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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69화 (169/250)

Chapter 169 - 소심한 소녀의 감정은 불꽃

오후 수업에는 정말 열심히 움직여야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게 하는 점심이 끝나고.

옆에 있던 정체불명의 통이 탁자의 중앙에 자리했다.

오라버니가 언니와 리케를 위해 준비한 통은 두 사람에게 공통 분모가 되는 홍차였다.

구입 전에 시음용으로 받은 것이 있어 직접 차를 우려보고 싶다며 오라버니는 주전자를 잡았다.

거대한 체구에 비해 아담한 컵과 주전자를 들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모습.

편하게 있으라 했지만, 자리에 앉아 보고만 있는 클로에의 마음은 안절부절못하고 날뛰었다.

쪼르륵-

"요즘 연습은 하고 있는데 잘 우린 건지 모르겠네."

차를 우리는 백금의 모험가라니 독특함을 넘어 그 이유가 투명하여 더욱 신기했다.

"감사합니다···!"

딸깍.

찻잔을 들고 향을 느낀 클로에는 속으로 몇 번이고 감탄사를 나열했다.

차를 잘 모르고 주는 것만 마시던 자신마저 쉽게 연상할 만큼 갖가지 과일, 꽃나무의 상큼한 향이 나니.

받는 사람은 필히 기뻐할 물건이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커피만 마셨었는데 버릇이 드니 식후에 차도 괜찮더라."

그건 리케의 영향일까? 아니면 언니? 어쩌면 둘 다?

"저도 언니 덕에 조금은 교양이 생긴 것 같아요···."

곧 아카데미에 돌아가야 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오라버니와 순수하게 즐기고 싶었으나.

로만이 교단의 신세를 지게 하는데 자신의 죄가 있다 여기고 있는 클로에.

그녀는 독립된 이 공간에서 푸른 눈동자를 들어 로만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예의 없게 시선을 옆으로 돌릴 수는 없는 법.

살짝 고개를 내려 목이나 가슴 부근으로 눈을 향하고 있으니 살점이 파이고 물길처럼 트여서 굳은 흉터들이 보였다.

모험가의 삶은 한 발짝의 거리도 되지 않는 바로 아래.

그림자에 죽음을 담고 다닌다고 들었다.

지워지지 않는 피부의 상처는 생존에 대한 일기장이자 처참함과 처절함에서 떨어지는 전리품.

단순한 자상만이 아니다.

집중하면 피부가 변색 된 화상 자국도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저 중에는 자신이 기여한 바도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통증이 없다고 상처는 단순히 끝나는 게 아니다.

클로에만 해도 그렇다.

처음 검을 들었을 때 아려오는 고통을 아직 잊지 못한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났고 손가락 마디에는 물집이 잡혔다.

식사할 때 손이 덜덜 떨려 부모님에게 혼이 나 억울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언니만 눈치채서 약을 발라 줬었지···.'

밤에 연고를 들고 찾아온 언니가 없었다면 자신이 검을 계속해서 잡았을까.

연고의 효과는 기적이라 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으나 그날 있었던 시간은 자신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되었다.

검을 휘두른 다음 날은 더 아팠고 그다음 날은 검을 잡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애꿎은 금속 덩어리가 원망스러워 방에 돌아오면 검을 걸어두지 않고 보이지 않게 침대 밑에 넣어두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날들의 끝에.

정신을 차리니 훈련을 끝내고 좋아하는 책을 볼 체력이 있었고 검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게 되었다.

돌아보면 이것은 고단함과 통증에 대한 익숙함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중요한 무언가가 깎이고 도려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 정신적인 고통이 최고로 무섭다고 하지만 물리적인 고통 또한 지워지지 않는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해도 끝이 아니며 그건 사람을 무디게 하는 발판이 된다.

그렇기에 매일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소중한 사람들을 보면 클로에 자신이 되려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크다고 생각했던 상처를 가벼이 보게 되고 몸을 점점 과감하게 사용하는 행위.

통증과 상처에 무감각해지는 그 모습은 다들 멋있고 하나의 경지라 찬양하지만, 클로에의 눈에는 슬프기만 했다.

"오라버니··· 몸은 정말 괜찮으신 거죠?"

금일은 처음이지만 사건의 당일에 이 질문으로 몇 번을 물었던지.

정신이 없고 혼란했던 그날에는 내가 돌아봐도 질색하고 귀찮을 정도로 질척거리며 확인을 했지만 불안함은 아직도 지우지 못했다.

그 질문의 답은 항상 가볍고 웃음기가 섞여 돌아온다.

"진짜 멀쩡해."

인간은, 모험가는, 기사의 가치는 무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오라버니가 말씀하셨지만.

이 제국에 진짜 필요한 인물이 누구인지 자신만이 아니라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오라버니··· 부탁드릴 게 있어요."

"응? 편하게 말해."

리케와 교단에 앉아 있을 때 부터 줄곧 해왔던 생각.

클로에는 아직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과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한 마음을 가진 소심한 여자다.

때에 따라 돌발적이고 과감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 안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클로에는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이 얼어버린다는 경험을 해버렸다.

그 순간에 의무인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오는 남성에게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넘어 많은 것을 느꼈다.

'언니가 있었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겠지···.'

오라버니나 언니에게 자신이라는 존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는 저번과 같은 일이 있어도 저를 무리해서 감싸주실 필요는 없어요·· 무, 물론 이번의 은혜는 평생을 감사하고 갚으며 살겠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딱딱해진 오라버니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확실하게 비쳤다.

"···이유를 들어보자. 어째서?"

"저는 ··· 그ㅡ."

클로에 드리트나라는 존재.

그것이 고결한 누군가에게 찾아오는 희생에 대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매번 주위에서 자신을 누구보다 소중히 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 결심이 서지 않는 유약함.

속에 있는 마음을 토해낼수록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어쩌면 이 말을 함으로 상대에게 위로받고 싶어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역겨움이 치솟았다.

원래도 말에 재주가 없는데 이번은 절망적일 정도로 엉망이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래도 끝까지 하고 싶은 말과 속에서 정리해왔던 생각을 꺼낸다.

엉켜버린 말을 어떻게든 뱉어내고 고개를 들자 방 안의 침묵이 무겁게 깔렸고.

말하고 나니 사고를 쳤다는 생각이 문득 찾아왔지만 일단은 답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작은 소음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클로에."

아카데미 수업에서나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를 일상에서 듣자 긴장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네에··!"

이마를 시원하게 보이며 검은 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에 숨이 멈췄다.

기껏 구해줬더니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예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기에 유쾌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 예상했다.

미리 그림도 그려봤고 혼날 거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분명 그랬는데···.

현실에서 오라버니가 막상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표한다면?

막상 눈 앞에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상상과 다르게 손이 덜덜 떨려왔다.

"확실히 말 몇마디로 가치관을 바꾸기 힘들다는 건 알아. 긴 시간 자신의 생각으로 지내왔는데 남이 어떻게 하라 했다고 단번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다? 그랬다면 애초에 인간에게 깨달음이니 고찰이니 하는 단어들은 존재하지 않았겠지."

"···."

"쓰읍-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턱에 있는 흉터를 긁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탄스러운 숨을 뱉어내는 모습에 클로에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기적으로 입을 닫고 있는 자신에게 오라버니는 진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꺼냈다.

"클로에. 만약 대낮에 길을 가다가 골목을 봤는데 마나 한점 없는 노숙자들이 여자를 겁탈하고 있는 걸 봤다고 치자. 어떻게 할 거야?"

"도··울거라 생각해요."

"그럼 클로에가 봤을 때 나는 어떨 것 같아?"

"도우실 거라고···."

검은 머리가 좌우로 찰랑이며 부정을 표현하고 그려낸다.

"장담은 못 해. 확실하게 구해줄 힘이 있지만 관계도 없는 사람을 돕는 건 내 기분에 따라 다르겠지. 만약 나섰다면 구해주기보다는 악행을 빌미로 강간범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지도 몰라."

로만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뒷말이 이어졌다.

"진짜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죽이려 든다면 최소 불구.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뒤가 귀찮을까봐 서슴없이 목숨을 빼앗는 일도 흔하게 선택해왔어."

"···."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필요 이상의 과한 처사로 화풀이나 하는 쓰레기지."

앞의 길었던 서사보다 마지막 말이 너무 신경 쓰였다.

클로에 자신은 끝도 없이 자신을 깎아내렸지만.

상대가 자기 비하를 하는 모습은 실로 보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못된 짓을 해왔는지 거울을 보듯 깨달았지만, 일단은 단어 정정을 시급하게 하고 싶었다.

"···오라버니는 쓰레기가 아니에요."

"내 손에 살아난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이 많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해악이 될지도 모르는 의뢰도 합법적으로 조건이 맞는다면 받아들여 왔어. 어때? 난 구제 불능에 쓰레기지?"

"아니에요···!!!"

울컥하는 클로에의 높은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

대답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아 입이 아니라 고개를 주억여 긍정을 보이니 그제서야 오라버니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클로에. 내가 제국에 멀쩡히 숨쉬고 있다해도 클로에보다 많은 사람을 구하고 이익이 된다는 보장 같은 건 없는거야. 애초에 사람을 구한다는 건 무조건적인 가치의 증표가 아니기도 하고."

또 자제못하고 올라오는 눈물이 글썽이자 오라버니는 자리에서 웃으며 일어났다.

언니와 같이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오라버니는 커다란 손으로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줬다.

빈틈없이 흉이 진 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상냥함이 느껴진다.

"아까 클로에한테 물었을때 쓰레기라고 긍정해버렸으면 마음이 좀 꺾였을지도 모르겠네. 클로에가 나를 살렸어."

"···오라버니."

"이번 일도 그렇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로 죄책감을 품지는 마. 사람은 그렇게 실수하고 자신을 의심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실질적으로 영지에만 있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물들기 쉽고 영향을 받기 쉬우니 정신이 없을거라 생각해."

"흑··."

어디선가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고.

시원한 미소를 보여주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은 오라버니는 다음에 만나서도 어색함이 없도록.

자리를 마지막으로 맺어주는 조언을 던져주었다.

"모든 것을 항상 파악하고자 할 필요는 없어. 지금처럼 보여서 해소하고 부딪혀 보면 되는 거야. 그게 클로에가 클로에 본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전부니까."

"···."

틀어막힌 방 안에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강풍은 자신의 다리를 이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밀어내면서도 몸에 차오르는 뜨거운 열기는 녹아서 발을 붙이게 한다.

"심심하면 교단에 언제든지 놀러 와. 클로에가 와주면 나도 즐거우니."

"아, 아아··읏··! 네, 네에··!"

클로에가 로만을 보며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

··

굳이 교단의 바깥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오라버니를 어떻게든 쉬게 만들었다.

지금은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다.

교단을 나서기 위해 방에서 도망치듯 허겁지겁 나온 클로에는 멍한 정신으로 발을 움직였다.

"형제님? 괜찮으세요?"

복도를 지나려 하니 아까 마주쳤던 어린 수녀님이 자신을 불렀다.

"네에···?"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확실히.

클로에는 자신의 정신이나 몸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정신이 멍하니 구름을 걷는 것 같았다.

어딘가 붕 뜨는 느낌을 안고 교단을 나온 클로에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겨우 몸을 실어 아카데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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