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3 - 기사가 아니라 언니! -2-
"···클로에를 어떻게 생각하지?"
에클레어는 도저히 못 할 짓이라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묻는다.
'?'
동시에 내 머리를 강타하는 물음표.
말 하나에 앞뒤가 틀어막히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기서 흐름을 끊고 에클레어가 내게 던진 질문의 의도를 되물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충실히 답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인가.
천박하거나 저열함을 언급한 것은 일부러 그쪽으로 언급해달라 하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려운데?'
먹구름과 비바람이 몰아쳐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밤바다의 위에 떨어진 것 같다.
등대의 빛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는 답을 내야 한다.
"클로에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
일단 질문을 받았으니 머리로 클로에를 떠올려 본다, 그려 본다, 되돌아본다.
제국의 삭막한 현실에서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 그 자체인 순수함은 보는 사람의 기분도 정화한다.
물기 없이 갈라진 대지 위에 피어오른 푸른 새싹 같으며.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많은 악의에 겨냥되고 노출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에클레어가 원하는 감상은 이런 추상적인 것이 아닌 듯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적나라하며 여과 없는 감상을 원하고 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좋고 나를 '오라버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따르는 어린 미소녀?
도대체 세상 어떤 남자가 이 요소들을 싫어한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이쁘고 귀엽지.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아."
"···그리고?"
"해야 할 때는 똑 부러지긴 하는데 평소에 생각이 과할 정도로 많아 보여서 걱정되긴 해."
"···."
내가 즉석에서 내놓은 문장이 오답은 아닌 것 같다.
에클레어의 표정은 내 대답에 기분은 좋은 듯하면서도.
속에 품고 있는 무언가를 해결하지는 못한 것인지 썩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예 관계도 없는 다른 여자에 관해서 물었다면 외모가 어떻든 쉬이 칭찬을 입에 담지 않았겠으나 클로에는 다르다.
에클레어가 클로에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연인의 앞에서 이성을 언급함에도 부정함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말이 상대의 기분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도 아니다.
클로에를 떠올렸을때 머리에 존재 하는 그대로의 내용이기도 했고.
"더 필요해?"
길어지는 침묵에 물으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이 이상은 의미가 없겠어."
"흐음."
침음에서 침묵으로.
오늘 그녀의 행동과 감정은 무지개를 닮은 총천연색의 집합이라 할만했다.
고민, 만족, 두려움, 망설임, 긴장 등.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들이 내게 투명하게 전해진다.
말의 고삐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녀의 정신은 침묵이 길어질수록 연인의 품에서 느슨하게 늘어지니.
육신은 점점 로만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고.
목소리에서는 긴장으로 과하게 들어가 있던 힘이 빠져나갔다.
"아무리 관계가 깊다고 해도 이런 형식의 대화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불쾌하게 떠보려는 행색을 보인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 미안하다···."
나를 꾹 안으며 고개를 파묻는 그녀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니 내 가슴을 뚫을 기세로 파고들어 얼굴을 숨긴다.
"우리 키티가 왜 이렇게 귀여워졌을까~"
앙탈을 부리듯 은발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비비던 그녀는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복잡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솔직하게 다 말하겠다."
"괜찮겠어?"
"계속 이래봐야 제자리걸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하네."
에클레어도 과거에 비하면 정신적으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고 있다.
"최근 클로에가 혼자 교단에 찾아왔지?"
켕길 일은 없기에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긍정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혼자 굴러다니고 있으면 자주 왔었지. 말동무가 되어줘서 심심하지는 않았어."
리케와 함께 찾아올 때도 있었고 정말 뜬금없는 시간에 돌연 나타날 때도 있었다.
이 넓은 방에 혼자 있어 봐야 글레이프니르 말고는 상대도 없기에 정말 반갑기는 했다.
"오늘은 도시락에 들어갈 반찬을 본인도 함께 만들어보고 싶다며 처음으로 주방에서 식칼을 잡았다."
"도시락의 가치가 또 천정부지로 올랐네···맛있었어."
아름다운 여성 세 명이 아침부터 옹기종기 모여 정성을 담은 물건이라니.
같은 무게의 순금보다 비싸지 않을까.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나? 이걸 모른다고 하면 가슴팍을 깨물어 버릴 거다···."
답을 유추하기 위한 정보는 여기서 끝이었다.
에클레어에게 물려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장난칠 타이밍이 아니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만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쓰읍··.'
하지만 이쪽으로는 머리에서 가능성을 아예 닫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기에 강하다.
클로에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성과 애틋하고 풋풋한 감정교환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그녀였다.
흥미가 작지는 않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이 너무나 컸기에.
거기다!
남자가 힘과 재력을 가졌을 때 진정 추해지는 것 중 도끼병만 한 게 없다.
백금이라도 모험가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면 상대가 자신을 기피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며 선입견을 가지는 게 본인에게 고삐를 만들어 허튼짓을 막는 방안이 된다.
그 발판으로 나는 내 소문과 입버릇으로 업보를 쌓아왔기에, 리케와 에클레어를 만난 것도 기적 그 자체라 생각했고.
백작가의 차녀이자 귀족인 클로에는 아카데미에서 소문을 들었거나 언니가 걱정되어 찾아봤다면 그런 점들을 쉽게 알만한데.
나를 미래의 형부이자 가족이라 생각해 내성적인 성향을 누르면서까지 잘 따라주는 좋은 아이라 생각했다.
정작 나도 가족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상당히 모호한 감각이라 챙겨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나도 외면할 수 없다.
"설마··· 클로에가? 나를··· 좋아하나?"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쪽팔림에 열이 확 오른다.
하지만 에클레어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하다.
"본인 입으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리케나 내가 봤을 때··· 확실하지 않나 생각한다."
리케의 눈치는 타고 난 것도 있지만 스킬까지 합쳐져 기실 백단 그 이상.
에클레어만의 이야기라면 착각이라고 부정해보겠지만 리케까지 그렇다 하면 내 부정은 길이 막힌다.
여기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처법은 하나였다.
"···클로에랑 거리를 둬야겠네. 내가 너무 안일했어."
"!!!"
에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미안해. 앞으로 진짜 조심할게. 이건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다."
"로만. 자, 잠시만···! 내 생각을 좀 들어다오."
도망갈 생각 없이 자리에 잘 앉아있는 나를 다급한 목소리로 붙잡았다.
"키티? 진정해. 다 들어줄게."
멈춰있던 손을 재차 움직여 다독이자 그녀는 질식이라도 시킬 듯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미안하다···."
"자꾸 미안해하지 말고. 클로에가 아니라 나한테 폐가 될까 봐 망설이고 있는 게 있으면 그냥 속 시원하게 해도 돼."
사이가 더 없이 가까워지며 그녀의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 자연스레 읽히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상황을 축약해서. 나는 로만이 먼저 클로에에게 손을 뻗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팔자에도 없는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전생의 가치관은 현실적으로 그 이상을 상상하게 하지 않았다.
"만약 클로에가 마음을 먹고 직접적으로 다가왔을 때 이성적으로 마음에 든다면··· 나나 리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거다."
"···."
여기서 대놓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건 그것대로 미친 남자로 보인다는 생각에 일단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해줬으면 한다."
"약속할게."
내용도 듣지않고 끄덕이는 나를 보며 에클레어는 진중한 얼굴을 버리고 피식 웃더니 긴장이 한층 풀린 태세로 내게 부탁해왔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절대! 절대로··! 받아주지 마라.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나와 클로에의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에클레어가 말하는 방향은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할 결론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정쩡한 오지랖으로 저런 판단을 내리면 에클레어까지 잃을지 모른다.
"그런 짓은 절대로 안해."
"로만도 당연히 알겠지만. 강요로 떠넘겨져 책임져진 여자만큼 처량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든 타이를 것이니 절대 동정 같은 감정으로 받아줘서는 안된다."
"알고 있어. 키티도 알다시피 난 책임질 사람이 아니면 정식으로 관계를 만들지 않거든. 마음이 없는데 평생 책임질 수는 없지."
이건 서로의 쾌락을 해소하기 위해 몸만 섞는 유흥 같은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클로에는 백작 가문 차녀인 입장이다. 냉정히 혼사라 따지자면 백금의 모험가에게 보내기에는 부족하겠지. 그래도··."
"그래도?"
"사회가 내린 지위따위와 관계없이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말에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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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어의 입장에서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로만의 반응이 긍정적이니 조금은 홀가분해졌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그래도 제일 높고 큰 산을 넘은 건 확실하다.
"괜히 병문안이 아니라 속이 뻔한 목적만 가지고 온 것 같아··· 읍!"
뻔하게 예상이 가기에-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 뒤에 나오려는 말을 봉쇄했다.
"또 미안하다 하려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에클레어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붙이고 다음으로 입술을 붙이기 전.
미소를 보이며 속삭였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