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8 - 두 번의 기회 중 첫 번째 -1-
발이 빠르면서 몸을 숨기는 것에 능하고 마도구를 설치하고 사용할 줄 아는 자.
아이작에게 불려 혼자 수도로 오게 된 필립의 주위에 그게 가능할만큼 제대로 된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급하게 공수한 인맥 중 하나는 혹시 시야의 사각지대가 생길까 다른 곳에 배치한 상태.
지금처럼 빠르게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상황에 옆에서 잡무를 도울 보조 하나가 없는 건 터무니 없이 열악한 환경이 맞다.
빈방에 쭈그려 앉아 마도구를 준비하던 필립은 낑낑거리며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풀어준다.
이 고생이 돈 많은 어린놈의 쪽팔린 망상을 실현시켜주기 위한 거라 생각하니···.
초탈함과 허무함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이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진짜 씨벌."
대상이 대상인만큼 준비는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해야 한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들.
그것들을 통해 필립은 인간의 껍데기를 쓴 '괴물'들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거기에 속하는 괴물 중 하나가 이번 일에 엮일 수 있기에 몇 번이고 조심해도 부족한 상황.
경험이 부족한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제국의 5기사라 해도 한 명의 인간.
거리를 충분히 두고 철저하게 몸을 숨겨 마도구로 훔쳐보는 시선까지는 알아채지 못할거라며.
필립의 조심스러운 행동은 시간과 심력 소모가 과하다 할지 모르지만.
아이작의 정신나간 계획을 돕고 있는 필립의 생각은 달랐다.
에클레어 드리트나의 저택은 아무리 멀다고 해도 마도구로 관찰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느낌, 직감에 빠르게 포기했고 다른 길을 찾았다.
그나마 아카데미를 다니는 귀족 집안의 여식들은 골목길을 제외하고 큰길로만 다닌다는 습성을 이용.
클로에가 저택에서 나온다면 향할 수 있는 한정적인 경로를 파악해둔 필립은 한참 앞의 거리에서 기약도 없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푸우···."
일할 때는 혹시 몰라 연초도 못 태우니 죽을 맛.
수도에 모아둔 꼴통들을 최대한 빨리 치워야 편하게 마음이 놓이기에 잠시도 쉴 수 없다.
내용은 어린 아이들도 무시할만큼 유치해도 업무의 크기는 아니다.
"크흠!"
마른 기침을 하여 졸음을 쫓아내고 목을 한번 돌려준 뒤 다시 집중.
목표물인 클로에 드리트나의 외형은 눈에 확 띈다.
아카데미가 끝나는 시간.
조금만 눈을 돌리면 그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도 남자의 시선을 당기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저택 쪽으로 급하게 돌아가는 클로에의 뒤를 멀리서 마도구로 포착하며 쫓다가 지금은 대기 상태였다.
'왔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환복을 끝내고 나온 그녀가 보인다.
조급해 보이는 목표물의 행보에 안 그래도 기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림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이 일이 시작되는 느낌이 좋았다.
'다음 건물로.'
필립이 가지고 있는 원통형 망원경은 말로이 백작가에서 공수한 마도구 답게 성능도 뛰어났고.
아이작이 돈으로 비워준 방들 덕에 높은 곳에서 큰길을 내려다보니 시야가 탁 트여 수월하기 그지없다.
'이대로면 기회도 올 것 같고··· 오늘 그것들을 쓰고 버려도 되겠어.'
현재 여관을 하나 통으로 빌려 대기 중인 머저리들은 빨리 사용하지 않으면 언제 발목을 잡거나 터질지 모른다.
자존심은 최고에 힘은 좀 있지만 머리가 압도적으로 모자란 것들.
그들을 갈등 없이 통솔하는 제일 훌륭한 방법은 '단순함'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을 알려주면, 속으로 이해를 못했음에도 되묻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족속들.
그것들을 믿을 바에는 자신이 나서는 게 속 편하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모아둔 것들이 사고를 칠까 쉬어도 쉬지 못하는 행태가 될 것이니.
여자에 미쳐있는 도련님이 원하는 정신 나간 상황을 조형하기 위해.
필립은 창문을 살짝 열어 그 사이로 클로에의 뒤를 따르며 관찰했다.
'어딜 가는 거지?'
평소의 느긋함은 어디 가고 목표물의 발걸음은 보통 속도가 아니었다.
"오우! 이야!"
클로에가 걷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그 돈 밖에 없는 연구쟁이가 눈이 돌아가 탐낼만한 폭력적인 몸매였다.
'살면서 저런 여자 한번 안아볼 수 있으려나···.'
최대한 가리고 있는 복장이 더욱 야릇한 느낌을 풀풀 풍겨온다.
롱스커트 위로 슬쩍슬쩍 보이는 둔부의 윤곽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체력도 없는 마법사 도련님에게 아깝기만 한 육체.
'도착?'
대상이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절차로 반대편의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마도구를 돌리는 순간.
"···?!"
우당탕-!
필립은 처음으로 겪은 공포에 눈알에 딱 붙이고 있던 마도구를 급하게 내던지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바, 방금···?'
목표물의 옆에 있는 근육질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확실한 응시.
알고 본다 해도 쌀알보다 작게 보일 거리에서 창문에 커튼을 치고 뒤에 숨어있는 자신인데.
마도구를 향해 상대의 눈이 휙 돌아 시선이 부딪히는 소름 돋는 경험을 해버렸다.
말도 안 되는 경우라 우연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싶지만.
필립은 오랜 시간 자신을 먹여 살려 온 직감을 부정하지 않는다.
"···."
숨을 멈춘 채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을 숨어있었다.
그대로 배를 나무 바닥에 붙인 채 버둥버둥 기어 빈방을 빠져나왔고.
클로에가 가게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자신은 관찰을 중단.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 다른 방에 있는 부하에게 가게의 관찰을 넘겨두고.
필립은 자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작에게 향했다.
··
··
"···남자라? 누구지?"
알기 쉬운 표정.
아이작의 얼굴이 꽉 쥔 종이처럼 찌그러졌고.
혈기 어리고 감정적인 아이작의 모습에 괜히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필립은 점점 불안해졌다.
"처음 보는 인물이지만, 제 경험과 감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련님··· 이번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시는 게ㅡ"
쨍강!
아이작이 손에 들고 있던 컵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자 넓은 방에 침묵이 도래했다.
"너희 같이 머리가 부족해 몸으로 먹고 살고 이론까지 모자란 족속들은 언제나 그런 말을 하지! 기세가 어떠니, 분위기가 불길하니,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나 들이밀며 명확하게 회피해야할 근거 하나 제시하지 못해."
"···."
"그 남자가 눈 앞에서 거대한 건물을 슬라임처럼 잘라낼 오러라도 뽑던가?"
"아닙니다···."
"하면 필립이 봐도 알만한 고위 귀족의 일원이었나? 나조차도 고개를 조아려야 할?"
"그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업으로 바쁜 말로이 가문을 돕는 정식 사용인들은 기본적인 교육으로 사교회나 자리에서 혹여 마주칠 수 있는 귀족들의 얼굴을 암기한다.
거기에 저런 흉악한 분위기의 남자는 없었다.
"애초에 그것들이 사고를 치면 무마하기 위해 마주하는 상황인데, 상대가 누구면 어떻고 사전에 겁 먹을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이럴 때는 그저 조아려서 듣는 게 상책.
더 이상 말해봐야 반론에 묵살당할거라고 인지한 필립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작의 신경질을 받아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필립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다는 남자는 놈들을 이용해 확실히 손 봐줘라. 어차피 다 정리할 녀석들이니 무슨 짓을해도 상관없지. 얼른 가서 준비나 서둘러."
"알겠습니다."
지금 방을 나서지 않으면 본의를 넘어 당사자 앞에서 한 숨이 흘러 나올것 같아 필립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
'뭐야 저 새끼들?'
가끔 저렇게 의도조차 모를 수상한 놈들이 있긴 했다.
오히려 최근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지.
주위를 싸돌지 않고 내 여자들 끼고 사느라 트러블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달려가서 저것들 머리통을 깨놓을까 했지만, 온몸으로 기대감을 보이는 클로에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잔인한 처사였다.
표정을 풀고 기다리고 있는 클로에를 마주한다.
아카데미 정복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힘을 주고 나온 깔끔한 복장.
노출을 꺼리는 그녀의 성향이 제대로 반영되었지만.
그게 반대로 남자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이쁘게 입고 왔네?"
"허,엣··! 어··! 가, 감사합니다!"
화들짝 놀라며 과부하가 걸린 기계처럼 삐걱거리던 클로에는 우물쭈물하다가 감사하다는 말로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생각한 거랑 반응이 다른데?'
놀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 모습 자체는 내가 그리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 성장세는 놀라기로 따지면 얼굴에 피를 뿌리던 실전 수업보다 놀라웠다.
온전히 자신에 대한 긍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부정하는 인물이 원작의 클로에니까.
"이번에 새로운 가게를 가봐도 되고 여기 가도 되는데 어디 가고 싶어?"
"저는···여기가 좋아요!"
알기 쉽게 들떠있는 목소리.
거기다 의견을 확실히 말해주는 이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졌다.
"들어갈까?"
"네에··!"
문을 잡고 클로에가 들어가기를 기다리자, 그제야 자신을 기다린다는 걸 눈치채고 내 앞을 지나 가게로 총총 들어간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공간.
저번과 공기가 묘하게 다르다는 건 클로에도 로만도 눈치채고 있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는 클로에를 위해 아이스브레이킹이 필요한 시점.
메뉴판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침묵을 깨트렸다.
"클로에. 보통 사람들이 아침에 비해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단순히 자다 일어났으니 아침은 간단히 먹는 걸까?"
저번보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녹이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꺼낸 말이지만, 클로에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을 고민했다.
"음··· 다들 일하는 시간을 끝내고 하루를 힘낸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면 지겨운 시간을 버틸 동기부여도 될거고."
"오라버니의 생각은 다르신가요··?"
그녀가 순수한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내 생각을 궁금해 했다.
"하늘 위에 있다는 여신님이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라 어둠이 찾아오고. 그때는 사치를 부려도 들키지 않는 시간이거든."
당연히 생각나는 대로 뱉은 헛소리.
그러나 클로에를 비롯해 내 여자들의 장점 중 하나는 이런 말도 아닌 헛소리에도 웃어준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이런 어줍잖은 소리에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키득키득 웃어주는 클로에에게 감사할 뿐이다.
"오라버니의 관점은 매번 독특하고 재밌네요. 저, 저도 그쪽이 더 타당하고 옳은 것 같아요···! 어두운 곳이나 밤이 오면 나쁜 일도 많이 일어나니···."
조금은 분위기가 보들보들해진 것을 본 나는 옆에 놓여있는 여유 분의 메뉴판을 꺼내들었다.
"그렇지? 그러니 지금 시간은 사치스러우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즐기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