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2 - 병문안 아닌 병문안 -1-
밤이 되어 밖은 컴컴해졌고.
교단에 로만을 두고 나오게 된 세 명의 여인이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본의 아니게 교단에 있게 된 로만이 저곳에서 나오기 전까지 리케는 에클레어의 저택에서 손님의 형태로 머물게 되었다.
당장 이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치안도 안 좋은 외곽에 혼자 있으면 걱정된다는 연인의 말도 있었고.
클로에와 깊이 이야기할 사항도 있어 에클레어가 자신의 저택에서 지내라며 먼저 권해왔다.
레오 플로이드가 악마가 된 사항? 앞으로 4 기사의 행보?
현재 에클레어의 머리에서 이딴 문제들은 작고 사소하면서 걸리적거리는 신발 속 모래 알갱이 정도에 불과했다.
에클레어의 저택에 돌아온 셋은 그대로 대화하기 편한 접객실에 모였다.
달그락-
저번과 시각적으로 다르다고 하면 세리아만 없을 뿐.
예전과 같은 장소에서 찻잔이 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로에는 우물쭈물하며 질문의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기에.
에클레어가 자진하여 입을 열려고하자 리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클로에. 지금까지 알려주지 못 한 건 전부 내 개인사 때문이고. 관계에 대해서는 언니가 숨기려 한 게 아니라 내가 억지를 부려서 부탁한 거야."
리케의 개인사.
클로에의 머리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난 가문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물론 확실하거나 자세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스카디 후작 가문의 소문과 일들에 대해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현재와 엮여있는지 모르지만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역시 리케는·· 오라버니랑··?"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숨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로 동거하고 있어."
무덤덤하게 말하는 당사자와 달리 클로에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도, 동거··!! 언니도 알고 있었어··?"
"···물론 알고 있었다."
시간에 큰 틈을 두고 질문에 답한 에클레어의 표정은 리케와 클로에가 섞인 듯한 상태였다.
제국의 5 기사이자 클로에의 언니, 드리트나 가문을 이끌어갈 차기 가주로서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얼굴 색은 클로에에게 지지 않을 만큼 붉어져 속에서 얼마나 난리가 나고 있는지 증명했다.
"에클레어 언니는 내가 꼬드긴 거야."
"···?"
이제는 정말 모든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듣고 해결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또 이해하기 힘든 문장에 드리트나 자매의 표정이 각각 변했다.
당황보다는 호기심의 비중이 높아진 클로에의 시선이 천천히 언니에게 향하자.
에클레어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그건 정정하지··· 리케가 꼬드겨서 넘어간 게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잠시 보였다 지운 리케가 웃으며 에클레어를 보았다.
"오빠가 확실히 그렇죠?"
"···."
무언은 긍정이라 했던가.
식지 않고 여전히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볼로 확실한 긍정을 표하자 클로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파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고장 난 마도구처럼 팔을 삐걱거리며 자신의 머리에 있는 경우의 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그럼 리케가 오라버니···와 만나는 걸 알고도···?"
"맞아. 그래도 그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굳어있는 언니 대신 답변을 한 리케의 말대로.
연애라 해도 혼사를 목적으로 잡고 있다면 독특한 경우이긴 해도 책임을 제대로 진다면 후에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그건··그건 맞는데··!"
딱히 지금 관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반론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자신이 뭐라고? 애초에 그럴 입장도 아니지 않나.
무언가 답답한 느낌에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으니 언니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언니와 잦아진 스킨십은 부담스럽다기보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어 정신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손을 부드럽게 잡은 언니의 시선은 자신이 아니라 리케에게 향해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클로에는 납득하기 힘들 수 있으니 이야기해주면 안되겠나? 무리한 부탁이자 예의 없는 부탁이란 건 알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물론 말해주려 했어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리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찰랑이는 홍차에 얼굴을 비췄다.
그걸 본 에클레어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고맙다··· 그리고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하게 만드는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언니가 미안할거 없어요. 시간이 그리 늦지는 않았으니··· 클로에에게도 내 이야기는 제대로 해주는 게 좋겠네."
친구의 처음 보는 표정.
평소 무표정하거나 드문드문 웃는 표정은 보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는 리케를 보는 건 클로에에게 처음이었다.
혹시 트라우마를 건드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클로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무리해서 해줄 필요는 없어요···."
"무리는 전혀 아니야, 오빠랑 만났을 때를 다시 추억할 수 있으니. 듣고 싶어?"
"···."
방금의 표정이 거짓말 같이 밝아진 얼굴.
오라버니를 언급하며 생기가 돌고 있는 친구의 얼굴은 자신이 봐도 심장이 떨리게 아름다웠다.
외모야 당연하지만 봄날에 완전히 피어난 꽃을 보는 느낌.
감정이 얼마나 깊으면 저리 극명한 일희일비를 만드는 것일까.
클로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리케와 클로에를 부탁하며 막대한 헌금을 했기 때문일까.
교단이 제공해준 일인실은 소리가 울릴 정도로 넓었다.
천장의 불규칙한 무늬에서 웃는 강아지를 닮은 모양이 있길래 다른 모양은 없나 눈을 돌리다 문득 느끼게 된다.
'조용하네.'
침대는 적당히 푹신했고 옷은 내 몸에도 헐렁할 정도의 크기가 존재해 움직이기 편했다.
어제는 세 명이 늦은 시간까지 있다 돌아갔으니 조용한 방에 대한 체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그 셋이 이야기는 잘 되려나.'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엉킨 실타래처럼 배배 꼬인 관계일 텐데.
내 앞에선 티를 내지 않는 게 고맙기도 했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뜻 저택에 리케를 불러준 에클레어의 행동에 깊은 여운이 드는 아침이었다.
'여자 잘 만나서 이렇게 정신이 편해질 줄은 몰랐네.'
내 여자들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 적적한 시대상의 특이점을 넘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병상에 누워있어도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세 명이 돌아간 저택에서 일어날 상황이 걱정이긴 해도.
'그 둘이면 클로에한테 잘 설명하겠지.'
나와는 비교 자체를 못할만큼 머리가 좋은 둘이니 잘 풀어나갈 거라 믿음이 간다.
똑-! 똑-!
두꺼운 방문을 때리는 노크 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감정이 실렸다기 보다는 그냥 근력이 강해서 문이 울리는 것.
"예~"
문을 열고 먼저 들어온 건 성녀의 뒤를 붙어 다니던 덩치 큰 여성이었고.
그 뒤에 조신한 발걸음으로 성녀가 따라 들어왔다.
"모험가님.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문제없습니다. 마나도 모두 회복해서 당장 퇴원해도 될 정도라 생각합니다."
퉁명스러운 말에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반론했다.
"아카데미 수업 전까지 있으신다고 그분들과 약조하지 않으셨나요?"
"···약속은 지킬 겁니다."
이런 부류와는 유독 대화를 나누기 껄끄럽다.
어떤 말을 해도 좋은 쪽으로 풀어가려 하고.
무상으로 봉사를 하는 인물은 편안함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내 추잡한 인간상과 완전히 반대된다.
"오늘 황실에 들어가서 레오 플로이드에 관해 상세히 보고를 올릴 생각입니다."
"레오 플로이드··? 그게 누군··아!"
황실까지 가서 보고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4 기사의 아들이라는 그것 하나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제 목이 날아간 그 악마의 숙주가 그런 이름인 게 이제 기억이 났다.
웃고있는 입꼬리를 살짝 떨며 난감함을 표한 그녀는 재차 이야기를 이었다.
"모험가님이 부탁하신 대로 누가 처단을 했다고 지명하여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모험가님과 기사님이 들어갈 부분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처리했다고 보고를 올리면 되겠습니까? 목격자가 있다면 간단한 도움을 받은 정도로 하겠습니다."
내가 부탁한 대로 만족스러운 대처였다.
"황제 그 늙은 너구리···가 아니고··!"
"··너구리요?"
말을 하다 아차! 싶어 옆으로 눈을 돌리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황제 불경죄에 웃음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둘이 보였다.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공로자 같은 멋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흑마법사의 시선을 익숙한 교단으로 유지시키고 제국에서 나올 지원이나 신용의 힘을 몰아 교단을 강성하게 만드는 게 나에게도 내 여자들에게도 좋다.
"흠흠··! 아무튼 황실에서 굳이 캐내려 한다면 교단의 성기사단과 사제님들이 힘냈다고 합시다. 실제 힘없는 제국민들의 피해를 막은 건 그분들 아닙니까."
목적을 위해 허울 좋게 포장했긴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무리해서 움직인다면 구할 수 있다해도 나는 내 몸을 희생해서 면식 없는 자를 구하지는 않는다.
내게 생명의 무게는 모두 다르며 절대 동등하지 않다.
그 가치관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까지 내 두 번의 삶 모두 그랬다.
하지만 신앙심으로 뭉친 교단의 인원들 중 상당수는 봉사와 헌신에 진심인 자들이 있고.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죽음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직업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내가 절대 할 수 없는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성녀는 다시 입꼬리를 습관적으로 올려 손을 모으더니 교단 특유의 예법으로 감사를 표했다.
"···백금의 모험가께서 교단의 노고를 인정해주시니 모두 기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제 일정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니. 혹여 모험가님이 불편하시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종을 울려주시면 됩니다."
여자 덩치와 방을 나선 후 적적하니 글레이프니르를 꺼내 혼잣말을 주절거리고 있으니 시간은 금세 정오를 향했다.
동시에 점심 배식으로 교단에 활기가 돌며 문 밖으로 미미한 소리가 들려왔고.
내 방으로도 담당 사제들이 찾아와 예외없이 배식을 받기는 했다.
여전히 외관만은 멀쩡해보이는 교단의 밥을 먹어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타이밍에.
리케가 도시락을 들고 찾아왔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