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77화 (177/250)

Chapter 177 - 나를 사랑하라.

"클로에가? 궁금해?"

리케와 세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향했다.

"···."

왜 뜬금없이 날카로운 화살촉이 자신에게 돌았는지 모르겠으나.

흔히 침묵으로 긍정한다고, 궁금하냐고 묻는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리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생각에 잠겼다.

톡. 톡. 톡. 톡.

"아무리 생각해도 먼저 해줬던 이야기 외에 말해줄 만한 대단한 무언가는 없는데?"

리케의 말에 세리아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달라붙었다.

"왜~ 이야기해준 사건들 사이에 시간이 중간중간 비어있었으니 그 사이에 있던 일들이 있을 거잖아!"

"그거야··· 사적이고 밖에서 떠들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니까 이야기하지 않은 거지."

"응? 사적인 이야기?"

당사자가 감정의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세리아는 리케가 언급한 말의 요지를 당장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쪽으로는 늘 눈치가 빠르면서 이런 쪽으로는 둔감한 소녀를 본 리케가 승리의 미소를 그리기 위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애정의 표현들이지. 세리아 그렇게 안 봤는데··· 야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였어?"

"어, 어···?"

괜히 선제공격을 던졌다가 카운터를 맞고 구석에 몰린 세리아는 드물게도 얼굴을 자신의 머리색과 같이 시뻘겋게 물들이며 당황하는 태도를 보였고.

기세를 잡은 리케는 그녀를 더욱 궁지로 몰아간다.

"요즘 집요하게 물어오는 걸 보면 수상하단 말이지. 관심 있는 남자라도 생겼나? 세리아가 그런 걸 물어보고."

"아니··!! 그런 거 절대 아닌데?!"

그녀가 강하게 부정해도 리케는 멈추지 않았다.

"강한 부정은 때로 확실한 긍정이지. 세리아도 이제 그럴 때인가~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내가 열렬히 응원할게."

"윽··!"

일방적이고 평화로운 만담을 지켜보면서도 클로에는 리케가 은근히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꺼내주지 않을까 침묵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아를 그로기 직전까지 만든 리케는 눈이 핑핑 돌며 정신을 못 차리는 세리아의 입에 쿠키를 넣어 진정시켰다.

"자, 농담은 끝."

"···."

그 행동 하나로 혼절 직전에서 정상으로 돌아온 세리아는 입에 들어온 달콤한 덩어리를 으적으적 씹으며 리케의 말을 기다렸다.

"진정해 봐. 이제 말해줄 만한 내용이 생각났으니."

"벌써 진정했어!"

단 것이 입에 들어간 세리아의 표정이 원상태로 돌아오자 리케는 실소를 머금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으음~ 내가 먼저 오빠에게 찾아갔다고. 둘 모두에게 말했었나?"

"응!"

"네에··!"

리케의 입에서 나오는 '오빠'라는 단어는 둘이 느끼기에 이질적인 인상이 강했지만.

어조나 얼굴에 투영되는 감정 자체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혼자 과거의 시간을 곱씹던 리케는 비어있는 허공에 시선을 주며 머리끝을 매만졌다.

"되돌아보면 오빠에게 민폐를 끼치고 집까지 찾아갔으면서. 내가 고백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건··· 품고 있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리케의 입에서 나온 건 달달하고 부끄러운 사건이나 시간이 아니었다.

예상에 전혀 없던 철학적이면서 고찰을 닮은 문장이 나오자 세리아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리케는 늘어놨던 문장을 간단하게 축약하여 세리아와 클로에에게 전달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사랑에 빠진 건 확실했지만,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자신이 없었다는 거야."

"어째서? 상대의 직책이 대단해서?"

클로에가 묻고 싶은 점을 꺼내기도 전에 세리아가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줬고.

그녀의 질문에 리케는 부정하며 고개를 젓고 답안을 꺼내 들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었으니까. 남도 나를 사랑할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겁이 났다는 거야."

스카디의 추잡한 피가 섞여 있는 몸뚱이가 극도로 증오스러워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남겨준 피와 살점, 흉터까지 모든 게 소중해서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했었다.

그걸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인이 없었다면?

평생 갈등만 하다가 피폐해져서 몸이 망가졌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 법.

지금의 리케를 보면 누구도 상상이 불가능한 경우라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기댈 곳이 없을 때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알고 있다.

"으음···."

단지 리케의 숨겨진 표정을 꺼내보려 했을 뿐인데.

상상과 다른 무거운 이야기가 나오자 세리아는 입으로 침음을 흘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길어졌지만 결국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말이려나.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타인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건 나쁜 의도가 없어도 강요이고 폭력이나 다름없어."

"굳이 말 안 해도 나는 내가 좋은 걸? 리케와 클로에가 좋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나!"

묵직한 분위기의 탈출구를 찾은 세리아가 과장되게 액션을 보이자.

리케는 세리아의 폭발적인 활발함이 실로 어이가 없는지 킥킥 웃으며 그녀의 입에 쿠키를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그럴거라 생각했어."

주는 걸 받아먹는 세리아를 보던 리케는 웃음을 잃지 않고 클로에에게 눈을 돌렸다.

"클로에도 생각이 깊은 건 장점이지만, 그 방향이 자기를 비하하거나 깎아내리는 쪽으로 가지 않았으면 해."

"가, 감사해요···."

오라버니와 약속을 정한 걸 아까 말하기도 했고 리케도 시원하게 허락해서 당당하다 생각했는데.

리케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 속에 숨겨둔 무언가가 콕콕 찔리는 듯했다.

··

··

아카데미가 끝나고 평소라면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저택으로 돌아갔을 클로에다.

하지만 오늘만은!

풍성한 회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발을 움직였고.

후다닥 저택에 들이닥친 클로에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급하게 옷을 벗었다.

샤락-

아카데미 정복을 그대로 입고 가게로 달려갈까 했으나 최소한의 노력과 공은 들이고 싶었다.

실제로 정복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제일 예의 있겠지만, 이대로 간다면 단순히 교관과 생도의 자리가 될 것 같아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빨리 준비해야지!'

이번이 아닌 별개로 남아있는 디저트 약속 때 무엇을 입으면 좋을까 미리 정해뒀었기에 그녀의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준비는 끝.

리케는 알고 있지만, 혹시 몰라 언니에게도 소식을 남기고자 펜을 잡은 클로에는 자신의 방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누군가의 흔적을 보며 웃음을 보였다.

클로에의 방 탁자 위.

그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놓여있는 꽃병에는 조화 한 송이가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손재주 좋은 아이가 만들었다 해도 에클레어 소유의 고급 저택과는 섞이지 못해 결이 달랐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 꽃을 자신의 방 중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조화를 들어 코로 향을 느껴본 클로에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모습을 한번 확인했다.

'나 진짜 못됐구나···.'

오늘 친구들과의 점심시간을 말미암아 정말 피할 수 없이 인식하게 된다.

로맨스 소설에 빠져있던 자신이 제일 궁금해하던 감정을 윤리적인 이유로, 목을 손으로 잡고 억지로 돌려가며 외면하고 있었지만.

친구들의 몇 마디에 이제는 완전히 드러나 본인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이 마음을 알고도 오라버니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추악해 보였다.

언니와 친구에게서 오라버니를 감히 넘보는 것은 아니다.

진짜?

지금 위치를 지키며 단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족하니.

정말로?

"아···! 늦으면 안 되는데!"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양쪽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상념에서 클로에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것에 취해 멍하니 서있었다는 걸 깨달은 클로에는 다시 바쁘게 몸을 움직여 저택을 나섰다.

*****

'너무 편안하게 입기는 뭐하고··· 역시 깔끔한 게 최고지.'

근육의 사이즈로 인해 조금 불편해도 남자에게 셔츠만 한 무난한 선택지가 또 있을까?

헐렁한 상의보다는 불편하겠지만, 고가의 셔츠를 입는다면 훌륭한 재질로 그 점을 무난하게 보완할 수 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돌려보니 확실히 돈값은 하는지 불편함은 없다.

혼자 살 때는 편안함이 최고라며 헐렁하니 지냈지만.

내 여자들과 다닐 때는 그녀들에게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최소한 멀쩡하게는 다녀야 하니 옷장도 예전에 비하면 아주 넉넉해졌다.

"흐음."

리케와 에클레어는 나.

로만이라는 남자를 최고 높은 점수로 매겨준다.

당사자는 뿌듯하기만 하다.

그 둘은 내 긍정적인 자존감의 원천이니.

리케도 에클레어도 최근 클로에로 인해 생각이 상당히 많아 보였지만.

그나마 둘의 의견이 한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게 만족스럽다.

-다른 남자에게 간다고 해도 클로에가 나만큼 행복할 수 있을지, 그 아이를 진정 존중해주는 남자를 제국에서 만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미지의 확률에 걸기보다 확실한 미래를 잡고 싶다. 리케의 말대로 드리트나 자매를 모두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말이다. 로만이 클로에의 성정을 이용해 막 대하지 않을 거라는 건 내가 알고 있으니.

전생에는 어디 인터넷에서 억지로 짜내야만 볼 법한 자극 점을 찌르는 배덕적인 문장.

그것이 내 현실이 되었다.

하여 오늘이든 다음번이든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해서 클로에 드리트나라는 여성을 마주할 것이다.

끼익-

문을 열고 나와 바람을 맞아보니 날이 선선하여 제법 괜찮다.

수도의 어디라 해봐야 내 발로는 거기서 거기.

집이 있는 외곽에서 벗어나 중심지의 가게로 향하니 클로에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기다리지 않는 타이밍.

"···!"

눈이 닿는 거리에서 다가오는 서로를 확인한 둘은 작게 손을 흔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