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1 - 과거의 누군가를 닮았다.
구슬을 앞에 두고 엎드려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통을 박고 있는 남녀를 본다면.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우습다고 할지도 모르나.
그들의 표정을 본다면 이 꼬락서니는 도저히 웃어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실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농담이구나. 그만한 제물과 시간을 사용했는데 자료도 없고 그 손실의 이유도 확실하게 모른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에 둘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 그것이···."
-'아마도' 성녀나 교단의 행태다? 어설퍼도 흑마법사라는 것들이 추상적인 단어를 입에 담다니. 네마 나타스의 위상이 심연의 바닥까지 떨어졌군.
"···."
이스메이와 번스타인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위에 군림해왔던 지배자.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음에도 분위기가 칼날의 끝처럼 살벌하기 그지없다.
자신들이 봐도 결과가 이따위인데 무슨 말을 하여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둘은 핏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입술을 물어뜯으며 초조함의 끝을 알릴 처벌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랜만에 이 몸의 말을 잃게 하는 이 아둔한 것들을··· 두꺼비로 만들어 들개에게 내장과 근육을 잘근잘근 씹어 먹히게 해도 되겠지. 아니면 실험체들에 그 몸을 창부 겸 장난감으로 던져줘도 된다만?
"어떤 처벌이라도 내려만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드르륵-
이스메이의 간청이 전해지자 구슬이 깨질 듯이 덜덜 떨려왔고.
멀리 연결된 아티팩트에 영향을 줄 만큼 강대한 마나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뒤처리도 하지 않고 속 편하게 벌로 끝내려 하다니 실로 건방진 것들이구나. 죽더라도 편하게 죽고 싶다면 네마 나타스를 위해 투신하는 태도를 보여라.
"이 미천한 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확인하여 정보의 편린을 찾아오겠습니다!"
마나에 난리를 치며 혼자 좌우로 들썩이던 구슬이 뚝- 멈추고.
한심하고 하찮다는 기색이 듬뿍 들어간 목소리로 명이 떨어졌다.
-이해력과 지성이라곤 없는 미련한 것들··· 조사는 두 번째다. 첫 번째로 멘데스 팬타그램의 정신병자들이 인조로 만들어진 살점의 정체를 알아선 안 된다. 그것부터 명심하고 수습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지이이-
구슬이 잠잠해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스메이가 이를 빠드득 갈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바닥에서 검게 물든 손이 올라와 번스타인의 목을 틀어잡았다.
뿌득.
물리력을 행사하는 검은 손에 저항하지 못하고 번스타인이 공중에서 발을 버둥거렸다.
"크흑-!"
내리 갈굼은 양지든 음지든 제국에 자리한 절대다수 조직의 고유문화라 할 수 있다.
이스메이는 입술에 흐르는 핏물을 소매로 닦으며 번스타인을 노려봤다.
"시킨 걸 제대로 하긴 한 거야?"
"끅··· 저는 겨, 경호를 할 실력자들도 분명 대동시켰습니다··!"
물론 그녀도 수도로 향한 명단 내역을 봤기에 알고 있다. 그냥 분풀이가 필요할 만큼 짜증이 나는 것이지.
하필 그 타이밍에 수도로 성녀가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니와.
제일 예상이 불가능했던 건 레오가 타락하는 속도였다.
함정을 판 당사자가 봐도 그 변화는 당황스러울 정도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초부터 레오는 악마가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
계약서의 반응을 보고 최대한 대응을 서둘렀지만, 활자로 표현하자면 그냥 깔끔한 실패.
모든 게 엉망이었다.
쿠당탕-!
"콜록··· 커흑!"
공중에서 내동댕이쳐져 바닥을 구른 번스타인은 손자국이 진하게 남은 목을 잡고 기침을 거듭하며 바닥을 기었다.
"흥! 성녀와 함께라면 마젤라인가···하여간 무식한 년."
교단의 성기사 마젤라의 실력은 확실히 경호로 붙인 것들보다 뛰어나지만.
연락 한번 남기지 못하고 깡그리 쓸려버릴 정도로 압도적이거나 발이 미치도록 빠른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성녀라는 짐짝이 있어 자리에 성녀를 놓아주고 싸운다는 잔 동작이 필연적이라 속도가 빠를 수 없다.
'그년이 한번 나갔다 오더니 그렇게 강해졌나? 성녀가 몸이 건강해졌을리는··· 아냐 이것도 절대···.'
기록을 담당하는 흑마법사들은 반평생 이상을 교육받아 숨는 것만 해도 베테랑이라 할만한 자들인데.
그런 인물들이 비상 신호를 보낼 아티팩트 하나 못쓰고 쓸려나가다니?
대체 무슨 일인지 시작과 결말이 전혀 그려지지 않으니 두통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일단 명령대로 조사야. 수도에 연결된 귀족들과 상인들 빠짐없이 전부 찾아갈테니 준비해."
"흡··알겠··콜록! 습니다··."
"쯧! 쓸모없긴."
바닥에서 후들거리며 일어나는 번스타인을 보며 혀를 찬 이스메이는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
처음 겪는 답답한 무게감.
무엇인지 몰라도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구나.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로에는 원래부터 망상이나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그 행위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클로에가 그것들에 투자하는 시간은 평균 이상은 가볍게 넘어섰고.
지금 그것을 또 한 번 갱신하려 하고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평범한 걱정이야··걱정··걱정··.'
속마음을 확실하게 마주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불길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 마음에서 완전히 눈을 돌리기에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신경이 쇠약해지는 듯했다.
'오라버니가 단순히 걱정되는··· 분명 그런 마음···.'
하지만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이건 털어놓는 행위나 도전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마음.
입 밖으로 뱉는 순간 후련함은 찾아오겠지만 모든 걸 잃을 것이다.
매일매일 이 마음을 묻어버릴 변명거리를 찾고 용기가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속에서 키워갔다.
아카데미를 마치고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발은 자신도 모르게 교단으로 향하고 있었고.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멍하니 혼자 교단에 들린 적도 있다.
교단의 복도를 지나고 나서는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거렸지만.
자신을 보고 특유의 시원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은 행복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박한 지식과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모험담.
어버버 거리는 자신의 말을 기다리며 지켜봐 주는 눈길.
오라버니가 있는 방.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가 자신을 잡는다.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오기는커녕 점점 안으로 빠져드는 늪과 같았다.
사냥꾼이 쏘아 낸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행복한 시간은 교단에서 나오는 순간 막막한 후회와 답답함만을 불러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건 정말 미쳐가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의지에서 벗어난 머리는 다음을 어떻게든 기약하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
"···."
교단을 나오자마자 소녀의 머리는 또 오작동을 일으킨다.
당일 언데드가 쏟아지는 사건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디저트 카페.
'교단에서 돌아오시면 거길 가자고 하는건 안될까?'
이딴 생각만이 머리에 흉터처럼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그저 자신을 부드럽게 봐주는 오라버니의 시선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 이상은 원해서도 안 되고 원하지도 않으리라··· 앞으로도 지금 관계에서 만족해야 한다.
··
··
에클레어의 저택에 찾아오는 이른 아침 시간.
리케가 온 날부터 쭉 세 명이 함께했다.
매일 재료를 다듬고 과일을 넣던 클로에였지만 오늘만은 조금 달랐다.
이제 실전 수업이 코앞이라 교단의 병문안도 끝이자 리케가 저택에 있는 것도 마지막.
매일 준비하던 도시락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음?"
"나, 나도 요리해보면 안 될까? 간단한 거로!"
마지막 기회라는 아쉬움을 느끼는 동시, 클로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꾹꾹 눌러도 틈 사이로 삐져나온 감정들이 모여 이성을 이기는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
에클레어가 클로에의 말을 듣고 묘한 표정으로 리케를 한번 봤다가 멈춰버렸다.
그런 에클레어의 뒤로 보라색 눈동자가 빼꼼 나왔다.
"나랑 같이 만들어 볼래? 지금 간단한 요리만 남았는데."
"···! 괜찮으면··."
"당연히 괜찮지! 이리 옆으로 와."
쭈뼛쭈뼛 클로에가 리케의 곁으로 다가가 처음으로 식칼을 잡았다.
요리할 때는 더없이 대단한 집중력.
마무리를 하고 담아낼 때는 영약이라도 옮기듯 신중한 손놀림이 돋보인다.
도시락이 완성되자 상기된 표정을 보이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리케를 바라봤고 리케도 동시에 에클레어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점심은 내가 가지. 로만과 조금 이야기할 것도 있고."
"아! 응··."
이쪽으로 눈치가 없다 자부하는 그녀의 언니가 보더라도 클로에의 상태는 너무 알기 쉬웠다.
급속도로 시무룩해지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동생의 숙어진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오늘 클로에가 만든 반찬이라고 내 꼭 일러 로만의 감상을 받아오마."
"아니 괘, 괜찮은데···."
역시 자매는 자매인가, 방향 자체는 다르더라도 숨기지는 못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괜찮다면서도 표정에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감이 서려 있다.
말 한마디로 상태가 호전되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얼마 전의 자신을 거울로 보는 듯했다.
"그리고 리케는··· 나가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물론이죠."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케를 보는 언니의 입장은 복잡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