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6 - 궁금하냐고요?
나라는 인간은 이리도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가.
역해도 좋고 추악해도 좋다.
눈앞에 기회가 떨어졌을 때 잡아보겠다는 일념 단 하나.
'열심히···.'
오라버니가 말하는 '열심히'의 기준은 알 수 없다.
합격점은 자신이 상상도 못 할 만큼 높은 곳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신도 체력도 잿더미로 변해 남아있지 않을 만큼 전력 질주를 시키자.
"후우우-"
소설에서 감명 깊게 봤던 장면이 머리에 자연스레 연상된다.
'로맨스 소설은 아니었지만···.'
죽기 직전의 그림자 늑대가 자신의 족적을 남기기 위해 만월의 아래에서 질주를 멈추지 않듯.
쉬지 않은 채로 달려서 내가 전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여 열심히 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최선이다.
즈즈즉-!
발바닥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여 틈을 찾는다.
'빈 공간이 안 보여···.'
자신의 검법 특성상 먼저 들어가기보다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받아치기 전문이라는 점도 작용한 경우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눈앞이 캄캄하다.
오라버니가 보이는 헐렁한 자세는 집중하기 전에는 분명 텅텅 빈 것 같았는데.
자세를 잡고 제대로 집중하니 이상하게 검을 찔러 넣을만한 공간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가벼운 견제로 시작할까··?'
평소의 수업과 다르게 오라버니가 선 채로 가만히 자신을 기다리기만 하니 마음에 조바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먼저 들어오라는 압박과 기색이 풍겨오니 정신이 깎여 나간다.
클로에의 발가락이 들어가냐, 기다리냐 그 이지선다에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속에서 깔끔하게 답을 내렸다.
'··참는다!'
언니와 리케가 해주었던 조언대로.
내 기반이자 스타일인 신중함을 살려 경계심을 한가득 품고 기다린다.
풍겨오는 기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매서워졌지만, 한쪽으로 확실히 마음을 먹으니 견딜 수 있었다.
시잉!
오라버니가 롱소드를 허공에 횡으로 휘둘러 자세를 잡자.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일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동결되었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았다.
"훌륭한데? 잘 기다렸어."
"···!"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담기는 건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는 감정.
대견함과 만족스러움이 깃든 미소.
가슴 속에 살랑거리는 간지러운 바람이 불어오자 클로에는 표정과 마음 모두 헤실헤실 풀 뻔했으나.
이제 시작이라는 걸 깨닫고 아랫입술이 저릴 정도로 악물어 정신을 다잡았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버티고 버티다.
아려오는 눈을 한번 깜빡이는 순간.
멀리 서 있던 오라버니가 롱소드를 들고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까앙-!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는 검을 막는 순간 클로에의 입술 사이에서 참지 못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읏··."
마나를 제대로 분배하지 않았으면 하반신이 떠오름과 동시에 자세가 흐트러져 이 일격으로 허무한 결착이 났을지도 모른다.
무릎을 구부려 낮은 자세로 중심을 잡은 클로에가 몰아치는 연격을 막아낸다.
단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흐트러짐이 끝이 되는 대련.
자신이 아니라 오라버니가 느끼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이 공세가 이어지는 순간은 눈조차 깜빡일 수 없다.
"후욱!"
근력으로 자신을 찌그러트리려 드는 검을 온몸으로 밀어낸 뒤.
그사이에 생겨난 짧은 틈에 숨을 정리한다.
항상 그러하듯 수업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오라버니의 검은 자신의 기량과 검법이 제대로 발휘되었을 때에 힘겹게 막아낼 수 있는 힘과 속도를 내재하고 있다.
집중 또 집중.
드리트나 검법에 담긴 체계를 착실하게 따르면 버텨낼 수 있다.
캉!
앞머리에서 흐른 땀방울이 눈을 따갑게 하고.
찢어진 손바닥에서 흐른 핏물이 손잡이를 타고 뚝뚝 떨어져 바닥에는 굳지 않은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었다.
리케처럼 대단한 혈마법이 없더라도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
한 손을 휘둘러 핏방울을 오라버니의 안면을 향해 뿌리자 회피와 동시에 '오!'라고 작게 감탄하는 걸 클로에는 확실하게 들었다.
'더! 더! 더! 더!'
오라버니의 탄성을 자아냈다는 점이 몸과 정신에 찰랑찰랑 남아있는 것들까지 말려버릴 불길을 지핀다.
예상도 못한 수준 높은 대련이 긴 시간 이어지며 각자 훈련을 이어가던 생도들의 시선이 점점 모여들었다.
·····
"여기까지."
"···고, 고생하셨습니다!"
맥이 다 빠져 끝이라는 말과 함께 클로에는 다리가 풀려 주저 앉을 것 같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세를 잡아 예를 보이고는 평소와 달리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서있는다.
"···."
긴장한 얼굴로 모종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클로에를 보던 로만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단속시켰다.
"다른 생도들은 교관이 하라고 한걸 끝내고 구경하고 있나?"
오라버니는 주위를 둘러보며 연습을 멈춰있던 생도들에게 으름장을 놓아 각자의 훈련에 몰두시키고 자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철컥!
거대한 손에 들려있던 롱소드가 검집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는 턱의 흉터를 긁으며 고심하던 오라버니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 결과를 알렸다.
"합격."
··
··
클로에가 고대하고 있던 실전 수업이 더없이 만족스럽게 끝나고.
매번 그러하듯 점심때는 리케, 세리아와 무리를 지어 끼니를 해결하러 나온다.
'졸려··.'
전력을 다한 끝에 찾아오는 묵직한 노곤함.
회복되지 못한 육신과 눈꺼풀 위로 잠이 쏟아져 하품을 삼키는 것도 고역이었다.
붉은 머리를 찰랑이는 작은 소녀에게 팔짱을 구속당한 클로에는 아카데미 밖으로 끌려 나와 언제나의 가게로 향한다.
"으아아~! 점심 전에 수업해서 다행이다. 오늘 밥 먹고 했으면 다 뱉어냈을 것 같아. 아까 방패로 막았는데··· 그게 어디더라?
세리아가 손을 내려 본인의 셔츠 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하자, 클로에는 그녀의 행위에 어딘가 불안한 징조를 느끼고 되물었다.
"네에··?"
"치료받아서 지금은 안보이려나? 여기 배에 엄청나게 큰 멍 들었었다?"
스륵-
졸음으로 느슨하게 풀린 클로에의 정신을 깨우는 세리아의 돌발행동.
세리아는 거리에서 본인의 셔츠를 훌렁 들어 올려 뽀얀 배를 클로에와 리케에게 보여주었고.
그 장면을 본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그녀의 옷을 눌렀다.
"세, 세리아! 여기 밖이라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요!!"
"에이~ 양쪽에 리케랑 클로에가 있는데 누가 나 같은 꼬맹이를 본다고."
마냥 활기차게 웃는 세리아를 보며 리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진짜 저 바보."
"···."
클로에도 공감한다.
물론! 리케의 발언에 동조한다는 뜻은 아니고 세리아의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세리아가 아까 내뱉은 말만큼은 깊게 공감하는 것이다.
'역시 점심 전에 수업하는 게 제일 좋아.'
오라버니가 진행하는 실전 수업은 기사 학부와 검술 학부라는 서로 다른 학부간의 수업들이 문제인지.
혹은 다른 연유에서인지 수업 시간이 때에 따라 유동적이다.
수업이 점심시간 전인 날이 있고 뒤인 날도 있지만 오늘은 점심을 먹기 전.
배를 맞거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로 구토하는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최근에는 점심 뒤에 실전 수업을 하는 경우는 드물어 지긴 했다.
'오라버니 앞에서 구토를 하는 모습만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데···.'
혹여나 점심 뒤에 실전 수업이 있으면 가볍게만 먹다보니 아직 그런 적이 없지만.
그 최악의 상황은 생각만해도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기에.
자신의 경우도 세리아와 같이 점심 전으로 수업이 완벽하게 고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영양가 없는 생각,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발을 재촉하여 도착한 가게.
끼익-
굳이 어디라 정하지 않고 나와서 도착한 가게에 자연스레 앉는다.
"흐흠~ 오늘은 뭘 먹지?"
세리아가 의자 위로 떠 있는 다리를 붕붕 흔들며 메뉴판을 탐색한다.
수업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세리아와 달리, 리케는 딱히 메뉴판을 보지 않고 언제나 같은 메뉴를 시킨다.
이런 모습이 겉으로 보면 평소와 같은 행복한 점심시간이지만.
한 소녀는 다르다.
클로에의 정신은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다른 세상으로 떠나있었다.
세리아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마도구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정신은 좀 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무한한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검의 갈피도 조금은 잡은 것 같고··· 성장세가 느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했구나.
"헤헤··."
오라버니의 만족스러운 칭찬 한마디에.
입가의 근육이 전격 마법이라도 맞은 꼴을 보인다.
통제를 벗어난 입꼬리는 뜬금없이 히죽히죽 올라가고.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시려고 잔을 들면 그 수면에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정신이 없어도 끼니는 먹어야 하니.
탁자를 채운 요리를 들어 어딘가로 넣긴 하는데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나 진짜 어떡하지···?'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봐도 이건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들의 주접조차 압살하는 중증 그 자체.
깊은 뜻 없이 넌지시 건넨 칭찬 하나에 외면도 못 할 만큼 마음이 술렁이지 않나.
"클로에?"
"네, 네에!"
세리아의 수다에 최대한 반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과부하가 온 머리 때문에 대답을 못 하고 있었더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옷깃을 당겨 정신을 깨웠다.
"많이 피곤해? 수업 때 그렇게 무리하더니."
"괜찮아요!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나중에 눈 좀 붙이자!"
"후후- 세리아 말대로 할게요."
합격이라는 말과 함께.
수업이 전부 끝나면 예전에 갔던 디저트 가게 앞에서 만나자는 한마디만 가볍게 남기셨고 그 이상 사담이라 할만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아쉽다고 해도 고무적인 것은 정해진 약속이 있다는 점.
그것만은 클로에의 머리에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겁게 각인되었다.
"하-! 배불러!"
"또 배 보이지마. 쫒아낼 거야."
식사를 끝낸 세리아가 배를 둥글게 쓰다듬자.
리케는 눈썹을 좁히며 주의를 줬다.
끼니가 끝나고 자연스레 넘어온 티타임.
우유를 홍차에 부어 티스푼을 드는 리케의 어깨에 세리아가 머리를 들이밀어 치덕치덕 비벼왔다.
"리케~"
"···왜?"
"이제 우리끼리는 아는 사실인데 연애 이야기 좀 자세히 해줘!"
세리아의 칭얼거림에 리케는 완성된 밀크티를 들고는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응수했다.
"그날 다 들었잖아."
실제 세리아의 목적은 연애담의 궁금증 보다 리케가 자신들의 앞에서는 평생 보여주지 않을 부끄러운 표정을 한번 꺼내보는 것이지만.
클로에는 그와 정반대로 흥미가 생겨 입을 닫고 상황을 지켜봤다.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만 들었고 세부적인 내용은 부족했어! 클로에도 말은 안하지만 궁금해 할껄?"
"···클로에가?"
리케와 세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