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9 - 두 번의 기회 중 첫 번째 -2-
아이작에게 아카데미가 아니라 사회 경험이 조금 더 있었다면.
지금과 선택이 달랐을까?
똑똑한 건지, 미련한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모를 차기 가주의 명령에 필립은 이상하게 닭살이 오르는 팔뚝을 벅벅 긁을 뿐이다.
끼익-
필립이 아이작의 돈으로 빌려둔 여관의 문을 열자.
웅성거림이 잦아들며 시선이 모여들었다.
기다리느라 쌓인 불평불만을 무시하고 일단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아이작의 히스테리를 정면으로 맞고 와서 그런지.
돼지우리처럼 엉망이 된 내부를 보니 표정이 절로 찡그려지고 속에 열이 부글부글 올랐다.
'어차피 오늘이면 다 끝날 일이니··· 한 번만 참는다.'
추잡한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호흡으로 정신을 잡은 필립은 복부와 목청에 힘을 준 목소리로 이목을 모았다.
"이제 곧 나갈 거니. 다들 준비하지."
필립이 없는 사이 이야기를 제법 나눴는지 의뢰자의 말을 듣고도 이놈들은 엉덩이를 쉽게 떨어뜨리지 않았고.
원하는 게 있는지 능글맞게 생긴 남자가 덥수룩한 턱수염을 만지며 요구사항을 돌리고 돌려서 꺼내왔다.
"혈기 넘치는 시커먼 남정네들을 술이랑 여자 하나 없이 이 좁은 곳에 처넣어두고 말이야. 땀 냄새로 머리가 어지럽단 말이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주위에 웃음이 전염병처럼 번져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것들과 큰 차이가 없는 인간인 필립은 외지의 인력들에 밀리지 않고 기세를 지키며 턱을 치켜들었다.
"저 친구 보이시나? 원래 이마에 주름이 세 줄이었는데 기다리다 주름이 네 줄로 늘었고 자칫 검까지 녹슬 뻔했다지."
손톱 밑까지 꼬질꼬질한 손가락을 들어 한 명을 가리키자 지목당한 남자는 웃기지도 않는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잘난 얼굴 망가졌으니 이제 창부들이 서비스도 안 해줄 거 아니겠소!"
어설픈 촌극으로 쿵짝을 치는 무리를 보는 필립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쓰레기들은 꼭 한마디가 많아 명을 재촉한다.
"저것 보시오! 이미 망가진 얼굴은 몰라도 무기 관리비 정도는 책임져 줄 거요?"
입을 닫고 의뢰주를 잘 따르면 진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뒷짐 진 손을 꽉 쥐어 화를 삭인 필립은 어차피 이들의 정해진 운명을 알기에 조건을 걸었다.
"일만 잘 끝내면 추가금을 지불해달라고 내 필히 간청하겠다. 결과에 따라 후하게 지불해주고도 남을 분이시다."
"이야~! 누구신지 몰라도 그쪽이 모시는 분은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그제야 한 명이 엉덩이를 들고 나머지들도 무기를 챙기며 일어났다.
"누군지 돈이 썩어나긴 하나 보네. 이딴 일에 돈을 쓰고."
"뭐 상처를 주지 말고 무력하게 만들라 했지만, 실수로 몸 정도는 만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서로의 수준에 맞는 대화인지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금방 돌아올 테니 다들 준비하고 있도록."
"예예~ 명대로 합지요~ 크하하!!"
자신들에게 좋은 합의점을 찾았음에도 살심을 들끓게 하는 건방진 태도는 반대로 감탄만 나왔다.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대단한 엘리트들.
의뢰 내용을 위해 자신이 선별한 우물 안 개구리들 집합소다웠다.
꼴만 봐도 이런 머저리들을 어떻게 골라 모았는지 자기 능력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쯧··."
역으로 이것들이 후퇴한 뒤가 중요한 문제.
아이작이 가문에서 최근 끌어온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이 다른 곳에 모여있다.
청소를 도울 인물들에게도 준비를 알리기 위해 필립은 쉬지 못한 채 골목너머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
비록 디저트 가게라고 하지만 상업성을 위해서는 단 것만을 구비하지 않는다.
클로에의 메뉴 선택은 한쪽으로 쏠려 있어 선택이 빨랐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메뉴판을 싹 훑어봤다.
소금빵 부터 시작해 간단한 요리들도 존재하긴 했지만 모두 빵에 곁들이기 좋은 것들이다.
콘수프나 토마토 마리네이드 등.
느긋함을 가지고 메뉴를 둘러보니 디저트 전문점이라기에는 포용력이 제법 넓은 가게였다.
어쩌면 내 경험과 생각이 상업에 대해서 편협하게 좁은 것일지도 모르고.
"음~ 나도 결정!"
딸랑-
애초에 방음을 위한 공간이라 종을 울려도 이 듣기 좋은 소리는 장식이나 다름없지만.
겉과 달리 편의를 위한 마도구이다 보니 반응을 전달받은 외부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똑- 똑-
정중함을 담은 노크 소리.
거기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깔끔한 서비스.
주문에 따라 테이블을 장식한 디저트들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작품이 연상되었다.
"와아··! 앗!"
눈앞에 놓인 것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뱉은 클로에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급하게 가렸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태도는 타인까지 기쁘게 하는 것인데.
이 세상의 귀족 여성들은 계급 사회의 품격이나 품위에 대한 교육 문제인지.
솔직한 감정을 숨기려 드는 경향이 전생보다 월등히 크다.
"클로에의 마음에 들어 보여서 나도 좋네. 편하게 먹자."
대화마다 '편안함'을 누차 강조하며.
빵칼과 버터나이프 등이 담긴 바구니를 넘겨주었다.
강조의 노력과는 달리 클로에의 귀에는 내용과 무관하게 '좋네' 라는 말만 박혀 들어온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손으로 히죽거리는 입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
"가, 감사해요! 헤헤··."
하얀 천이 깔린 바구니를 건네받으며 클로에는 입술 사이로 나오는 웃음소리를 정신 놓고 흘렸다.
"수업 때 찢어진 손바닥은 잘 치료받았고?"
"네에! 멀쩡해요!"
"회복해도 피로감이 남아서 몸이 무겁지? 돌아가면 바로 잠들겠네."
"그러고 싶지만··· 요즘 이론 과목 복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반적인 식사를 통하는 것보다는, 체감상 이런 고급스러운 카페나 다름없는 곳이 대화를 주고 받기에 적합하다.
사소한 잡담이 이어지고 10분 정도가 지나 클로에가 완전히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게 되었고.
대화 사이에 작은 틈이 생기니 클로에는 묻고 싶은 게 있다며 내게 질문을 해왔다.
나야 어떤 질문이든 흔쾌히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 오라버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나를?"
"네에···!"
"으음~ 질문의 힌트를 조금 더 줄 수 없을까?"
그제야 질문에 붙은 설명이 부족했다는 걸 깨달은 클로에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늘 친구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었거든요."
"친구라면 리케랑 세리아인가."
"네, 네에! 그때 나온 이야기인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엄청 중요하다고 해서···."
앞이 상당하게 잘려있는 단적인 문장이지만.
눈칫밥을 먹어온 시간이 있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 말은 리케가 했을거고?"
"?!"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표정.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지만, 그게 세리아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기에는 이미지가 전혀 안 맞는 문장이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추론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 는 말을 리케가 한 거면···.'
리케의 인생사를 생각하면 여러 의미가 떠오르지만, 나와 마주하면서 실제 설정과는 긍정적인 부분으로 간격이 생겼다.
명석한 리케가 클로에에게 그런 말을 꺼냈을 이유.
그녀가 겪어온 삶.
두 여자가 내게 했던 말.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는 내 머리가 과부하를 일으키기 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컵을 잡아 냉수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푸하-!"
"···오라버니?"
내 행동에 불안감과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클로에에게 되물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다시 묻는 건 정말 미안한데, 클로에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요··· 저, 저는 좋아하고 싶은데. 저의 어디를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클로에의 생각은 일직선으로 정직하다.
거기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고 선택지를 한정시키는 부분이 있는 건 에클레어와 똑같았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이 상황의 익숙함은 뒷골목에서 에클레어를 만난 날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건 장점을 찾아서 좋아한다기보다 이유를 만드는 거지."
"···만들어요?"
남도 아니고, 클로에다.
길거리에 관계도 없는 자들이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가지든 상관없지만.
클로에는 내 말을 최소 한 번은 곱씹게 될 것이다.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가려움이 전해지는 턱의 흉터를 긁던 나는 비어있는 컵을 채우며 말을 꺼냈다.
"과거에 의뢰에만 목을 매고 있던 시절. 선술집에 있다 보면 정신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거든? 럼을 주문해놓고 막상 테이블에 놓는 순간에 럼은 꼴도 보기 싫어지면서 맥주가 마시고 싶어진다던가··· 매번 이게 반복되는 거야."
"···."
"처음에는 이게 과로로 인한 정신병인지 스트레스가 원인인지 몰라서 불안하기도 했고. 연쇄적으로 생각이 이어지면서 증상을 심화시키기도 했는데··· 사실 그런 심각한 병 같은 게 아니었어."
"그럼··괜찮으신 건가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건 내 깨달음이자 진짜 오러를 익히는 과정이고 나만의 전조 증상이었다.
각자 전조가 다르다 보니 눈치채는 게 상당히 늦었었다.
내 감정과 특색들이 유달리 진해지며 나만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시간.
"그냥 나 자체가 변덕스러운 인간이었던 거야. 처음엔 외면했는데 시간이 지나 이 글러 먹은 성격을 받아들이고 나니 속이 시원하고, 내 입으로 말하기 좀 이상하지만··· 그때부터 내 자신이 점점 소중해 지더라? 이게 장점이 절대 아닌데도."
"아··."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멍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리는 그녀에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이 변덕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인생에 따라 강제적으로 형성된 거고. 이왕 생겨서 버릴 수는 없으니. 이쁘다 이쁘다 하며 포용하는 거지."
"조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나와 같은 방식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니.
하지만 나름의 갈피는 잡은 듯 하고, 성장을 지켜보는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져 신나게 떠들었다.
"클로에는 자신감을 가져도 돼. 본인이 정말 못났다면 리케나 세리아 같이 좋은 친구들이 있었겠어? 그 둘이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잖아. 나도 한 눈치 하는 인간인데 지금의 클로에도 충분히ㅡ?"
내가 뜬금없이 말을 멈추고 벽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같이 고개를 돌렸던 클로에가 아무 문제없는 벽을 확인하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 가게가 유명한 가게라고 하지만 이런 형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가게였던가?
나도 그렇지만 피차 분위기와 맞지 않는 종자들이 가게에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