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 절대 그쪽 아님 오해 금지!
흔히 게임이나 소설의 주인공 같이 빙의자가 되는 일을 겪었으니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놀고먹어도 근육질의 몸상태와 떨어지지 않는 체력, 조각 같은 얼굴에 미성, 든든한 가문에 아름다운 약혼자까지.
하지만 이 야만적이고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은 어설픈 정신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씨발! 씨이발··! 진짜 다 끄, 끝이다···.'
이딴 건 꿈이어야 했다.
식은땀을 잔뜩 흘린 채로 일어나 현실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하는 끔찍한 악몽.
정신이 멍하니 저택까지 돌아오는 과정도 흐릿하여 기억에 남지 않았다.
끌려오다시피 수도를 떠나 영지에 돌아왔고.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한쪽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아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불안감과 우울감에 휩싸여 모든 일에 의욕을 잃는 건 두 번의 삶을 모두 털어내 봐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똑- 똑-
"도, 도련님··."
"야이·· 씹! 내가 나가있으라 했지?"
생활을 위해 가문에서 여자 시종을 붙여줬지만 그 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아서 생활할 테니 꺼지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명령을 듣지 않고 다시 돌아온 것이 자신의 팔이 망가졌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열이 올랐다.
공포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시종이 빠르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로버트는 참지 못하고 시종에게 스킬을 쏴버렸을지도 모른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가주님이 도련님을 찾으셔서··."
"··아버지가?"
한순간에 화가 싹 내려가며 긴장감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전생과는 비교도 못할 진짜배기 부권제 사회 하룬 제국.
볼트 후작가의 저택에서 후작인 아버지의 존재는 유일신으로 보일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
교단을 떠나 영지의 저택으로 돌아온 로버트는 제대로 휴식할 시간도 없이 부모에게 불려 '족보'의 존재를 들었다.
곰팡이 냄새가 날 것 같은 책을 건네어 받은 로버트는 적혀있는 글을 눈으로 읽으며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 이름 : 데가넬로 ]
▷그레이 더스트 출신 빌런으로 오컬트계 초능력자.
▷디북 박스의 영향을 받게 된 신체는 성법술이나 그와 유사한 공격에 취약하다.
▷범죄집단 블랙넥 아래에서 자랐으며 여성의 모성애와 동정심을 자극하는 연기에 능하다. 블랙넥에서 소매치기와 구걸 담당을 하며 자연스레 익힌 것으로 본인이 원한다면 즉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수준이다.
▷타락한 물과 바람의 정령을 애용하며 위기감을 느끼면 생명력을 태워서라도 이기려 든다.
··
··
"그레이 더스트라는 지역과 블랙넥이라는 집단은 아무리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가문의 유서 깊은 족보가 거짓말을 할 일도 없지."
"···."
정보를 듣고 다시 한번 눈으로 읽는 순간 로버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어딘가 익숙하면서 작위적인 활자의 나열에 머리가 아파왔다.
'빌런? 초능력자? 무슨 개 같은··· 게임 공략법이냐고.'
겹쳐오는 스트레스로 정신이 핑 도는 상황에 냉랭한 목소리가 로버트에게 떨어졌다.
"도대체 둘이서 뭘 하고 있던 거냐? 괴한에게 습격당한 것은 운이 없어 불가항력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무단결석을 하며 방탕하게 생활하라고 아카데미에 보낸 것은 아니다."
"이 어미도 앞으로가 걱정이구나. 그런 몸으로 아카데미를 계속 다닐 수는 있겠니?"
로버트는 알 수 있다.
말과 달리 자신의 부모는 이번 일을 불가항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호적상 부모인 이들은 자신을 훈계할 때 예전과 같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대감이고 애정이고 완전히 식어버린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들을 보는 눈빛도 저것보다는 따뜻할 것이다.
'그래. 항상 이런 게 제일 싫었지··.'
능력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한순간에 애물단지 취급을 받게 되는 이 세상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자칭타칭 고귀한 푸른 피라는 자신의 부모들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의 귀족들 관점에서는 이것이 당연하고 귀족적인 행동이고.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데 애정을 가지고 자식을 싸고돌면 유별나다고 할 정도다.
빙의 전 기억이 선명한 로버트가 얼마나 시간을 들여도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염증은 산불보다 빠르게 퍼져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변명할 생각도 없어 고개를 숙인 로버트는 이 숨 막히는 상황을 끝낼 말을 골라서 내뱉었다.
"아카데미··· 아카데미만 끝내고 제가 알아서 살 길을 찾겠습니다··."
"쯧- 나가봐라."
쿵-
어색한 팔로 쓸데없이 거대한 문을 닫고 부모가 있는 방에서 등을 돌려서야 로버트는 숨이 트였다.
"후우우ㅡ"
보이지 말라고 했던 시종이 한 발치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한 로버트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팔로 주먹을 쥐고 때릴 듯이 확 들어 올렸다.
"꺼져 좀!! 확 진짜··!"
"꺄악!"
평소 로버트의 상상으로만 이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고 끊어졌던 생각들.
이성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던 댐을 단번에 부숴버린 사건과 부정적인 감정들은.
원래라면 머리에서 끝나야 했던 생각과 행동들을 거리낌 없이 현실에서 표출하게 만들었다.
"짜증나네."
때리는 척만으로 두려움에 떠는 시종은 버려두고 로버트는 방에 돌아와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한테도 차라리 아이작이 가지고 있는 유능한 시종이 있었으면··.'
결과가 어떻고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런 대우를 받으며 저택에 오래 있으면 자신은 확실하게 미쳐버릴 것이다.
로버트는 일단 아이작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아카데미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원래 세상이 아니어도 좋다. 이 몸이 아니어도 좋다.
이곳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세상에서 다시 빙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미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이라고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니.
*****
1교시를 통째로 들어내고 아카데미에 출석한 생도들이 강당에 모였다.
학년은 관계없이 1학년부터 3학년 생도를 수용한 장소에 살짝 피곤한 얼굴의 도란이 허전한 소매 하나를 펄럭이며 단상에 등장했다.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단상에 있는 마도구를 통해 중후한 목소리를 퍼트렸다.
ㅡ허례허식은 생략하고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자리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소문이 돌아 이미 알고 있는 생도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카데미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비견되는 참극을 일으킨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행방도 묘연한 상태.
같은 인물의 추가 범행으로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은 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혹시 모르니 아카데미에서도 외진 곳은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말이었다.
ㅡ제국의 경비대와도 협조를 하고 있으니 사태가 진정되거나 해결될 때까지 되도록이면 혼자 다니지 말고. 아카데미 밖에서도 큰길로 다니면서 골목길은 되도록 피하기를 바랍니다.
추가적으로 아이작과 로버트의 진술을 토대로 한 범인의 외형을 알리고 나서야 자리는 끝이 났다.
질서 정연하게 강당을 나서자마자 생도들은 웅성거리며 사건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다들 어디 있지··?'
기사 학부가 먼저 나오고 검술 학부가 나오는 순서라 쏟아지는 생도들 사이에서 리케와 세리아를 찾아 클로에는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오! 클로에다!"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따라 눈을 움직이니.
자신보다 신장이 큰 검술 학부 생도들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보이며 빨간 머리를 찰랑이는 세리아가 보였다.
세리아의 뒤를 따라 나오는 리케까지.
1교시가 학장의 긴급 소집으로 날아가버렸는데 수업을 아예 날릴 이유가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끝났기에 일단 셋은 모였다.
"어디로 가지?"
당장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길게 남아 이미 다른 생도들은 무리를 지어서 각자 시간을 보낼만한 장소로 움직이고 있다.
"그냥 매번 가던 카페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세리아의 말에 리케가 시원하게 답을 내렸고 누구도 반대의견은 없어 발걸음을 움직였다.
지금 아카데미를 나가는 길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보다 복잡했다.
보통 집에 가는 시간은 학부와 학년에 따라 다르다 보니 생각보다 여유가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한 번에 움직이니 걷는 속도도 제한되었다.
"으아아~ 복잡해!"
세리아가 우는 소리를 하며 클로에의 팔에 매달려왔고 클로에는 웃으며 그걸 받아준다.
"다른 분들도 저희와 비슷한 생각을 하나 봐요."
클로에의 말대로 아카데미 내부와 정문 근처는 갑자기 생긴 휴식을 즐기기 위한 생도들로 가득했다.
상권이 활기를 보이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셋은 목청을 높이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선호하다 보니 매번 가는 그곳 말고는 발길이 잘 가지 않았다.
····
이 가게에 오면 리케는 매일 똑같은 메뉴를 선택했다.
쪼르륵-
매번 마시는 홍차에 우유를 타는 리케를 시작으로.
올 때마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는 세리아와 클로에는 서로의 음료를 평론하기 바빴다.
잡담을 하다 보면 드문드문 찾아오는 편안한 침묵.
세리아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대화에 여유로운 틈이 생기면서 클로에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번에 고민은 아니고 의견을 조금 듣고 싶은 게 있어요··."
"저번의 연장선이야?"
세리아의 물음에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어려운 문제라 조금 더 생각해보고 있어서··."
"시기라는 게 아직 여유가 있으면 생각을 많이 해보는 게 좋지."
리케의 말에 클로에는 작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덕분이에요."
접시에 있는 디저트를 비운 세리아가 초코가 묻은 포크를 핥으며 클로에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엔 무슨 일이야?"
본론을 꺼내려고 했던 클로에는 특유의 입술 파도치기를 시전 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절대 그쪽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쪽··?"
'그쪽'이라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세리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클로에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신세 진 게 많은 분이 있어서 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도 하고 식사도 대접해야 하는데·· 선물과 메뉴를 선정하기가 힘들어서요···."
"흠흠~ 그렇군."
리케는 침묵을 지키며 귀를 기울이고 세리아는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듣기로 음식은 가리시지 않는다고 들었고··· 선물은 처음에 향수를 생각했었는데·· 취향을 많이 타기도 하고 남성 향수는 역시 잘 모르겠어서 다른 걸 생각 ㅡ."
팅-!
세리아가 핥고 있던 포크가 비어있는 접시에 떨어졌다.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