한계를 모른 채 점점 커지는데 정말 옴짝달싹하지 않는 점을 본 리케는 클로에의 인내심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클로에. 그런 감정이 본인의 의사로 조절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언니도 잘 알고 있어."
'언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클로에는 아연실색하며 손을 덜덜 떨었다.
거기다 그런 말은 클로에의 머리에서 변명이라고 이미 단정 지어진지 오래다.
"아, 안 돼요! 절대··! 언니가 알면··· 무조건 숨겨야 해요! 부탁드릴게요··!"
"알면 어떻게 되는데?"
리케의 상냥한 목소리에 클로에의 입이 아교 칠을 한 듯 착 달라붙었다.
"···."
"에클레어 언니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아? 아니면 화라도 낼 것 같아?"
클로에는 고개를 휙휙 저어서 부정했다.
오히려 화내지 않을 걸 알기에 말하지 못한다.
"화를 내지 않는 언니가 너무 슬프잖아요··· 힘든 시간을 보내다 이제야 행복해 보였는데···."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리케의 모습은 습관적으로 흉터를 긁는 오라버니를 닮아있었다.
문장의 조합을 완성한 리케는 옆에 있는 클로에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클로에의 마음을 모른다면, 언니는 오빠와 있던 즐겁고 행복한 일들을 동생에게 선의를 가지고 말해서 보여주고 긍정적인 면을 공유하려 하겠지?"
"···."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언니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오라버니도 언니와 리케가 함께 있으니 무조건 행복할 것이다.
입을 우물거리며, 어떻게든 반박하려는 클로에의 입술에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꾹 누른 리케는 뒷 말을 덧붙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클로에의 본심을 알았을 때. 언니는 괜찮을까? 악의가 없다고 해도 언니는 자기 동생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괴로워하지 않을까?"
"평생 들키지 않으면 되는걸요···."
제대로 답을 하지 않고 어림도 없는 말로 회피하는 클로에를 보고 리케는 피식 웃었다.
"그게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으니 내가 알았잖아. 세리아도 요즘 걱정하고 있고··· 애초에 클로에는 이대로 괜찮아?"
"···저는 당연히 괘, 괜찮아요!"
클로에가 흥분으로 조금 높은 소리로 답하자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리케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을 머금은 채 클로에와 마주했다.
클로에는 궁지에 몰려서 물기가 촉촉한 눈동자를 보이면서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잠시 후.
리케의 입이 상냥함과 자애를 담아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거짓말.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는 걸?"
아직 남아있는 한 번의 기회를 잘 써보자고.
리케는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