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4 - 병문안 아닌 병문안 -3-
에클레어가 찾아오기 전까지 그냥 침대에 누워있던 건 아니다.
리케가 아카데미 수업을 위해 돌아가는 순간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뚜둑- 뚜두둑!
"끄으으-!!"
너무 오래 누워있으니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다.
허리와 어깨를 돌리니 시원함에 절로 목청이 터져 나와 방을 울렸다.
사치스럽게 넓은 공간도 있겠다 혼자 운동을 해봤지만 땀도 안 나고 영 기별이 오지 않아 답답하다.
역시 사람에게는 햇살과 맑은 공기가 필요한 법.
몸의 찌뿌드드한 감각이 정신까지 잠식하려 드니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껴져 드넓은 교단을 산책해보기로 결정.
모험가 생활을 지내며 매번 성수나 포션을 사러 와본 적은 있으나.
일을 끝내면 바로 돌아가서 내부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다.
개인실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저 멀리서 사제들이 우르르 다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성녀님이 말씀하시길, 산책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너무 멀리 나가시거나 격한 운동은 아직 하시면 안 됩니다."
전생으로 비견하자면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그들은 같은 모험가처럼 막 대하기는 껄끄러웠다.
척을 지기에는 손해가 너무 크기도 하고.
"사제님들에게 피해 갈만한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그냥 좀 갑갑해서요."
아카데미에 인력 보조로 나온 적이 있는 사제들과 마주쳐 사담을 짧게 나누고.
지루함에 평소와는 다르게 교단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니 친근함이라고는 전혀 없을 장소에서 일면식이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건강미가 느껴지는 구릿빛 피부.
불만이 가득 들어가 까칠해 보이는 표정을 품고 다리를 꼬아 앉아있는 폼은 내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금발이라기엔 조금 어두운 머리색을 뽐내며 유독 시선을 모으고 있는 여성의 얼굴은 분명 모험가 길드에서 마주친 인연이었다.
사실 진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무언가'.
그것을 제대로 확인해 보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가 말을 건넸다.
"치료받으러 왔나 보네?"
"!!!"
내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경계심을 품고 주위를 한번 빠르게 확인하더니 대답을 꺼냈다.
"저, 저는 괜찮은데··· 파티원이 다쳐서 치료받는 걸 기다리고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노출된 한쪽 눈으로는 내 행색을 주욱 읽고 있다.
'파티라 하면 나랑 이름이 같던 그 남자를 말하는 건가?'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
부상이야 모험가들은 달고 사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신기한 것도 아니고.
"흐음~ 그렇구나."
내 시선을 잡는 '무언가'.
너무나도 뜬금없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 도마뱀 비스름한 것이 있는 건 내 눈에서 일어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 저게 도마뱀이 맞나··?'
몸은 수분 가득한 진흙 덩어리 같이 매끈하면서 머리에는 파릇한 초록 새싹이 뿅! 올라와 있다.
나와 눈이 계속 마주치고 있는데 까만 눈망울을 빛내며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볼수록 귀엽게 생겼다.
당사자를 두고 도마뱀과 한참 눈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 생물은 주둥이로 그녀의 정수리를 콕콕 눌러 신호를 보낸다.
흠칫 몸을 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한발 다가왔다.
"호, 혹시 테로가 보이세요?"
"테로···? 얘 이름이 테로?"
내가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가리키자 그녀가 입을 쩍 벌리고 멍을 때리다.
정신을 차리더니 노출된 입안을 급하게 가렸다.
"그·· 너무 놀라서! 죄송합니다!"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다.
'저것도 정령이구나.'
게임에서는 보이지 않던 정령의 형태라 예상도 못했다.
정령은 모두 자신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저런 모양새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법.
주위를 한번 둘러본 나는 텅 비어있는 복도를 보고 허리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본 걸로 할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잖아?"
그녀는 내가 정령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아까와 같은 경계심과 부자연스러움은 상당히 지워져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적당히 대화를 끊고 자리를 뜨려던 나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모험가 길드에서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책임질 여자가 없던 예전의 나였으면.
이렇게 특색있는 미인의 이름은 확실하게 외우고 다녔을 텐데 정신머리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이 부족한 머리통을 긁으며 일단은 대화가 기괴한 타이밍에 끊어지지 않도록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을 나한테 알려준 적이 있었나? 아무튼 열심히 해라. 파티원 치료도 잘 끝내고."
"앨리스요! 그때 포션을 주신 덕에 파티원이 살아서 여기까지 왔어요··감사합니다!!"
앨리스.
은근히 흔하면서도 모험가 쪽에서는 처음 듣는 이름 같다.
릴리네와 함께 있어 불운의 사건도 마무리 지을 겸 포션을 하나 증정한 기억은 확실히 있다.
'데가넬로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령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종족이 아니라 인간 중에서 정령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정말 정말 드물기 그지없으니 그녀도 놀라는 게 한편으로 당연했다.
"포션 덕에 살았으면 내가 좋은 일 했네? 그래서 교단에서 만난건가."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귀한 물건 같아 최대한 보관하려 했는데···."
주인의 감정과 달리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주시하는 정령에 자꾸 눈이 간다.
'머리에 새싹이 가끔 움직이는데 감정표현인가? 귀엽네.'
초롱초롱한 눈과 머리의 새싹.
어디에도 없는 생명체의 형상이면서 유일무이한 귀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자꾸 시선이 빼앗긴다.
저 파충류의 모습을 한 정령의 겉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아니지. 남 정령을 함부로 만지면 안돼.'
내가 의식 없이 손을 뻗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소모품이니 그 용도에 맞게 쓰라고 준 건데 뭐 어때? 이름은··· 장담은 못 하는 데 기억은 해볼게. 고생해라."
"가,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선배님!"
"웬 선배? 그딴 게 있어?"
모험가 사이에 그런 거지 같은 위계질서가 있을리가.
그냥 모험가라는 직업은 초상나기 직전의 인간들이 돈에 미쳐서 모인 단체인 것을.
"없을까요? 언급하는 걸 듣기는 해서··."
분명 그런 걸 따지는 녀석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재능의 무덤이라 하는 금을 못 넘어서고 나이만 늘어나 정체된 무리가 아닌가 싶다.
"난 그런건 관심 없어서 모르겠다? 향 냄새 맡을 확률로 따지면 선배가 맞을지도 모르겠네."
"···."
"그리고 정령을 본다고 무조건 착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니 증거 없는 소문은 너무 쉽게 믿지 말고. 나만 해도 알겠지?"
정령을 봤다고 너무 쉽게 경계를 허무는 모습을 지적하니 그녀는 황금색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
'좀 과한 참견인가?'
모험가라면 필요한 자세라 생각했지만, 두 번째 만남에 하기에는 쓸데없는 오지랖 같지 않았나 싶다.
여기서 더 이어지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은 예감.
나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더 외진 구석을 돌아다녔다.
적당히 햇빛과 맑은 공기가 폐에 들어찼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방으로 돌아와 가벼운 맨손 운동과 글레이프니르와의 소통을 이어갔다.
··
··
퇴근 후 교단으로 찾아온 에클레어는 제복을 입은 상태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들어와 의자에 겉옷을 걸어두고 침대에 다가와 걸터앉았다.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있는 교단의 배식을 보고 에클레어는 내게 물었다.
"로만. 밥은 잘 챙겨 먹었나?"
"저녁은 아직이지만. 점심에 도시락은 내가 남기지 않고 먹었지! 살면서 그렇게 사치스러운 음식은 처음 먹어봤거든."
"하! 또 말은 잘하는군···."
리케가 말했던 반응과 완전히 똑같은 반응이 터져 나와 순간 웃음이 터질뻔 했지만.
백금의 모험가가 가진 강인한 정신력을 동원해 이를 악물고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슬금슬금 다가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니 대륙의 명승이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와··이건!'
제대로 단련된 근육은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다.
그런 허벅지와 아랫배에 머리를 딱 붙이면.
풍만한 젖가슴에 가려져 그녀의 앞머리만이 드문드문 보이는 이곳은 나만의 특별한 절경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는 게 더 좋다는 생각에 조금 벗어나 무릎에 가까워지니 에클레어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키티의 요리는 재료 맛을 잘 살려서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더라. 내 건강을 챙겨주는 섬세함에 감동했어."
그 말이 제법 기쁜지 그녀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누워있는 내 볼을 잡고 흔들었다.
"자극적인 것을 찾는 입맛은 이해하지만, 너무 짜게 먹는 건 좋지 않다. 앞으로 조금 조절하도록 해라."
"키티가 계속 만들어주면 생각해볼게."
남자의 피부 촉감은 영 좋지 않을 텐데 그녀는 계속해서 내 볼을 만지며 웃었다.
"이럴 때는 정말 철부지나 다름없구나. 미래에는 입맛을 아예 고쳐주지."
내가 몇 번이고 장래를 언급하며 지내다 보니 그녀도 이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편하게 입에 담게 되었다.
실로 장족의 발전.
"우리 편하게 누워서 이야기할까?"
"으음···저녁을 사러 바로 나가려 했다만."
"조금만 쉬다가 가자."
허리를 손으로 감아서 당기자 그녀는 마지못한 듯 소리를 내면서도 부드럽게 이끌려왔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보석과 같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나 또한 그녀의 볼을 만지게 된다.
"키티는 오늘 힘든 일 없었어? 피곤하지는 않고?"
내 손을 거부하지 않은 그녀는 웃으며 자기 손을 올려 볼에 내 손을 더 밀착시키듯 꾹 눌러왔다.
"시끄러운 일이 워낙 많아서 조금 피곤하군··· 안아줬으면 한다."
직책과 입장상 어디 가서 피곤하다, 힘들다고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에클레어는.
나와 단 둘이 있는 상황에 한정되지만.
내 앞에서만큼은 편하게 감정을 터놓거나 앙탈을 부리곤 한다.
시덥잖은 말이나 질문은 할 필요 없이 일단은 안아줬다.
수도에서 악마가 나타나고 언데드가 들끓었으니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겠지.
처음에는 깊은숨을 내쉬며 부정적인 감정을 뜨거운 숨에 실어서 뱉어내던 에클레어는 시간이 흐르자 일정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잠들었나?'
이 방이 가지는 건 완전한 정적이 아니었다.
문을 타고 바깥소리가 옅게 들리지만, 되려 침묵이 오지 않게 고정적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 백색 소음이나 다름 없었고.
침대의 안은 내가 미리 누워서 뜨끈하게 해뒀으니 '피로감'이라는 녀석이 덤벼왔을때.
잠이 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그림 아니겠나.
도대체 얼마나 바빴던 건지 그 제국의 5 기사가 여기서 잠이 들 줄은 몰랐다.
반대로 내 품이 그만큼 경계심을 풀게 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저녁이야 별생각 없었으니.'
평소보다 움직이는 게 없는데 점심밥을 그만큼 때려 넣었으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에클레어가 오면 뭔가 사와서 그녀의 저녁을 해결시키면서 뭔가 마시는 걸로 끝내려 했었는데.
한끼의 밥보다 시간이 길지 않아도 깊은 수면이 영양가 있지 않을까.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건 저녁때가 완전히 지나 성녀가 일정을 끝내고 돌아와 교단이 어수선해졌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