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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75화 (175/250)

Chapter 175 - 거저 주는 기회.

필립은 늘 그랬다.

이 감각이 너무 싫다.

자신이 태생부터 고위 귀족이었다면 느끼지 않았을 실로 거지 같은 기분.

며칠 전까지 양손으로 주무르던 창부의 젖가슴과 입에 쑤셔 넣던 기름진 음식들과 술은 어디로 갔는가.

'염병한다··· 날씨는 왜 이렇게 좋아?'

이제 좋은 날은 다 가버렸다는 걸 실감하면 긍정적인 모든 게 시비를 거는 느낌이다.

행복했던 시간을 다시 되찾기 위해 죽어라 뛸 시간이라고, 현실에서 발을 돌리고 싶은 머리에 확실하게 박아넣을 때다.

업무를 겸하여 두둑하게 지원받은 돈으로 혼자만의 휴식도 즐기며 바깥을 떠돌던 필립은.

투자한 시간에 비해 나쁘지 않은 결과를 들고 수도로 돌아와 발을 바삐 움직였다.

아카데미 정문에서 품을 뒤져 가문의 사용인이라는 증표로 발급해준 물건을 꺼내서 보인다.

여기서 경비를 서는 자들은 사용인들에게 친절하다.

각자가 귀족이라는 배경을 업고 있어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처지가 비슷한 자들이니 이해를 하는 것이다.

"고생들 하시오~"

매번 웃으며 반겨주는 경비들과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필립은 아카데미 내부로 들어와.

아직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거리를 걸어 기숙사로 향했다.

목재로 만든 난간조차 사치스러운 무늬가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올라 목적지에 도착.

좌우로 고개를 돌려 한적한 복도를 확인한 필립은 방문을 두들겼다.

똑- 똑똑- 똑-

"···."

노크해도 답이 없는 건 익숙한 상황.

실험에 집중하는 상태일지도 모르니 괜히 연달아 두드렸다가는 화풀이를 당할지도 모른다.

복도에 멍하니 한참을 기다리며 문을 두들겼다가 기다려 보고 그 행동을 반복한다.

어떤 답도 들려오지 않아 손으로 문을 슬쩍 열었더니 저항 없이 열린다.

끼이익-

"도련님?"

아이작이 있어야 할 기숙사가 비어있어 필립은 심히 당황했으나.

방 안에 둔 메모 덕에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상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 머리를 비우고 오라는 곳으로 간다.

벌레처럼 바글거리는 인파를 역행하며.

저벅-

발을 멈추니 수도의 정중앙.

고개를 들자 목이 뻐근해지는 고급 여관이 보이는데 이게 숙박시설이라는 것도 필립은 지금 알았다.

"이야~ 나도 이런 곳에서 한번 지내보고 싶네."

역시 돈이 썩어나는 가문의 장남.

미리 기별을 뿌려둔 것인지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제일 위층으로 안내해준다.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지 않고 목소리로 먼저 자신을 알린다.

"도련님. 저 필립이 돌아왔습니다."

"타이밍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허락을 받고서야 방을 들어가자 연구 물품 하나 없이 책 한 권만 덜렁 놓여있는 탁자에 의문이 들었다.

'연구에 미친 놈이 책 하나밖에 없어? 거기다···.'

절대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지만 지금 아이작의 눈은 선술집에서 자주 보는 그놈.

흔히 사팔뜨기 같은 눈의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기이한 감정을 품고 웃는 아이작에 소름이 돋아 필립은 눈을 급하게 깔았다.

"내 눈으로 시선이 가는 게 들키다니. 일 잘한다는 필립도 감이 죽었나?"

"죄, 죄송합니다!"

뭔가 좋지 않은 분위기를 빠르게 읽은 필립이 고개를 박자 아이작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큭···! 내 꼴은 로버트에 비하면 선물이자 정령의 장난 정도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한탄을 닮은 혼잣말이 넓은 방 안에 늘어졌다.

변방에 있으며 귀를 닫고 있느라 이제 알게 된 사건들에 필립의 머리에 연달아서 당황스러움이 강타했다.

'귀족을 노리는 살인자에 당해서 잡지도 못 하고··· 수도에서 언데드?! 이 미친놈이 농담을 할 성격은 아닌데?'

어쩐지 수도의 정문부터 과할 정도로 검사를 하고 시끄럽다 했다.

상황만 들으면 자신이 한 50년은 자리를 비운 것 같지 않나.

주절주절하던 아이작은 한순간 말을 딱 끊어버리고 눈썹을 모으며 필립에게 시선을 보냈다.

"···지나간 이야기는 해봐야 기분만 더럽군. 그래서 일은?"

이제야 자신의 성과를 뽐낼 구간.

필립은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연관성이라고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자들을 모았습니다."

"절대 상처나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건 명심시켰겠지?"

혹여 이번 일이 얽히고 엉켜서 아이작의 꼬리가 살짝 보이더라도.

에클레어 드리트나라는 철퇴를 직접적으로 맞고 싶지 않다면, 클로에를 티끌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의지를 꺾는 게 이상적이다.

가족이라는 고리는 결국 귀족에게 자존심.

적발된다면 자매의 사이가 어떻든 5기사의 입장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철두철미 해야 한다.'

아이작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클로에 드리트나의 소심함이 이번 일의 열쇠.

그리고 기사 학부에서 필기에 비해 낮은 실기 성적은 그 상황을 만드는 게 쉬이 가능해 보였다.

"물론입니다. 실력은 아카데미 생도 중에서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무난히 제압할 만큼은 되고. 작은 마을이나 영지에 터를 잡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다 보니 자신감만은 제국을 호령하려 하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만났던 한놈 한놈 모두 짜기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실전을 모르고 온실에서 곱게 자란 귀족 애송이들 정도는 상처하나 없이 우습게 무력화 시킬 수 있다며.

마주하는 입장에서는 그 자부하는 머리통이 제일 불안하기 마련.

실력 차가 있어도 방심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치명적인 독성으로 작용하는지 알기에.

필립은 이 여자에 미친 도련님이 나서기 전에 몇 놈의 목은 날아가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

"오늘 실전 수업은 ㅡ."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로 강당을 울리면서 시선을 옮기다 먼저 리케와 눈이 마주친다.

교단에서 어정쩡하게 해결하느라 쌓여있던 정을 리케의 안에 가득 쏟아내고 클로에에 대해서도 필로 토크를 깊게 나누었다.

세리아는 나와 리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인지 참 알기 쉽게 복잡해 보였고.

클로에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홍조를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한다.

'미치겠네.'

평소라면 '클로에는 여전하구나~' 라 했을 사항인데.

풋풋하고 애틋한 마음이라 의식하고 보니 저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많은 생각과 책임감을 느낀다.

현재 클로에에게 내 말은 에클레어의 목소리만큼 큰 울림을 가질 것이다.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짐작이 가능하다.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뚫고 품게 된 감정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을 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농담이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이성을 진지하게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당장은 둘의 말대로 모르는 척이 제일이긴 한데···.'

에클레어와 리케의 의견은 나도 공감하는 바.

클로에의 입장에서 내가 티를 내는 순간 어디로 튀어 나갈지 예상이 안 된다.

그걸 빌미로 내게 밀고 들어올지 아니면 부끄러움에 아주 멀리 도망가 버릴지.

때에 따라 과감하다는 클로에의 특성이 발동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도박이다.

하지만 이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두면 상황에 진전이 생기기는 할까?

나도 클로에 드리트나라는 동생이 아닌, '여성'을 더 알기 위해서는 기회와 시간이 필요했다.

····

"바깥이 시끄럽다고 해도 수업은 다를 게 없다."

최근 언데드 사건으로 몇몇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영지에 돌아가 빈자리가 다수 있었지만.

합당하게 공결처리가 되는 것은 로버트 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

가문의 장남 같은 인물들은 아카데미의 성적에 문제가 생겨도 안전이 우선.

아직은 교단이나 제국의 대처를 더욱 보려고 할 수 있다.

"명심해라. 인원이 줄어도 생도들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제국에 큰 사건들이 있다 해도 1학년 생도들이 할 일은 변함없다.

자신을 갈고닦아 성장 또 성장하여 연방국을 찍어누를 강력한 제국을 위한 기반이 되는 것.

이들 대부분이 세세한 지적과 개선의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절실한 시기이기에.

실전 수업은 여전히 개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수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었다.

쨍!

실전 수업 중에는 병장기들이 부딪히며 연신 쇳소리가 울린다.

"클로에 드리트나 생도. 집중해라."

"네, 네에! 죄송합니다··!"

겨우 일주일 전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클로에는 수업에 항상 열심히 참여한다.

하지만 진지하게 잘하다가도 눈이 마주치거나 검을 맞닿아 가깝게 붙으면 집중이 깨지는 게 눈에 보인다.

억지로 이어가던 합을 멈추고 거리를 벌려 그녀를 보며 물었다.

"몸이 안 좋나?"

"아닙니다··!"

시무룩하니 살짝 기가 죽은 클로에를 보며 나는 마나를 이용해 주위에 차음을 위한 막을 둘러냈고.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음이 완성되는 순간.

클로에는 익숙한 마나의 움직임에 고개를 번쩍!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대단한 범죄를 저지르다 들키기라도 한 죄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몸이 안 좋은 건 정말 아니지?"

"네에··· 죄송해요."

"클로에가 왜 집중을 못할까?"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하는 클로에를 보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다.

이유를 알면서도 이렇게 묻는다는 게 참으로 못 할 짓이라는 생각도 들고.

팍-!

롱소드를 바닥에 쑤셔두고 어쩔까 고민하던 나는 다소 억지스러운 수를 떠올렸다.

"클로에. 머리가 복잡하거나 기분이 안좋을 때는 단 걸 먹으면 좋다더라."

"···."

"모험가만 봐도 알듯이 물질적인 보상이라는 건 때로 목숨을 걸만큼 최고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 클로에가 오늘 수업을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디저트나 먹으러 갈까?"

내 말에 푸른 눈동자 속에 투명한 욕망을 품은 클로에가 급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그건··! 저번 약속과는 별개인가요?"

"저번 약속?"

클로에가 묻는 말에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떠오르는 사실이 없어 결국 질문에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어, 오라버니와 식사를 하고 골목을 지나서 가려다 가지 못했던···."

우물쭈물 거리며 내용을 꺼내는 클로에가 말하는 시간이 정확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당연히 별개지! 그걸로 퉁치면 속 좁은 남자가 되잖아."

꾸우욱.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클로에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후우···."

호흡을 한번 길게 뱉어낸 클로에가 자세를 잡자.

방어적인 검술이 가지는 특유의 묵직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그 모습에 나는 바닥에 박혀있던 롱소드를 들어 올렸다.

"이제 기대해도 되는 거지?"

당장 눈에 모래가 들어가도 깜빡이지 않을 것 같은 소름 돋는 집중력.

클로에가 평소보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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