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8 - 자아도취와 나르시시즘 -2-
제국의 수도를 나와 성벽을 끼고 외곽으로 돌면 개인이 운영하는 여관이 심심찮게 보인다.
마차가 다니는 길가에 붙어있어도 몬스터나 짐승의 습격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 보니 퇴역한 모험가나 용병이 운영하는 경우가 대다수.
하여 그들은 이 자리를 찾는 손님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숙박의 목적을 떠나 알사람만 아는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가게가 되기도 한다.
최근 심란한 레오 플로이드에게는 귀찮은 노력 없이 돈 몇 푼에 허리를 흔들고 성욕을 해소시켜 줄 여자들이 필요했다.
"후- 진짜 좆같네."
깐깐한 취향을 가진 친구 놈의 추천으로 온 가게인만큼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의 외관과는 달리 '진짜' 손님을 위해 준비해 둔 깔끔한 욕실.
귀족들의 입맛에 맞는 괜찮은 술도 구비하고 있고 여자들도 여관의 창부치고는 탱탱하니 젊었다.
부드러운 여체에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온수에 몸을 풀어도 지하까지 가라앉은 레오의 기분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몸을 섞는 도중에도 강간이라 할만큼 강압적인 태세로 성욕 겸 화를 푼다는 느낌.
레오에게서 저기압의 티가 팍팍 나니 여자 중 하나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공자님··· 무슨 일 있으세요?"
여자의 말에 레오가 도끼눈을 뜨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닥쳐라. 천한 년들이 말 섞으려 들지 말고 술이나 채워."
"···죄, 죄송합니다."
침묵이 감도는 욕실에서 어린 창부가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하게 술잔을 채운다.
잔에 가득 담긴 술을 한 번에 머금고 넘기자 식도가 뜨끈하게 아려온다.
"푸우-"
욕조에 팔을 걸친 레오는 알코올로 찌든 숨을 뱉으며 에클레어를 떠올렸다.
'단장이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호감 정도인가? 조금일지라도 마음이 생긴 건 분명해.'
부정을 하려 해도 그 대상이 누군지 예상이 가서 레오의 짜증은 끝도 없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절대 흐트러짐을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아주 미세한 틈이 티가나고 확실하게 보였다.
보통은 무시하고 지나갈 법한 행동들이 에클레어에게 일어나니 레오의 눈에 그만큼 어색한 사항도 없었다.
최근에 자주 들리게 되는 모험가 길드.
그곳에 들어가기 전 동행한 보좌들을 밖으로 쫓아내는 건 자신의 업보라고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업무 중에 에클레어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는 레오이기에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전에도 어딘가 머뭇거림이 있지만.
길드에서 일을 끝내고 나왔을 때 숨길 수 없는 그 묘한 분위기.
풋내 나는 첫사랑을 품은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이 정말 짧은 찰나의 순간 보였다가.
밖에서 대기시켰던 단원들과 마주하는 순간 깊이 숨는다.
'아직 선을 넘거나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절제를 아는 기사이자 미래에는 드리트나 백작가를 이끌어 갈 그녀다.
날고 긴다 하는 귀족자제들의 청혼을 받으며 자신의 순결함이 가진 가치를 알고 있다면.
호감 정도로 순결을 누구에게 내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러다 시간이 흘러 그 천박한 핏줄을 가진 모험가와 단장이 몸이라도 섞는다면?
생각만으로 분노가 치고 올라 당장 칼을 휘두르고 싶었다.
'··사람을 붙일 수도 없어서 난감해.'
뒷조사나 작업을 해야 하는 대상이 에클레어 드리트나라 하면 애초부터 의뢰를 받아줄 간 큰 녀석도 없겠지만.
전문 업자들과 누설금지의 마나 계약을 한다 해도 흔적을 역추적당하면 장부 같은 것으로 외통수를 당할 수도 있다.
5기사의 뒤를 캐려 했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곱게 넘어가지 못한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몸을 섞는데 남자가 아니라 여자 쪽에서 마음을 가지면 시간이 촉박해진다.
그 생각에 시야가 좁아져 뚜렷한 답이 서지 않는다.
옆에 놓았던 잔을 들고 술을 마시려던 레오는 비어있는 잔을 보고 인상을 찌그러트렸다.
"쓸모없는 년들아 잔이 비었잖아. 빨리 안따르고 뭐···?"
털썩-!
욕실에 있는 여자들이 비틀거리다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법에 저항하지 못하고 주위의 인간들이 기면증처럼 쓰러지는 이 그림은 이제 익숙했다.
"···!"
철컥-!
욕실 구석에 세워둔 검을 잡은 레오는 자세를 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서 올라온 수십 개의 검은손들이 달려들어 엄청난 완력으로 레오를 붙들고 손에 들린 검을 강탈했다.
꾸드득- 빠득-
"개씨발!"
흑마법의 힘과 범위도 문제였지만 피할 곳이 한정적인 공간이 제일 큰 패착이었다.
저번과 달리 피해낼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추적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거나.
여기를 소개해 준 친구 녀석도 용의 선상에 들어간다.
즈르륵-
검은 손들은 레오를 풀어주고 쭈욱 물러나 검을 다시 정중한 자세로 돌려줬다.
자신들이 어떤 해를 가할 생각도 없다는 걸 어필하며 초면이 아닌 여성이 다가왔다.
"아이 참~ 공자님. 그리 경계하지 마시고 저희 이야기 좀 해요."
서글서글한 말과 달리 서늘한 눈빛이 후드 밑에서 빛나고 있었다.
꿀꺽-
반항하면 당장 목을 비틀어버릴 기세.
레오는 마른침을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여자들을 발로 밀어내고 테이블에 앉았다.
"···왜 찾아온 거지?"
"재밌는 물건을 보여드리려고요."
"물건···?"
흑마법사들이 재밌다고 할 만한 물건이라 하면 불길함 밖에 없었다.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뒤에 서있던 남자가 다가와 검은색으로 물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을 한번 보실래요?"
저 강압적인 기세를 앞에 두고 보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다.
찌익-
주머니를 풀어헤치자 흑마법 특유의 마나가 풀풀 뿜어져 나왔다.
"이 주머니도 제법 귀한 물건이라 흑마법의 흔적을 숨기는데 이만한 게 없답니다. 교단의 누가 와도 아마 눈치채기 힘들걸요?"
"아마라니··."
마법사치고는 두루뭉술한 말투를 사용하는 자였다.
안에는 검은 구슬이 들어있었는데 감히 손을 뻗기도 겁날 정도로 강렬한 불길함이 풍겨왔다.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레오의 머리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 물건을 만드는 데··· 몇 명의 인간이 사용된 거지?"
자신의 말에 그녀는 재치 있는 질문이라는 듯 꺄르륵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흑마법사에게 제물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묻는 건 여성에게 나이를 묻는 것과 같답니다?"
"···용도는?"
"힘."
단순하지만 수컷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단어.
하지만 레오는 인상을 쓰며 언성을 높였다.
"웃기지 마라! 이런 건 사용하면 인간의 형태를 잃고 악마의 종이 되는 물건 아닌가?"
자신의 기세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흑마법사는 자신을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는 촌놈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언제 적 이야기인지··· 그리울 정도네요. 레오 님? 제국에서 저희와 결속된 인간들 중에 인간의 모습을 잃은 자가 있던가요? 문제가 생겨도 저희가 다 돌려드릴 수 있답니다. 계약도 해드리고요."
"···너희들은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 거지?"
"그건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는게 당연하겠죠? 저희는 그저 플로이드를 이끌어갈 차기 가주님에게 잘 보이고 싶을 뿐이랍니다."
"···."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도 수상하다 여길 형편 좋은 내용들.
하지만 넘칠 만큼 풍족하게 살아가다 생전 처음으로 벼랑 끝에 몰린 자의 귀에는 하나의 동아줄이자 벼락처럼 떨어진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딱 자신이 벽을 느끼고 고민을 하고 있는 타이밍에 해결책이라며 나타난 그들은 자신은 역시 타고난 인물이라는 걸 증명하는 느낌.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적성이 풀리고 살면서 자신이 원해서 가지지 못한 건 지금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조차 당장 천한 것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이 상황.
평생을 빼앗고 살았는데- 자신이 처음으로 가벼운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원하게 된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다니.
살아생전 그런 경험은 해본 적이 없지만 생각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물건을 빤히 지켜보는 레오의 귀에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다 갈 곳 없는 천한 것들만 사용했답니다. 플로이드가의 차기 가주이신 레오 님이 사용해 주신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쁠까요!"
손에 들린 검은 덩어리 안에는 안개처럼 정해진 형상이 없으면서도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갇혀서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는 어떤 것들은 자기들을 꺼내 달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소름 끼치는 물건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며 레오 플로이드는 눈을 슬쩍 피했다.
"흠흠-! 그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직 거부감에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오에게 이스메이가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제 이야기만 잠시 들어보시겠어요? 레오 님이 거절하신다면 바로 물러나서 이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
··
이야기를 끝내고 여관에서 나와 네마 나타스의 마차에 이스메이가 탑승하고 뒤따라 마차에 오른 번스타인이 문을 닫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스메이님··."
"응?"
"아무리 '그것'이 대단하다 해도 저런 자가 5기사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번스타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던 이스메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한 명의 흑마법사로서 질문에 단정을 짓지 못한다는 게 아쉽지만 모든 천운이 따른다 해도 힘들겠지. 가벼운 부상이나 입히면 다행일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런데도 단정을 짓지 못하신다는 말씀은?"
마차의 창틀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톡톡 치며 이스메이는 답을 주지 않고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번스타인. 인간이 계약이나 악마의 살점을 통해 악마나 마물이 되었을 때. 그 개체의 힘과 능력은 순전히 계약한 악마의 힘에 영향을 받나? 아니면 생전 인간의 고강함에 따르는 걸까? 아니면 탁하고 부정한 감정? 혹은 전부?"
"···아직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스메이가 꺼낸 질문은 악마를 경시하는 흑마법사 집단인 블랙서클을 제외한 흑마법사들 모두가 궁금해하며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흐음~ 나도 답을 듣자고 물어본 건 아니야. 저 망아지도 어떤 면으로 이쪽에서 선택받은 인간이니 상상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길 기대한다는 거지. 생각하는 만큼만 해줘도 충분하고."
"확실히 이스메이님의 말대로 결과가 나빠도 연구의 표본이 되고··· 장기적으로 보면 어떤 결과든 저희가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커다란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균열을 여기저기에 만드는 게 우선.
특히 자신들 같은 집단은 어떤 계획을 잡아도 최소가 몇 년 단위.
지금 같은 행위도 언제 피어날지 기약이 없는 씨앗을 뿌려두는 것과 같다.
"그렇지~ 지금은 그거면 된 거야. 급하게 일을 하면 꼬리를 밟혀 헬 브룸 꼴이 난단다."
*****
리케가 점심시간에 일이 있다며 사라지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가 끝나기 바로 직전에 자신들이 있는 본관에 돌아온 리케는 무표정을 지키고 있지만 어딘가 들떠 보였다.
처음 아무 생각 없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물었을 때 리케는 그저 침묵과 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기에 세리아도 그렇고 자신도 리케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 캐물을 생각은 없지만 무슨 일로 나갔다 왔는지 궁금하긴 하다.
'···좋은 일이면 된 거지!'
리케가 기분이 상하거나 가라앉아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미세하게 톤이 오른 리케는 불현듯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오다가 실전 교관님을 봤는데 고양이랑 놀아주고 있더라. 오늘 수업 없지 않나?
그 말에 클로에는 발을 멈추고 걷는 방향을 돌릴 뻔했지만.
일단은 생도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강의실로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오늘은 오셨구나! 지금은 수업을 가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언제까지 계실까?'
고양이라 말하니 위치를 알 것 같았다.
이번 수업이 끝나면 바로 달려가보자는 생각을 하며 클로에는 강의실에 들어와 뒷문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라버니를 찾아다니기 시작하며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혈육이 아닌 타인.
그것도 남성에게 무언가 권유하는 것은 오라버니를 제외하고는 해 본 적도 없거니와.
정말 해야 한다면 긴 시간 마음의 준비와 미리 상황을 예상하고 꾸려나가는 대본이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내용만을 덜렁 들고 상대를 찾아다니고 있다.
"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위치는 역시 여기가 맞았다.
벤치에 누워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 있는 오라버니가 눈에 들어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자신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기에 자리에 멈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걸어서 접근했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살짝 눈을 굴리고 있으니 마나가 차음을 목적으로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 잘 지내셨나요?"
"나는 잘 지냈지. 클로에는?"
"저도 오라버니 덕분에··· 먼저! 과분한 선물에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검이 있었다면 가문에서 배웠던 제식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생도의 입장.
고개를 푹 숙이니 잿빛 머리가 그에 따라 샤르륵 내려왔다.
"그 정도로 과분하기는. 마음은 충분히 받았으니 고개 들고 편하게 앉아."
"아·· 네에!"
지금처럼 옅은 웃음기가 섞여있는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분위기를 편하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복용할 때 춥지는 않았어?"
"어, 언니 덕분에··· 괜찮았어요."
"하긴 에클레어의 실력이라면 빙정쯤은 우습게 다루겠지."
오라버니는 빙정의 복용을 돕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걸까?
오늘까지 그 장면을 수십 번 되새겼었지만 피부가 간질간질 하니 부끄럽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손등을 살짝 꼬집어 번뇌를 날린 클로에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바쁘시지 않다면 다음 실전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
아직 식사 장소도 예약하지 않았고 답례품도 사지 않았다.
시기도 확실히 정하지 않고 왔다는 걸 알아차린 클로에는 조금 시간을 두고 약속을 잡았다.
"좋네. 답례라고 부담 가지거나 무리하지 말고. 편하게 먹자."
가볍고 긍정적인 대답에 마음이 편해졌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