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2 - 기사가 아니라 언니! -1-
"후우··· 바쁜데 이리 잡아버려 미안하다."
"아뇨. 저나 클로에보다 언니가 바쁜 거 아닌가요?"
출근 전 서재에 앉아서 리케와 대면한 에클레어는 메모할 내용은 없지만 습관적으로 펜을 들었다.
사실 당장 출근해도 할 일이 산더미지만 일이 많을수록 그 처리에는 효율과 집중이 요구되는 법.
그러기 위해서는 신경이 쏠리는 일을 최대한 해결하고 풀어둘 필요가 있다.
원래도 업무가 바빴지만, 최근은 특히나 업무강도가 심각한 편으로 출근하면 눈코 뜰 새 없다는 말이 여유로워 보일 정도.
간단히 말하자면, 일머리가 좋은 인재들을 종일 굴려도 쉬지 못할 만큼 바쁜 상황이다.
제일 큰 문제는 플로이드 영지로 교단의 인원과 제국의 기사, 마법사, 공무원들이 조사를 위해 대거 파견되었고.
그 상태에 물리력으로 구속이 힘든 플로이드의 가주는 본인의 허락하에 감시역을 다수 붙여둔 상태.
진정 자신이 결백하다면 영지 조사를 착실히 받고 수도까지 자기 발로 오도록.
그런 황명을 내려 호출하였으니 도착 후에는 개인에 대한 조사까지 이어질 것이다.
뭐··· 다 좋다.
신경을 기울이고 착실히 진행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급한 불은 끄며 해결됐지만.
정확한 맥이 잡히지 않은 미지의 사건에 긴장감이 감도는 황실은 골이 아프고 피곤하겠지.
그래도 이것들은 착실히 단계를 밟고 시간이 지나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실질적으로 이런 것들은 그녀에게 귀찮기는 해도 고민이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국의 5기사라는 이름보다 클로에의 언니라는 입장이 더욱 중요한 그녀.
그런 에클레어의 가치관에 있어 진짜 중요한 문제는 당장 눈앞에 존재했다.
"우연인지··· 전에 이런 경우를 예로 든 적이 있었지?"
리케는 에클레어의 저 한마디가 언제 어떤 대화를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나온 자신과 점심을 먹던 날.
클로에가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대화를 나누었던 게 그리 먼 일이 아니다.
질문을 받은 소녀는 비어있는 양손을 보여 결백함을 증명하며 가볍게 웃었다.
"분명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제가 뭔가를 한 건 아니에요. 대단한 힘이 있어 미래를 본 것도 아니죠."
"알고 있다.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어쩌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럼 결론을 내리셨나요?"
딱. 딱. 딱. 딱.
에클레어의 손에 들린 펜이 종이에 의미 없는 점을 찍어내며 침묵이 흘렀다.
"···나는 클로에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원한다."
직설적이지 않아도 답이 되는 훌륭한 문장에 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클로에가 행복했으면 해요."
여기서 '누구보다'라고 하지 않는 것은 한 남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녀의 고집.
그래서 에클레어는 리케의 대답에 신용이 갔다.
손에 들린 펜으로 점찍기를 멈춘 에클레어는 본인도 모를 의미불명 한숨을 뱉으며 미미하게 빛이 감도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클로에도 등을 떠밀 생각인가?"
"그건 점심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봐야겠죠."
"···."
"바쁘시면 제가 대신 갈까요?"
"아니. 이건 클로에의 언니인 내가 가겠다."
안 그래도 자신이 굳이 시간을 쪼개서 점심때 교단을 들리려는 이유를 리케는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 클로에는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이 외적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처럼 가끔 넘어서 흐르긴 해도 감정을 어떻게든 절제하려는 티가 나긴 하거든요."
동생이 혼자서 감정을 추스르며 보내고 있을 시간에 에클레어는 눈가를 꾹 누르며 생각을 거듭했다.
"클로에에게 상태가 이상하다거나 어딘가 다르다며 언질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지금보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더 힘들어할 거다."
동감하는 내용에 리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저희 모두 그렇지만 처음이고 경험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
똑- 똑-
기가 막히는 절묘한 힘 조절.
그 덩치 크고 툭하면 문을 부수려 드는 성기사가 아니다.
"으음."
단지 재미를 위해서 감각을 모두 죽여버리고.
노크 소리로 사람을 판별하는 재미를 들이다 보니.
저 단 하나의 동작에도 각자의 느낌과 성향이 묻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빨리 문을 열고 싶은데 내 허락을 기다리며 참느라 조급함이 느껴지는 노크는 리케.
망설임을 닮은 무언가와 천성이 들어가 소리 사이에 텀이 가장 긴 것은 클로에.
그렇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고 차분하면서도 손가락이 살짝 위로 올려 치는 미미한 고양감이 느껴지는 건···.
"들어와~"
끼이익-
일인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검은 제복.
기백이 느껴지게 동여맨 은발을 찰랑거리는 붉은 눈동자의 미인을 마주했다.
"키티~! 최근에 바쁜 거 아니었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저녁에도 매일 오지 못하고 잠시 얼굴만 비추고 갈 정도로 바쁘던 에클레어라 도시락만 아침에 전해주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이리 찾아오다니 이제야 업무에 여유가 찾아왔나 싶었다.
"바쁘긴 해도 밥은 최대한 챙겨 먹어야지. 모두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밥까지 굶으며 주객전도가 되면 웃기는 삶이야."
"건강하고 옳은 생각입니다~ 교단의 마지막 점심이 키티라니 이건 또 좋은 추억이네."
정말 바빠서 식사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는 그녀지만 진심이든 농담이든 저런 생각을 속에 가지고 있다면 나도 안심이 된다.
··
··
분에 넘치는 식사가 끝나고 찻잔을 든 에클레어는 맞은 편이 아니라 내게 다가온다.
"실례하지."
그녀가 뒤로 넘어갈 일은 없지만 뒤로 기댈 수 있도록 손을 허리에 뻗어주고 인사를 받아주면 마무리.
"어서 오십쇼~"
내 허벅지는 리케와 에클레어에 한해서 전용 의자가 된다.
달그락-
"···."
홍차가 반은 남아있는 찻잔이 탁자로 돌아갔다.
그걸 확인한 내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왜 그러지?'
식욕이나 기호품의 섭취, 사용 빈도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
무조건 차 한잔을 식후에 깔끔하게 비우던 에클레어가 찻잔을 그대로 되돌리는 행위에 걱정의 싹이 피어올랐다.
"키티?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다르게 딱 달라붙지 않고 무릎에 가깝게 앉은 그녀는.
무언가 생각 하느라 입을 우물거리는 클로에와 닮은 모습을 보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로만.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동화를 흉내 낸 것이나 다름없는 얼토당토않은 예시지만··."
"편하게 말해봐."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많아 보인다 느끼긴 했다.
과중한 업무 탓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쪽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나는 귀를 기울였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로만의 행복과 클로에의 행복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한다면, 난 고르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고민할 거다. 그래야만 누군가에게 생긴 불행이 내 탓이 아니게 되니깐···."
"흐음."
"가상이나 다름없는 선택지. 거기에 당사자 앞에서라도 남자가 먼저라 말해주지 못하는··· 이런 이기적인 여자라 실망했나··?"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지만,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물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가깝게 당겼다.
"하나도 이기적이지 않아. 나는 그런 솔직함까지 포함해서 사랑하거든. 그리고 그 상황에서는 당연히 클로에를 선택해야지?"
스륵-
인제야 몸을 기대며 품으로 파고든 에클레어는 내 말을 듣고 어깨를 들썩이며 행복한 얼굴로 웃다가 달뜬 숨을 내 가슴팍에 흘려냈다.
"하아- 제국 어디서 이런 남자가 생겨나서 떨어진 건지. 먼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묻지 않는건가?"
"말해줄거야? 말해주면 집중해서 듣고 아니면 다음에 해도 돼. 하기 싫으면 안해도 괜찮고."
내 입에서 나온 건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었으나.
에클레어는 조금 마음이 놓인 기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볼을 이리 상냥하게 쓰다듬지 않았을 것이니.
"···당연히 그걸 말하러 온거다. 한탄이나하며 감정을 해소하려는 게 아니야, 그 정도까지 최악의 여자는 되고싶지 않다."
"들을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으니 편하게 말해줘. 만약 도중에 마음이 바뀌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
내 눈앞.
인간미를 가득 품은 여성이 속으로 갈등을 거듭한다.
긴장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 같고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낼 것 같은 제국의 5 기사.
그런 대중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이것이 에클레어 드리트나라는 사랑스러운 여자의 본모습이다.
길게 이어지는 들숨과 날숨.
제복 아래에 숨어있는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루비를 닮은 눈동자에 보석과 같은 이채가 감돌며 각오가 전해졌다.
"내 질문에 눈치 보지말고 가감없이 솔직하게 말해다오. 단어가 천박하거나 저열해도 좋다. 내 기분따위는 절대 신경쓰지말고 정말 솔직하게···."
속에 품은 감정의 무거움 때문인지 입술이 평소보다 건조해보였다.
도대체 뭘 물어보려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지 이제 걱정이 들 정도.
부드럽고 말하기 편한 분위기로 이어가려 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도 긴장감에 전염될 것 같다.
"약속할게."
내 대답을 듣고 눈을 마주하던 그녀는 정작 말을 꺼내는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클로에를 어떻게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