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7 - 병문안 아닌 병문안 -6-
-순수함과 결백한 마음은 하나의 검으로 위조되어 신의 축복을 모방할 것이다. 이 검이 권력, 탐욕, 야망, 부패한 영향에서 마음과 믿음을 확고히 하여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사자의 심장 (The lion's heart).
검에서 시작되어 은은하게 그녀를 감싸는 신성한 기운이 치솟았다가 잠시 후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며 탁자를 뒤집고 뛰어다닐 정도로 놀랐다.
'신성력도 없는 기사가 사자심···?'
사자의 심장은 본래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사자심'이라 불린다.
사제들보다는 가까이서 부정한 것들을 마주하고 상대하는 성기사의 주력이 되는 성법술 중 하나로.
흑마법사를 질색하게 하는 문제의 성법술을 투표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무조건 꼽힐 것이다.
방어력의 상승, 부정에 대한 내성 상승, 정신 내성 상승 등.
정신을 건드리거나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악몽이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흑마법이 장기인 흑마법사는 사자심을 제대로 사용하는 베테랑 성기사를 만나면 높은 확률로 거품을 물게 된다.
상성을 뒤집을 실력 차가 있다면 그것도 이야기가 다르지만, 절차와 시간이 수 배로 낭비되고 까다로워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성력과 믿음이 없는 자가 성법술을 사용하는 것도 불합리하고 의외성을 가지는 힘이지만, 체력이나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점도 그에 밀리지 않는 장점이라 할 수 있겠어."
"키티 마음에는 들어?"
입꼬리를 올려 물으면서도 머리의 한편은 다른 쪽을 생각하고 있었다.
에클레어가 사자심을 발동하며 읊어줬던 기도문 또는 영창이라 할만한 부분이 내가 아는 사자의 심장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
'원래는 용맹한 어쩌고로 엄청 짧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단순히 영창에 의미가 없는데 이노센스에 있는 스킬이 발동되며 나오는 특수 기도문의 일종인지.
굳어 있는 영창의 체계를 벗어날 정도로 강인한 에클레어의 이념이 영향을 주는 것인지.
어떤 쪽이든 교단의 평범한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사자심 보다 비상함과 신성함이 느껴지니 경사는 맞다.
피이잉-
에클레어는 이노센스를 돌려보내고 내게 다가와 허벅지 위에 앉았다.
"물론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최고라 생각한다. 누구에게 받은 검인데···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이 검만 썼을거다."
기분 좋은 말을 해주는 그녀의 허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검 자체만 보면 어때? 무게감이나 예리함 같이 기능적인 면에서."
"단순히 좋은 검이라 부르면 비하가 될 정도라 해야겠지. 그날 적어도 수백구의 언데드를 베어 넘기며 느꼈다만, 예전 교단에서 내려준 축복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더군."
"오오~!"
"물론 사특한 것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검으로도 더할 나위가 없다."
마나를 가진 기사 그리고 신성력을 품은 성기사들이 각자가 가지는 차이점을 메꿀 수 있는 무기라니.
콩깍지가 아니라 내 여자들은 실로 긍정적인 의미를 품은 위호부익(爲虎傅翼).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렸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네."
나를 뚫어져라 보던 그녀는 숨을 뱉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무구에 대한 욕심이나 질투 한 점 없이 기뻐하는 그 천진난만함은 어디서 난 건지··· 로만의 백금 승급 조건은 무욕이었나?"
"내가 욕심이 없다는 건 지금 상황만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에클레어의 허리를 당겨 그녀의 뽀얀 목에서 살내음을 느끼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는 게 아쉽구나."
"나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지만 ㅡ."
풍만한 젖가슴에 내 얼굴을 끌어안은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웃음기를 담아서 속삭였다.
"앞으로도 기회와 시간은 많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겠지?"
행복함에 질식할 것 같은 공간에서 고개를 드니 장담을 담고 눈에 아름다운 호선을 그린 그녀가 보였다.
"이제 키티가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있네."
딱히 몸을 섞지 않고 시시껄렁한 이야기와 사담만으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달이 휘영청 떠올라 서로의 살갗이 유달리 따뜻하다고 체감하기 시작한 때.
에클레어는 내게 영역을 표시하는 느낌으로 타액을 섞는 진한 키스를 나누고 리케와 클로에 둘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
아카데미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책을 향하고 있지만 생각의 한편에서는 자연스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잘 다녀오자!'
새벽부터 준비한 다짐이자 생각이다.
저택에서 리케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며 서로 생각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깨달은 것이 많았기에.
오늘은 세리아와 리케 둘이 이야기하게 둘 생각이었다.
세리아의 돌발적인 스킨십이나 장난을 쉽게 받아 주지는 않아도.
그녀가 과한 활발함에 실수하거나 잘못되지 않도록 매번 신경 쓰고 아끼는 게 보이는 리케의 부탁이기도 했기에 돌아왔을 때의 상황이 기대되었다.
클로에 자신도 교단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오라버니에게 들리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명이 아침 일찍 일어나 손을 맞춰 준비한 도시락이 있으니 용건도 충분.
자신은 과일을 넣고 옆에서 재료를 손질한 게 전부이지만 아예 기여도가 0은 아니니 함께 자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오라버니가 잘 드시나 꼭 체크하고···."
언니나 오라버니처럼 힘들다거나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일수록.
철두철미하게 집중해서 안색이나 식욕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녀님의 말씀대로 흑마법이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것이니.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고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에 있는 문제의 풀이를 한 뒤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론을 담당하는 교관님이 나가는 순간 생도들은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 각자 암묵적으로 모이는 그룹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수다의 시발점이 되는 시간이니 다들 목소리가 한 음은 올라가 있었다.
-로버트랑 아이작 둘 다 수도에 돌아왔다던데?
-아직 병결처리 아니었어?
-조금 더 쉬고 돌아올 생각ㅡ.
····
오늘의 수다 주제가 선정된 떠들썩한 여식의 무리를 뒤로하고 클로에는 개인 사물함으로 향했다.
딸깍-
사물함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도시락 아래에 천을 몇 겹으로 쌓아 올렸지만 음식은 결국 식어버렸다.
그것까지 생각한 메뉴를 넣은 도시락이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리.
'더 식기 전에 빨리 가야지··!'
아카데미와 교단의 거리는 멀다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가깝다고 말하면 의문에 고개가 기울어지는 정도.
지금을 위해 미리 언니에게 부탁해둔 마차에 몸을 태운다.
사용인이나 동승자 하나 없는 조용한 마차의 안.
클로에는 묵직하고 커다란 도시락이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꼭 껴안은 채 말이 발굽을 지면에 붙이기를 기다렸다.
딱! 딱!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도중.
마부석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를 듣고 내린 클로에는 구석에서 대기하기 위해 말을 끌고 이동하는 마부를 확인하고 교단의 내부로 발을 들였다.
'날씨가 산책하기 딱 좋은데. 방에만 계시면 오라버니도 갑갑하시겠다··.'
끼니를 먹으면 절로 얕은 꿈나라로 인도할 것 같은 따스한 햇볕과 웃음소리.
섭리를 거스르고 되살아난 시체들이 들끓었던 그날이 거짓말 같은 평화였다.
또각-
"형제님. 교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또각-
"여신님이 미소를 보여주시는 오늘의 날씨가 너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드넓은 교단으로 들어와 마주치는 인물들이 신실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와 안부를 전해오니.
클로에의 고개는 열 걸음을 못가 내려가고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예의상 던져오는 질문에도 발을 자꾸 멈추게 되는 자신이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해서 언제 교단의 안쪽에 위치한 병실에 도달하나.
악의 없는 교인들의 행동에 클로에의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 점심시간인데 식당이 아닌 곳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소심한 인간 혼자 교단에 들어오는 것은 이리도 험한 길이었단 말인가.
일면식 없는 세리아가 여기저기 증식하는 기분이었다.
겨우겨우 복도 하나를 건너가 쭉 지나니 교단에서 요양과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방들이 모여있는 건물로 도착했다.
오라버니가 머무는 일인실은 이 건물에서도 제일 안쪽.
이곳이야말로 특히 사람이 많으니 다시 한번 고난의 시작이라 여겨졌다.
"후읍··!"
양손으로 받친 도시락을 다시 한번 제대로 잡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은 클로에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살면서 기억에 남을만한 우연과 행운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교단의 인원들이 병실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대기하는 공간의 앞에 서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펑퍼짐한 환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강철 같은 육신과 검은 머리.
옆모습으로도 느껴지는 검붉은 안광.
노출된 살결에서 보이는 고단한 삶의 흔적들.
하나하나가 범인을 압도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게 하지만.
자신을 다가가게 만든다.
'오라버니··!'
누군가와 대화하시는 걸 보니 자신이 찾아온 타이밍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가까워져 반대편이 보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보였다.
'···?'
성녀님은 아니었다.
분명 저번에도 지나가며 언니가 오라버니를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어린 수녀님.
교단의 베일을 쓰고 있지만 그 반투명한 막 사이로 표정은 확실하게 보인다.
"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로만에게 다가가는 클로에의 발걸음이 속절없이 빨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