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4 -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으음···."
클로에에게 침대란 휴식이 아니라 고뇌를 위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최근 겪는 기현상으로.
같은 꿈을 생생할 정도로 반복해서 꾸게 되었는데.
항상 친구가 던져주는 마지막 한 문장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꿈은 끝을 맺게 된다.
꿈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무죄! 거기에 아무도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실제 꿔보고 싶은 꿈은 따로 있었지만···.
꿈이라는 게 본인의 의지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 이 현상이 언제 끝날지 막연히 기다릴 뿐이다.
"하아암~"
그 꿈을 꾸는 게 두렵지는 않지만, 매번 많은 생각을 강요하는 터라 마주하는데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불편함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제 진짜 졸린데···.'
클로에의 푸른 눈이 총명함을 잃고 멍하니 풀리며 스르르 내려가더니 자신만의 세계로 의식이 넘어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신과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침대와 일체화를 하는 순간.
침실에 있던 자신은 사라지고 어느덧 자신은 검을 들고 저택의 연무장에 있었다.
"···."
오라버니가 교단에서 지내게 되고 언니의 권유에 따라 리케가 저택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그녀는 언니가 자리를 비우거나 저택에 없을 때 자신과 훈련을 함께 하기도 했다.
가문에서 정식으로 검법을 배운 자신과 달리.
리케는 체계화를 버리고 감각과 센스에 치중하여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취하는 유동적인 공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념과 주제, 중심은 들고 있는 흉흉한 대낫과 오라버니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리케의 방식에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상황에 따라 움직임에 변동을 주는 자유로운 방식은 설명만으로는 완벽해 보이나.
잠결이나 무의식중에 휘두를 정도로 자세를 몸에 정착시키기 힘든 단점이 존재했기에.
훈련량은 체계가 이루어져 있는 덩어리보다 많은 양을 요구한다.
그 점을 만회하기 위한 훈련을 따라가던 클로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힘내서 해왔던 훈련이 전심전력이자 최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케의 무표정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매서웠지만.
육신의 피로는 머리에 찬 헛바람을 줄이기에 적격이라 아득바득 클로에는 리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마무리는 대련.
실전 수업에서 그녀가 보여주던 경이로운 봉술은 저 거대한 낫을 다루는 기초에 지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 상대해보는 무구는 까다롭고 예측이 힘들었고.
방어적인 클로에의 검법은 빠른 속도로 수세에 몰려 방어를 풀고 공격으로 전환할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 아델의 페르소나 - B ]
▷가면 아래에 인격을 창조합니다.
▷스킬 발동 중에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스킬 발동 중에 상태 이상 내성이 상승합니다.
이 이상을 위해서는 아낄 필요도 없었다.
철컥-!
검은 장미를 본뜬 브로치에서 시작된 흑색 갑옷이 마나를 먹고 몸을 휘어잡는 순간부터 정신이 가라앉는다.
시야는 자유를 구속당하고 좁아졌음에도 머리에 쏟아지는 정보와 감각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늘었고.
몸이 가벼워지고 손아귀에서는 검의 손잡이를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는다.
"흐읍!"
스킬의 발동과 함께 클로에의 손놀림은 망설임이 사라지고 저돌적인 행동으로 연계된다.
롱소드가 번쩍 들리는 순간.
리케의 머리 위에 마나가 응축되더니 붉은 빛이 터져 나오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째앵!
바로 한 합 전과는 비교도 안 될 힘과 속도를 품은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순간.
반발력에 서로의 몸이 밀려 쭈욱 벌어졌다.
'···후.'
건틀릿 아래에 숨어있는 손목을 방망이로 내려찍은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투구 밑에 숨 쉬고 있는 클로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파박! 팍! 팍!
태양을 등지고 빗살처럼 쏟아지는 붉은 창을 굴러서 피한 뒤 흙이 뒤집어질 정도로 강한 힘으로 바닥을 차며 접근전을 유도한다.
리케와 붙는다고 확실한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
거리가 멀면 혈마법에 겨냥되어 첫 대련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것이다.
"오늘 클로에는 유독 매섭네~"
바닥에는 붉은 꽃이 피어오르고 머리 위에는 혈액으로 빚어진 왕관의 형상.
그 모습은 여신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는 둥그런 빛이나 훈륜과 같은 테두리를 흉내 낸 것 같기도 하였으며.
기품만은 어딘가의 고고한 여왕 혹은 공주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문 서적을 다 뒤져도 정보를 한 줄 이상 찾기 어려울 만큼 귀하다는 혈마법을 견식 할 기회는 언니도 시간이 있으면 나와서 구경할 정도였으니.
검은 갑옷을 입은 클로에의 정신은 매번 다른 혈마법을 보여주는 그녀의 행색을 보며 분석을 이어갔다.
시익!
리케가 낫에다 손바닥을 그어 피를 흩뿌리고 그걸 반사적으로 넓직한 검면으로 막는 찰나.
클로에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뜨드득-
"읏···!"
검에 치덕치덕하게 묻은 피가 강제력을 가지고 검면을 잡아 반대편으로 쏘아지듯 튀어 올라 품을 열었다.
챙!
꽉 잡고 있던 롱소드가 리케의 일격에 날아가 연무장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케는 대련이 끝나자 혈마법으로 손바닥의 출혈을 지혈시킴과 동시에 품에 있는 연고를 꺼내 발랐다.
얼굴의 흉터를 제외하고는 매번 몸 관리에 신경을 기울이는 게 그녀다웠다.
"매번 그렇지만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몸놀림까지 빨라져서 분명 대단하긴 한데···."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한다."
스킬의 영향으로 평소와 다른 어투에도 익숙해진 리케는 신경 쓰지 않고 생각을 이어갔다.
지금 자리에 없는 세리아까지 포함해 3명이 각자 스킬을 보여주고 공개하였기에 틈이 생기면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생겼다.
유대감도 깊어지고 서로의 비밀을 안다는 친밀감까지 늘어나 그녀들의 결속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설명대로라면 클로에가 원하는 성격이나 품격으로 바꾸는 거지?"
"그렇다."
악의 없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클로에는 쇳소리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를 만큼 열이 오르고 땀으로 푹 젖어 턱선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서로의 표정만은 몸 상태가 어떤지 내색하지 않는다.
"일면식이 없는 상대에게 박자에 변화를 줘서 변수를 창출하기에 좋다고는 생각하는데. 이 느낌을 뭐라 해야할까···."
리케는 사용이 끝난 낫을 어딘가로 숨기고는 떨어져 나뒹구는 자신의 검을 주워들었다.
빙글- 검을 회전시켜 날부분을 잡고는 손잡이 부분을 자신에게 건네준다.
"망설임이 죽으면서 빠르고 강해진 검은 분명 까다롭지만 내 견해로는 스킬을 사용하기 전 신중한 클로에가 더 상대하기 어렵거든. 결착이 나는 시간만 봐도 거짓말이 아니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친우의 진지한 화두가 머리를 울린다.
"클로에는 스킬로 자신의 인격을 바꾸고 싶을만큼 지금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거기서 세상이 소용돌이치듯 뒤틀리며 꿈은 끝이 난다.
··
··
원래는 이 뒤에 언니나 오라버니에게 상담받아보는 게 어떠냐는 말도 존재했지만.
항상 꿈은 이 지점에서 끝이 난다.
반복되는 꿈에서 눈을 뜬 클로에는 침대에서 상반신만을 일으킨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제 도시락을 만들 일도 없고 자신이 무의식 중에 교단에 들릴 일도 없다.
"헤으우···."
그녀가 회피하고 있는 마음을 마주하도록 강요하는 복잡한 생각들에 마른세수를 반복하게 한다.
더는 잘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클로에는 간단한 준비를 끝내고 주방으로 향했다.
"언니~"
"도시락 준비가 없으니 더 자도 괜찮은데 오늘도 일찍 일어났구나."
겨우 며칠 만에 익숙해진 이른 시간.
잠에서 깨어나 내려가면 항상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있는 언니와 아침을 준비하고 먹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리케가 돌아갔고 자신도 언니를 도와 요리를 깔짝깔짝 배워보고 있다는 점.
오라버니와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리케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행복해했다.
화목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회상하고도 어째서인지 거북하고 울렁이는 감각에 클로에의 머리는 강제로 주제를 전환했다.
'언제 언급해봐야 좋을까.'
클로에는 에클레어와 아침을 먹으면서도 정신은 다른 쪽으로 가있었다.
제국에 터진 사고로 무산되었던 디저트 가게.
이제 오라버니와 둘이 있을 수 있는 타당한 명분은 이것 하나만 남아있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지도 모른다.
상호 간의 구두로 이루어져 있는 약속.
뚜렷한 형태조차 없는 무형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말하면 같이 가주시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도 모르지만.
클로에에게 로만은 시원하게 웃으며 부탁을 받아들이고 동행해주리라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
합법적인 기회.
이 기회는 감정을 꾹꾹 눌러 더는 무리라고 생각될 때까지 아끼고 또 아끼고 싶었다.
사용하면 당장 시간이 끝나고 헤어지는 순간부터 뼈가 시리게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인간이라는 욕심쟁이는 지금을 참고 견디며 풍족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숨 쉬고 있는 현재가 제일 즐겁기를 바라지 않을까.
"클로에."
"으,응?"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생각을 하느라 우물거리던 입과 손을 멈추고 있었더니 언니가 날카롭게 물어왔다.
"아니··! 아무것도··!"
에클레어의 물음에 클로에는 부스스한 머리를 붕붕 뽐내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하거라."
"응···."
언니이기에, 가장 가깝기에,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속에 품었다는 게 너무 큰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선은 넘을 생각이 없다.
나에게는 언니가 제일 소중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만을 양식이자 보람으로 살아가는 한명의 교인처럼.
자신은 그저 간단한 망상만으로도 코피가 터질 것 같으니 상상만으로 충분하다.
'일단 오늘은··.'
오라버니의 실전 수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 하루를 버틸 기대감과 여력은 충분하다.
끼익.
후우우웅-
저택의 문을 열고 나서자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풀려있던 정신을 날카롭게 벼린다.
"···아."
그냥 미치겠다.
이게 도대체 뭘 하는 꼴인지.
정확히 무엇을 원하고 어떤 연유로 이러는지 답을 알면서도 못내리겠다.
클로에 드리트나라는 무지렁이는 당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정말 이대로의 관계로 만족하며 지낼 수 있을지 앞으로의 시간이 두렵고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