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1 - 주의하고 함구할 것들.
성녀는 성물을 통해서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은 단순히 귀를 이용해 듣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새기듯 울려 퍼지는 감각이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여신의 총애를 받는 아이야.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선을 넘으려 드는구나···!
천둥처럼 내리치며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성녀의 집중력이 크게 흐트러졌다.
벌을 내릴 듯 엄하게 다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자신이 모시는 그분이 절대 아니었다.
'이건 교단의 성물 같은 게 아니야··!'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되었다. 성물을 떠나서 이건 그냥 교단 자체와 관련이 없는 것이다.
마주한 것만으로 성스럽고 신성하다 느껴지나.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신성력이 아니었다.
자신을 한순간에 파악하고 여신님을 평탄한 어조로 언급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비범함은 한낱 인간이 재단할 것이 아니오.
-내 경고에 귀를 기울이거라.
급히 성안(聖眼)으로 파고드는 것을 멈춘 성녀는 여신님과 소통했던 당시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경청하고 있나이다."
-신앙이 갸륵한 아이야, 나는 항상 조심하고 용서한다. 실수하는 것은 본디 인간이고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 위의 존재들이니. 나에게 사랑과 용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돌아갈 기회를 주겠다.
"가르침을 주신 관대한 마음에서 배우고 헌신과 인내를 통해 구원을 찾겠습니다··."
굽히는 태도에 알 수 없는 상대의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든다는 게 느껴진다.
-나약한 몸뚱이로 애먼 기 쓰지 말고 돌아가거라. 인간들의 목을 옥죄는 부정함 따위를 걱정한다면 이 나에게 오명과 수치를 주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분명 일을 키워서는 안 된다.
이렇게 기회를 줄 때 물러나는 것이 최선인 건 맞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 도달한 목적과 입장을 상기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한가지는 확인하라.
초월적인 존재의 앞에서는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책임을 짊어진 교인이라면 해야 한다.
생각을 입으로 뱉으려 하니 정신이 울렁이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성녀는 그것을 극복하고 꾸역꾸역 말을 꺼냈다.
"···허나 저는 신성함을 동경하는 사람들 앞에 굳건히 서야 하고, 그들의 믿음에 배반하지 않아야 하며 헌신을 굽히지 않는 한 명의 교인입니다."
촤르르륵-!
몇 줄기인지 모를.
족히 수천수만 개의 검은 쇠사슬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며 주위가 완전히 막히더니.
빛 한점 보이지 않을만큼 캄캄하게 변한 어두운 공간에서 노성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무리 경험이 미천한 어린 양이라 해도. 내가 앞에 한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 터. 용서하고 기회를 준다는 나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정신을 찌부러트릴 듯 조여오는 감각.
성녀는 성안(聖眼)을 아예 감고 초월적인 존재를 회피한 채 발악하듯 항변했다.
"그,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은혜를 찾아 헤매는 미천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여신님의 뜻에 따르는 보잘것없는 종에 불과하므로··· 의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돌리지 말고 말하거라. 내게 사특한 계교가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겠지?
상대는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는 걸 선호하는 것인지 자신을 재촉해왔다.
"그렇··습니다."
-쯧··· 외상을 치료해 준 덕을 봐서 보여주마. 용무가 끝나면 내 것에서 바로 나가라.
피잉!
검은 사슬로 막힌 공간에서 붉은빛을 내는 하나의 사슬이 혜성처럼 떨어져 성녀의 시선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
순간적인 처치에 놀란 성녀가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움직일수도, 소리를 더 낼 수도 없었다.
주입되는 감정들에 정신을 부여잡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참에 며칠 정도는 안에서 편히 쉬게 해줬으면 좋겠군. 진정 은혜를 베풀 줄 안다면 그리하리라 믿겠다.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던 신성력이 반짝거리는 별 가루처럼 흩어지며 성안(聖眼)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평소와 같은 적막이 찾아와 혼자가 된 공간.
성녀를 밀어붙이며 천둥처럼 울리던 드센 여성의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힘없이 늘어지는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휴우··· 가, 갔나?
사슬 뭉텅이 뒤에서 슬쩍 걸어 나온 소녀는 얇은 사슬이 안대처럼 칭칭 감겨있는 눈가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힘들어··.
이번 침입자를 격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건 자신이 로만을 만나기 전 머물러 있던 여성이었다.
지금과 같이 제대로 계약을 맺은 주인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을 옆에서 지켜보며 다양한 행태를 보아왔기에.
분노에 대한 흉내내기는 완벽했고 침입자는 공포에 질렸다.
-빨리 잘했다고 쓰다듬어 주면 좋겠다··.
*****
"하아··! 허억-!"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성법술 도중 갑작스레 숨을 크게 내뱉는 성녀를 향해 마젤라가 냉수와 수건을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눈에서 광채처럼 뭉쳐있던 신성력이 깨지듯이 흩어졌고 피로감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성녀는 로만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이 깊어진 그녀를 보며 로만은 찜찜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성녀님?"
"···그게."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성녀를 본 세 명의 여성이 긴박한 표정으로 변했다.
"성녀님! 혹시 로만에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오빠는 괜찮은 거죠? 말해주세요!"
에클레어와 리케는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갈 기세로 성녀를 압박해왔고.
"오, 오라버니··!"
직접적으로 성녀에게 뭐라 말을 하지 못하는 클로에만이 뒤에서 로만의 너덜너덜한 옷깃을 잡고 손을 떨었다.
빠르게 호흡을 진정시킨 뒤 식은땀을 닦아내고 자신의 이마와 눈을 확인하듯 톡톡 만진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후-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몸 상태를 보니 며칠 지내시며 기력 회복에 주력하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
"악마에 대한 처리결과는 이미 올라간 상태고. 상세 보고는 저희 쪽에서 처리할 테니 편히 쉬시면 됩니다."
아무리 주는 상대가 성녀라 해도 과도한 친절을 받으면 불편하기만 하다.
그 진단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로만은 심드렁한 얼굴을 보였지만.
에클레어와의 약속이 있으니 딱히 반항은 하지 않았다.
-밥은 그럼 같이 준비를··.
-저도 도울게요··!
-안 그래도 돌아가는 길에··.
뒤에서도 며칠은 교단에 있으라는 진단에 동조하는 여론이 컸기에 이미 수습시키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리케에게 최대한 다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그럼 아카데미 수업 전까지만 있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내 말에 성녀는 만류가 아니라 눈썹을 움직이며 질문을 해왔다.
"어라? 모험가가 아니신가요··?"
"모험가 맞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성녀를 향해 마젤라가 다가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성녀님. 실은 저희 교단에서 아카데미로 지원 나가는 인력이 있는데ㅡ."
귓가로 간략한 설명을 들은 성녀는 감탄조를 흘리며 눈을 작게 빛냈다.
"바쁘신 와중에 아카데미 생도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시다니··! 좋은 일을 하고계시네요."
"다 저 좋자고 하는 일입니다. 모험가 중에 이유도 없이 무료로 일할 만큼 봉사 정신을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퉁명스럽게 답하는 로만을 보며 가볍게 웃은 그녀는 마젤라에게 로만이 지낼 방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
마젤라는 성녀와 단둘이 되는 순간 근질거리던 주제를 꺼내 입을 열었다.
"저 중 5 기사님과의 관계가 알려지면 제국의 귀족 자제, 기사들은 당연하겠지만.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 중에서도 슬픔을 겪을 자들이 많겠군요."
그녀의 말에 성녀는 난감한 얼굴로 웃을 뿐 뭐라 대꾸를 할 수는 없었다.
여성도 제법 있지만 특히 남자 성기사들 중에서 에클레어를 동경하고 흠모하는 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기에.
성녀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과 감정의 고통을 가벼운 어조나 말투로 언급하거나 헤아릴 수는 없었다.
"아직 공표되지 않은 관계라면 저희가 확신할 문제도 아니고. 특히 타인이 주위에 입소문을 내거나 언급할 이야기도 아니죠. 조심하도록 해요."
"물론입니다."
제국의 5 기사 에클레어 드리트나와 교단에 오면서 신원이 확인된 남자는 정말 의외의 인물로 백금의 모험가.
어째서 악마와 싸우고 어떻게 이겼는지도 중요하지만, 기사와 모험가라니?
성별은 반대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과 같은 느낌이라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반대되면서도 참 잘 어울린다고 할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흉흉한 남자가 5 기사 앞에 서면 순해지는 게 현실성이 없기도 했다.
그런 둘의 달달하고 오붓한 분위기.
거기에 자세히 관계가 짐작되지 않는 나머지 여성들까지 생각했을 때.
성녀는 최대한 신경을 써주고 싶었다.
"1인 실의 배정은 최대한 안쪽으로 신경 쓴 거죠? 면회객이나 외부 음식 반입에 절대 관여하지 말라고 관계자들에게 일러주세요."
"예!"
"혹여 입소문의 시작점이 교단이 되어 신용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함구에 대한 재교육을 부탁드릴게요.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요."
"성녀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상황을 위해 메모를 이어가던 그녀는 피로감에 아파오는 손가락을 끙끙거리며 주물거렸다.
거기에 성안의 후유증으로 온몸의 기력이 쭉 빠지는 건 물론이고 졸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일 일정은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대로 진행하시기엔 피로감이 커 보이십니다."
"보고를 위해 황실은 들려야죠. 나머지는 원래대로 진행하는 걸로 해요."
눈가를 비비며 졸음을 견디는 성녀를 본 마젤라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은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녀님이 과로로 쓰러지시면 제가 징벌 방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웃으면서 건네는 자조적 농담이었지만 성녀는 그게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잉크병을 닫았다.
"이것만 마무리하면 바로 쉴 예정이에요. 애초에 지금은 같이 있을 시간이 아니니 마젤라는 먼저 쉬세요. 항상 저보다 일찍 일어나잖아요."
괜찮다고 버티는 그녀를 억지로 퇴근시키는 것에 성공한 성녀는 마지막 줄을 이어가려던 펜을 멈추고 방을 나가던 마젤라를 잠시 불러 세웠다.
"아! 마젤라!"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 아침에 황실로 향하기 전에 모험가님을 잠시 만났다 가도록 일정을 좀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