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1 - 두 번의 기회 중 첫 번째 -4-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이란 공간은 그런 것이다.
개구리의 식견을 한없이 좁게 만들고 바깥에 도사리는 뱀의 존재를 모르게 만든다.
"둘러싸!"
검집을 훌렁 벗겨 핏물을 배터지게 먹여 온 쇠 날을 밖으로 보인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한번 본다.
합은 맞지 않아도 반원을 어설프게 그려 복도의 입구에 서 있는 로만과 클로에의 앞을 막았다.
외지나 변방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까지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일격에 저택을 날려버린다 느니 순수한 근력만으로 오우거를 이기는 남자라느니.
같은 인간이라기에는 종의 한계를 넘어선 자에 대한 무용담.
제국의 이름난 기사와 모험가는 개개인이 일기당천이라 어쭙잖은 것들은 수십 명이 덤벼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느니.
우습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는 모두 가진 자들이 본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무리 중의 몇몇도 그 대단하다는 오러를 뽑을 수 있는데.
운이 좋게 출신만 타고 난 같은 인간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큰 차이가 날까.
무기를 든 농민이나 일반 제국 병졸들을 학살하는 건 본인들도 여유롭게 가능하다.
법이라는 것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땅.
패배가 곧 죽음인 지역에서 집단을 꾸리고.
이 나이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았기에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본인들도 수도에 있는 고위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이름을 날릴 기사가 되고도 남았으리라고.
콧대 높은 기사를 만나도 무난히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의뢰를 받은 것이다.
그런식으로.
다수가 주는 용기에 취하여 애써 외면하지만, 그들은 느끼고 있다.
같은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정말로 격이 다른 생물은 존재한다는 걸.
자존심보다 생존이 우선인 그들은 먼저 달려들 자가 누구인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먼저 뛰어드는 순간 그 대상은 당할 확률이 터무니 없이 높으니.
"대가리가 몇인데 안 움직여! 빨리 들어가!"
"지랄하네. 목청 큰 새끼가 먼저 가야지. 쫄아서 오줌이라도 지렸나?"
분명 의뢰자의 수족이 확인했을 때 목표물 이외에 대단한 인물은 없을 거라 했지만.
목표물에 붙어있는 한 남자가 문제였다.
"씨발···."
바닥에 쓰러져 얼굴에 형상을 잃은 덩치.
덤비려 해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눈이 향한다.
찰나에 벌어진 살인이 어쩌면 일어날 자신의 미래를 연상시키며 단체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발판 삼아 임무를 완수할 고귀한 숙명 따위는 없으니.
'안 덤비는 게 이해는 되는데, 눈이 자꾸 문 쪽으로 가는 놈들이 있어···.'
지원군이 오기라도 한 건지.
솔직히 대다수가 제대로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보이는 놈은 아까 시체를 잡고 화내던 놈들 정도가 끝.
웅성거리며 반원을 유지하는 게 최선인 머저리들을 보며.
로만은 클로에의 회색 머리에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에 순간 놀랐지만, 클로에는 이윽고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언젠가 했던 수업의 복습이 되겠지만, 이렇게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어조.
클로에를 보며 묻자 그녀는 눈을 적들에게서 돌리지 않고 작게 답했다.
"무, 무기를 빼앗거나 그러기 위해 주위 사물을 던지거나 뿌려서 기습을···."
내가 수업 중 지나가듯이 던져준 한마디 한마디를 그녀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 하지만 그것도 필요한 상황에서나 하는 일이지."
시이잉-!
허공에서 얇은 쇳덩이가 울음소리를 흘리며 뽑혀 나왔다.
척 봐도 깔끔한 비율에 기능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검 한 자루.
"···어?"
검집이 없음에도 완벽하게 관리 된 검면은 클로에의 놀란 눈이 그대로 비칠 정도였다.
미지의 현상에 웅성거리는 반대편을 무시하고 클로에의 손에 검을 쥐어준다.
"클로에. 검을 들고 마음을 정했다면 절대 망설이지 마. 복잡한 마음의 해답은 정직함 뿐이라는 걸 명심해."
"오라버니··."
나에게 호의를 가진 것을 알기에 가능한 행동.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클로에의 눈에서 생기가 기름을 부은 불꽃처럼 화끈하게 피어올랐다.
철컥!
브로치에서 시작 된 검은 갑주가 그녀를 감싸고 투구의 틈에서 청색 안광이 빛난다.
거대한 흉부, 허리까지 내려오던 잿빛 머리까지 깔끔히 숨겨주는 장인의 아티팩트.
"뭐, 뭐야 저건!"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겠지 병신아!"
은근하게 흘리는 낌새와 정보를 귀에 담으며 그녀를 보았다.
누가 이 어둡고 흉흉한 갑옷 안에 내성적인 미소녀가 있다고 생각할까.
검을 잡는 순간 수업 때와 같이 방어적인 자세를 잡고 침묵을 지키는 그녀를 보며 조언을 재개한다.
"뒤에는 신경 쓸 적이 없는 잘 풀린 상황이자 전황이야. 이런 순간에 우리가 굳이 먼저 들어갈 필요는 없어."
"네에··!"
평소보다 힘은 들어가 있지만, 여전히 부들부들한 목소리로 반응하는 클로에.
'응?'
그녀가 보유한 스킬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나이기에 순간 의문이 동했다.
궁금증이 몽글몽글 올라왔으나 일단 앞을 본다.
"딱히 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대들을 한번 불러볼까?"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포크부터 나이프까지.
티가 날 정도로 시간을 끌고 있는 상대를 불러올 만한 물건은 많았다.
테이블에 손을 뻗어 잡히는 금속을 손목에 스냅을 줘서 앞으로 던졌다.
팍!
"허업··!"
"미친!"
살면서 숟가락이 미간에 박히는 걸 본 적 있는가.
나도 해본 건 처음이다.
머리에 숟가락이 파고들어 뒤로 한 명이 넘어가자.
그것을 신호탄으로 반원이 좁아지며 하나둘 달려들기 시작했다.
"걱정 말고. 책임은 내가 질테니."
탁! 탁!
갑옷의 단단한 등짝을 두들겨주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을 다 잡았다.
추레한 장정들이 쿵쿵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화륵-!
"으랴아아!!"
길쭉한 검에 오러를 끌어 올린 덩치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자.
클로에는 무릎을 살짝 굽혀 균형을 잡고 푸른 오러를 끌어올렸다.
쨍!
압도적으로 많은 실전에 굴렀다 해도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대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카가각!
일자로 떨어지는 검을 대각선으로 부드럽게 흘려내고 교본에 나올 법한 깔끔한 허리 베기.
스걱-
물기 어린 소리와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들.
오러를 품은 검이 남성의 허리를 양단한다.
뼈대와 살점을 가르는 끔찍한 감각에 투구 안의 클로에는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이를 꽉 물고 손을 당겨냈다.
'망설임 없이!'
자기 입으로 나서겠다고 했는데 보호만 받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숙하고, 정신은 여리기만 하고, 매사에 갈팡질팡하는 자신이라 해도.
해야할 때는 제대로 할 수 있는 한 명의 여자이자 무인이라고 그의 앞에서 증명하고 싶었다.
····
허리 다음은 목을 깔끔하게 날려버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감탄했다.
'잘하는데?'
내 머리통과 식견이 사전에 알고 있던 '설정'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멍청했구나.
로버트만 해도 플레이어라는 컨트롤러가 없으니 그딴 상태였는데, 누구나 노력과 상황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고 달라질 수 있었다.
클로에의 손속에서 일어나는 칼질은 내 걱정을 잊게 만들고 리케가 생각하는 클로에의 감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시원시원한 참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과 결정으로 개화하고 있었다.
상대를 받아내고 그 힘을 역이용하는 동작들과 몸에 부담을 주지 않고 힘을 받아내는 손놀림까지.
실전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기술들을 정밀한 기계처럼 수행하는 그녀의 모습.
벽을 보고 검만 휘두른다는 고되고 외로운 시간을 견딘 증거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한 시간이 드디어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끄아악!"
클로에의 검에 양팔이 깔끔하게 날아간 자가 뒤로 나뒹굴었다.
푹!
그대로 쓰러진 남자의 턱을 강하게 즈려밟고 열린 목에 정확하게 검을 쑤셔 넣어 마무리를 낸다.
'미래에 대단하겠어.'
리케도 그렇지만 클로에도 마음을 제대로 먹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첫 실전을 마주한 클로에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도록.
우르르 달려드는 놈들의 머리통이나 복부를 발로 차서 밀치고.
코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타격으로 다수를 제어하며 클로에 쪽으로 한 명씩 흘려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흠.'
그 와중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덜덜 떠는 한 녀석과.
방구석에 박혀 나올 일이 없는 로버트의 친구 아이작이 보인다.
머리를 스치는 것들.
원작에서 로버트가 클로에의 호감도를 건드릴 수 없는 설정과 이유.
그리고 대놓고 내게 보이는 적대적 감정.
'뻔뻔함이 부족해.'
여기 높은 놈들과 전생의 대단하신 분들의 차이는 대부분이 표정 관리가 영 안 된다는 것이다.
나를 보고 이를 부서질 듯 물고 눈을 부릅뜬 모습은 상황에 대한 심증을 가증시켰다.
제국은 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도 없다시피 하며, 투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계급이라는 확실한 지표가 존재하니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 뒤! 뒤에 그놈 왔는데··그냥 지금 나갈까?"
소란스러운 와중에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잡힌다.
상황이 점점 급변하자 뒤쪽 줄에 있던 인원들은 바깥에 서 있는 둘을 보고 대응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와 클로에는 상처 하나 없고 앞에는 시체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니 그림이 누가 봐도 이상했다.
'과연···.'
쌓여가는 시체를 보고 퍼져나가는 공포는 웅성거림을 만들었고.
그들이 작게 중얼거리는 대화.
흔히 마나 계약의 처벌로 말을 꺼내려다 눈이 풀리며 멍청해지는 놈까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마나 계약서의 사항을 위반하는 경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별개로 귀에 들어오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했다.
'나름 지분이 있는 주요 인물들이 왜 이렇게 글러먹고 망가지지? 컨트롤러가 없으면 선천적으로 그런가?'
생각만 해도 내가 얼굴이 화끈한 이딴 상황을 왜 선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애초부터 그의 생살여탈권은 데가넬로에게서 구해 준 날부터 내 손안에 있었다.
일단 자리를 망친 벌을 줄 시간.
아이작이 옆에 서서 굳은 남자를 보고 얼굴이 시뻘게져 분노하며 문책하느라 내게서 눈을 돌린 시점.
깽!
"헉!"
뭉개진 코를 잡고 서 있는 남자의 검을 손날로 깨트리자.
놈은 허겁지겁 벨트에 걸린 단검을 반사적으로 꺼내 들었다.
급하게 뽑은 단검은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 날 전체가 녹 덩어리.
원래는 방금 깨트린 날을 사용하려 했으나 저것이 더 확실해 보였다.
그걸 보고 뻗은 의도적인 발길질.
몬스터의 골통도 우습게 부수는 다릿심에 저항도 못 하고 조각난 단검의 날은 그대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허공을 비행했다.
쨍그랑!
녹을 한가득 머금은 주황색 쇳조각들이 가게 창문을 뚫고 정확하게 아이작의 안경을 부수고 눈동자에 사정 없이 박혀 들었다.
정말 피치 못 할, 불가항력적인 불행의 산물이자 사건이었다.
"아아악-!!! 피, 필립! 필리입!! 빨리 교, 교단을!!"
깨진 유리 사이로 들리는 비명.
'아카데미 맹인 마법사!'
어쩐지 이름만 들어도 강력해 보이는 존재를 완성하고.
비명 덕에 이름을 알게 된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필립."
입 모양만으로 정확하게 놈의 이름을 호명하자.
벌러덩 쓰러진 아이작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혀를 날름거리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알기 쉽게 공포를 담아 얼어버렸다.
뇌 용량이 아깝지만 남정네 하나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아이작이야··· 하나도 아니고 자잘한 녹이 눈알 깊숙이 박혀 들었으니.
당장 교단에 달려가 치료를 해도 결과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대상을 업고 뛰어가도 모자랄 판에 옆에 필립이라는 놈은 아직도 나를 응시하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능력 좋은 마법사야 많으니 자료만 얻고 죽일까?'
아이작을 죽일 방법은 내 손을 통하지 않아도 널리고 널렸다.
다른 차원을 열 수 있는 진짜 열쇠는 로버트지 아이작이 아니다.
아이작은 그쪽 방면으로 전공이라 스토리에 엮이지만, 현실로 보자면 대체재는 넘치게 존재한다.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두번 뿐이라도 그것에 대해 정리 된 자료가 있다면 시간을 아낄 가능성 또한 충분.
'일단 마무리다.'
그 모든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는 이제 무시할 때.
날이 사라진 단검을 멍하니 들고 있는 놈을 발로 차서 구석에 박아 넣고.
그녀가 실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를 이어갔다.
클로에의 검이 정확하게 3명을 더 베어넘겼을 때.
가게에 경비대가 우르르 들이닥쳤다.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이 무슨 소란이오!!"
실질적으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경비대의 빠른 대처가 마음에 들었지만.
"씨발! 그 새끼가 막아준다며!"
"좆됐다!"
저것들이 아이작이 사병으로 키우던 병사였다든가.
정말 믿기 힘들지만, 이 머리로 가문의 뒤처리 담당들이었다면.
잡혔다가 살아 나갈 가능성이 있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주인을 잃은 케케묵은 검을 들어 검붉은 오러를 뽑아냈고.
파지직-
오러를 감당하지 못한 검이 부서지기 전에 휘둘러 남아있는 잔당의 목을 깔끔하게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