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0 - 왜 저러지?
여러 가지를 포기한 뒤 목표 지점을 틀어버린 로버트와 상대를 연상하며 자신의 처지에 안도하게 되는 아이작.
로프티 아카데미에서 둘에게 제공한 병결이 여유롭게 남아있는 상황에 수도로 그들이 향한 것은.
로버트는 단순히 자신의 처지와 영지에 있는 집이 싫어 밖에서 아이작을 찾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아이작은 필립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클로에에 대한 일로 머리와 몸이 급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우선시해야 할 것은 차원 실험을 속행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주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팔 하나가 끝장나 정신이 아작나있을 로버트를 꼬드겨야 하는 입장.
기사 학부 생도인 그에게 떨어진 충격으로 실험을 속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문의 든든한 지원도 있겠다.
여러 가지 미끼를 묶어 종합세트를 머리에 준비해두고 만나서 분위기를 보자는 생각으로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일단은 로버트를 추종하는 여식 무리를 찌르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아카데미로 향한 아이작은 의외의 소식을 주워들었다.
로버트도 자신을 찾으려고 병결 중 아카데미에 들렸다는 걸 듣게 된 것이다.
둘은 마주했다.
""···.""
서로를 찾다가 연락이 닿아 마주한 로버트와 아이작의 첫 대면은 인사도, 농담도 아니라 그냥 쓴웃음이었다.
개인실로 이루어진 술집에서 마주한 둘의 꼬락서니는.
사건의 당사자인 둘이 서로 보기만 해도 어이가 없어 웃길 정도로 말이 아니게 변해있었다.
어색하게 움직이는 왼손으로 술병을 잡은 로버트는 이 상황이 봐도 봐도 어이가 없는지 짜증이 섞인 웃음을 지었고.
그대로 아이작의 잔을 채워주며 자연스레 물었다.
"아카데미는 언제부터 가려고?"
"최대한 늦게 가는 게 좋겠지. 마법 쪽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수준 낮은 수업에 출석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확실히 아카데미 수업은 쓰레기에 야만적이기 그지없지··· 그딴 걸 교육이라고 하고 있으니."
전보다 부정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로버트를 보며 아이작은 탁자 밑으로 오른 손목을 잡아 멀쩡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느껴보았다.
'만날 때마다 눈 하나로 끝난 건 정말 여신의 축복이자 자비였다는 생각이 드는군.'
말로이 백작가의 마법사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우스운 꼴이지만.
행운이라는 불확실한 수치가 존재한다면 자신이 로버트보다 높다는 걸 확신했다.
만나자마자 술을 들이부으며 자조적인 한탄과 상황으로 공감대를 구성한 둘이지만.
로버트는 최근 극심해진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애초부터 취기를 풀 생각이 없었고.
반대로 아이작은 마나로 상태를 조절하며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아이작."
"음?"
"그런 상태에서 물론 정신적으로 쉽지 않겠고. 내 이기심이 들어간 억지스러운 요구라는 것도 알지만··· 실험은 재차 속행했으면 하는데."
로버트의 말을 들은 아이작은 꿈이 아닌가 몇 번이고 입 안에 있는 혀를 깨물어 확인한 뒤 속으로 행복의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꺼림직한 용건을 본인이 먼저 부탁이라며 꺼낼 줄이야.
로버트가 필요하니 실험에 협조를 요청하며 허리를 굽히고 저자세로 들어가야 하는가?
그렇게 필요성을 어필하는 건 잃을 게 많은 도박수에 가까웠는데.
아이작의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고 있던 것이 한 번에 해결된 것이다.
'덥석 물면 안 된다··!'
뜬금없이 빛이 쏟아지는 길이 열렸다 해도 아이작은 무작정 뛰어 들어가지 않았고.
자신이 도와준다는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이작은 로버트에게 거래라는 형태를 확실하게 보여주기를 택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번에 내 일을 진행하고 다음 실험을 속행하는 게 맞지 않겠어? 애초부터 그런 약속이었잖아."
로버트는 술잔을 쭈욱 들이켜 비우고는 몸을 푹신한 소파에 눕혀 반쯤 포기한 어조로 백기를 들었다.
"마음대로~ 난 지불한 게 있으니 놀면서 기다리기만 할 거야."
*****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세리아가 지루할 수도 있지만 클로에 때처럼 일단 내 어린 시절은 ㅡ."
리케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과거를 마치 타인의 일인 양 표정과 감정을 죽인 채 늘어놓았다.
이건 걱정하지 말라 해도 걱정을 할 수밖에 없고.
어째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 내용들이었지만.
묵직한 내용을 본인이 저리 싱겁게 이야기하니 자신이 호들갑 떨 수는 없었다.
"···."
그냥 묵묵히 눈을 마주하며 들었다.
속에 있는 어둠을 토해내서 리케가 조금이라도 개운해지기를 바라며.
"1학기 때 비가 홍수라도 낼 것처럼 오던 날 기억해? 그날 교관님한테 내가 자진해서 ㅡ."
리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며 분위기가 변해갔다.
그 일들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교관님과의 인연을 언급할 때는 전염성이 있는 따뜻한 행복과 낙관주의적 기운을 발산했다.
자신이 걱정하지 않게 행복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첫 만남과는 대조되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여줘서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상상이 안 가는데···.'
연인이라 하지만 둘이 있으면 어떤 그림일까?
세리아가 봐도 실전 교관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구보다 정확한 리케의 안목을 믿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여자에 관해서 소문과 잡음이 있는 사람이니.
그게 유일한 걱정이라 하면 걱정일까.
'아으··· 언니한테 사실을 말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실전 교관님과 친구의 관계를 듣고 놀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리케가 뜬금없이 자리를 비운 타이밍만 봐도 함께 모험가 길드에 들린 이후니, 어딘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실전 수업을 할 때에 미미하지만 고조되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리케를 평소와 다르다 느끼기도 했기에.
그 덕에!
오늘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의자를 넘어뜨리거나 기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 그걸 듣는 것 만으로 주위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항상 생각했었어."
"음···이해할 수 있어. 나라도 그랬을지 몰라."
세리아도 내용을 들으면서 주위를 몇 번이고 확인할 정도의 것들이었다.
귀족이라 해도 변두리에 있는 남작 가문과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이름이 있던 후작 가문.
'같은 귀족인데 세상 자체가 달랐구나···.'
세리아는 고위 귀족이라 해도 기껏해야 돈 좀 많고, 맛있는 거 배터지게 먹고, 집 좀 무식하게 큰 게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상상을 넘어서서 영문도 모를만큼 잔혹했다.
같은 귀족이라는 범위 안에 있으면서 생각 자체가 달라도 완전히 다르구나.
"이번 일은 세리아와 클로에는 알고만 있고. 위험하니 뭔가 하려고 하면 안 돼."
"···."
결국 사실을 알아도 뭔가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 세리아의 입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잡고있던 손을 움직여 튀어나온 세리아의 입을 살짝 잡은 리케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나한테도 앞으로의 생각이 있으니 그냥 믿고 지켜봐 줘."
"읍!! 으븝!"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피해를 보거나 다치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아."
··
··
가게에서 나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
세리아는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기에 리케는 불안했다.
"진짜 내가 그렇게 좋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이며 재차 확인하는 세리아의 행동에 리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까 말했잖아···."
그녀의 말투에서 세리아는 직감했다.
이거··· 오늘 이후로는 절대 안 받아주겠구나!
반대로 말하자면?
오늘은 자신이 뭘 해도 어지간하면 다 받아주는 특별한 날!
달라붙어도 평소와 다르게 받아줄 거라는 느낌에 리케와 팔짱을 끼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여자라는 생물은 알면서도 감정을 확인하고 또 듣고 싶은 그~ 확인과 승인 욕구로 이루어진 달콤한 무언가 아니겠어?"
진지한 얼굴로 문장을 곱씹던 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나도 욕구는 그런 쪽이 크니까."
세리아는 자신의 의견에 타당성을 부여받자 씨익 웃으며 리케에게 재차 물었다.
"리케는 내가 좋아?"
"···응."
"그게 아니라 아까처럼 말로 제대로 해줘!"
"···."
보라색 눈동자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치고 올라왔지만 혼내거나 한숨을 쉬지는 않는다.
세리아는 그 점이 즐거웠다.
"리케 잠시만!"
"왜?"
자신이 걸음을 멈추자 리케도 팔짱에 엮여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한번 안자!"
"···?"
돕지 못한다면 위로 겸 한번 안아주고 싶다!
그리 말하니 한숨과 함께 허락해줘 세리아는 처음으로 리케를 안아봤다.
클로에가 압도적인 부피로 몸에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을 닮은 부드러움이라면.
리케는 품에서 도망칠 준비를 하는 고양이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봄바람이 스며든 꽃다발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하면 말만 해. 언제든 안아줄게."
"···생각해보고."
떨어지고 나니 반대로 자신이 위로받고 힐링이 된 것 같았지만 리케 또한 그리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팔짱을 열쇠 없는 자물쇠처럼 풀지 않고 아카데미로 향하자 둘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잡혔다.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소녀.
"클로에에에-!!!"
멍하니 아카데미 정문에 서 있는 클로에를 세리아가 목청껏 불렀다.
세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키는 순간부터 리케는 행동을 읽기라도 한듯 귀를 막고 있어 참으로 기묘한 그림이었다.
"아··· 두 분."
평소 이렇게 세리아가 클로에를 부르면 놀라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과 동시,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놀라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다가온다.
헌데 오늘은 반응이 달랐다.
소리를 듣고도 두박자는 느리게 천천히 고개를 돌린 클로에는 자리에서 어딘가 풀린 눈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술에 취하기라도 한것 같은 클로에의 상태에 리케와 세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클로에가 왜 저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