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8 - 두 번째 유랑자 -4- (삽화 有)
'멸망직전이라 해도 현대에서 살았던 놈 치고는 제법인데?'
게임이 아니라 실물로 마주한 데가넬로는 힘을 떠나 성정에서 질 나쁜 용병과 비견될 정도로 사람을 죽이고 장난치는데 도가 튼 놈이었다.
로버트에게 유효타를 한번 더 가하려 했으면 막았을 텐데.
죽기 바로 직전의 정말 아슬아슬한 선에서 공격을 멈추고 자신만의 독특한 마무리를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복? 상황판단도 뭐- 나쁘지는 않고.'
옷을 강탈하는 행동은 내장에 손상을 주거나 팔을 자르기 전에 충분히 가능했고, 하려면 그때 했어야 할 절차이지만.
데가넬로는 딱 봐도 폭력이 주는 쾌락과 흥분감에 취해있었으니···.
그래도 마무리를 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뒷일을 생각했다는 건 임기응변과 생존에 나쁘지 않은 재능이 있는 것.
삭막한 하룬 제국에서 살아가기에 로버트보다 데가넬로가 훨씬 좋은 새싹인 건 확실하다.
그래봐야 비교대상이 지금의 글러먹은 로버트라 더 뛰어나다는거지.
실제 두 번째 유랑자도 거기서 거기.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네.'
내 인생은 한창이지만 '아카라이트'라는 게임의 진척도로 따지면 아직 초반부나 다름없다.
아카라이트를 처음 하는 게이머라도 볼트 가문의 족보를 두 번째 유랑자에서 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인데.
현실은 역시 픽션을 넘어서는 상상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다.
'로버트 가문에서 난리가 터졌겠어.'
실시간으로 족보가 들썩이며 데가넬로의 흉흉한 정보가 기입되고 있을 것이다.
수업을 무단결석하고 둘이서 사고를 쳤으니 아무리 가문의 힘이 좋은 둘이라 해도.
내가 아카데미에 오게 된 삼황자 사건처럼 아카데미를 걸고넘어지거나 따질 수도 없을 터.
둘이서 무슨 짓을 했는지 가문과 아카데미에서 추궁하면 말이나 할 수 있을까?
나를 전력으로 밀어주는 도란 학장의 남은 팔도 안전하니 지금 상황이 딱 좋다.
'아이작은 그대로 둬도 죽지는 않겠지만···로버트는 곧?'
타고난 튼튼한 신체와 체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당장 교단의 인물이 달려와서 성법술을 사용해 주거나 양질의 포션을 투약하지 않으면 로버트는 데가넬로가 마무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죽을 것이다.
잘려나간 팔도 마찬가지.
내 몸에 있는 흉터나 리케의 흉터처럼 일정시간이 지나버리면 일반적인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영역도 있다.
특히 흉터보다 심각한 신체의 절단은 최대한 빨리 교단으로 가거나 응급처방을 해두지 않으면 다시 붙이기가 힘들다.
'그래도 볼트 가문은 대대로 교단이랑 사이가 깊으니··· 살려두기만 하면 교단의 높은 분에게 부탁해서 붙이지 않으려나?'
팔을 붙인다 해도 치료가 늦어질수록 후유증이 강하게 남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것도 힘들어질지 모른다.
허나 완전한 결손보다는 외형적으로 존재라도 하는 게 정신건강에 무조건 좋지 않을까.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식이나 다름없는 팔이라도.
'멘탈도 약한 놈인데 외팔이가 돼서 자퇴하거나 영지에 틀어박히기라도 하면···.'
아이작이랑 짝짜꿍 해서 차원을 계속 열어줘야지. 아카라이트 주인공이 돌아갈 의욕을 잃으면 나도 아쉬워진다.
··
··
숲에서 걸어 나와 지척까지 접근했음에도 데가넬로는 둘의 옷을 벗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짝-짝-짝-
"우리 친구가 아주 큰 일을 해줬어."
족보를 빼준 유랑자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박수를 치며 다가가니 데가넬로의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이유는 예측하고 있다.
공명하듯 부딪치며 불쾌한 것이 오지 못하게 밀어내는 느낌.
[ 부정함에 강한 내성을 얻습니다. ]
첫 번째 형상인 나찰을 완성하면서 백염과 함께 굴러들어 온 내성.
데가넬로가 디북 박스에서 몸뚱이로 옮겨 담은 그것들은 나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목줄 풀린 맹견을 마주한 어린아이처럼 겁을 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내 몸에서 뭔가 보이나?'
데가넬로는 느끼지 못해도 악령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악령의 상자에 갇혀있던 것들은 타락한 인간의 영(靈)이 아니다. 단순한 인간의 영혼으로는 저런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해괴한 힘을 낼 수 없으니.
저 기틀을 만들고 쌓은 것은 데가넬로가 아닌 전 소유주.
선대 사용자가 정령들을 타락시켜 악령으로 만들어 둔 형태라 초능력이라 지칭할 법한 기괴한 힘을 부리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ㅡ."
빡!
우드득-
마나가 없는 순수한 타격.
대충 휘두른 주먹에 직격 당한 면상이 쥐어짠 고무처럼 휘리릭 돌아간 데가넬로가 바닥에 쓰러져 움찔거렸다.
"오~ 안 죽어? 실제로 보니 더 신기하네."
퐁-
꼴꼴꼴···
로버트의 구멍 난 복부에 포션을 흘려 넣으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씨··발! 그래. 두, 둘의 동료겠지!"
우득- 드드득!
분에 넘치는 고급 포션으로 안색과 호흡을 되찾아가는 로버트를 보며 데가넬로는 몇 바퀴나 돌아간 목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이거? 동료는 아니고. 아직은 쓸 곳이 있어서 죽으면 아쉽거든."
파악!
목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동시에 땅을 박차고 거리를 벌린 데가넬로의 손바닥 위에 물이 찰박거리며 모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슬라임을 연상시키는 수분 덩어리가 모이자 데가넬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티브가 공장에서 쓰는 워터젯이라 했지?'
아이작의 눈에 쏘아냈던 투사체는 대기 중의 수분을 모으고 압력으로 눌러서 쏘아내는 것.
물과 압력을 이용한 가공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게임의 개발자가 말했었다.
치이익-!
데가넬로는 아이작에게 쏘아냈던 힘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으로 물을 대포처럼 쏘아냈다.
찰팍.
"애새끼도 아니고 물장난··· 아니지 대가리 수준은 애새끼가 맞잖아?"
"미친··!"
압력이 얼마나 강해도 대상을 뚫어내지 못하는 순간 무해한 수분.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기를 탁탁 털어내니 데가넬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고 뒤를 돌아 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계가 좋지 않은 나무사이를 달리며 데가넬로가 빠르게 사라졌다.
'남자랑 숨바꼭질이라.'
응급처치가 끝난 로버트와 아이작에게서 멀어지는 건 나에게도 편했지만 기분은 실로 더러웠다.
····
데가넬로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롭게 따라붙는 나를 보며 도망가는 걸 포기했다.
발을 멈춘 곳은 돌바닥을 정성스럽게 깔아 둔 아카데미 야외 훈련장 중 하나.
오래 사용하지 않아 타일 사이로 잡초가 올라와있다.
'옷은 벗어둬야겠는데.'
데가넬로의 다른 능력을 생각하면 몸은 멀쩡해도 옷은 찢어질지도 모른다.
리케가 어울린다며 사준 셔츠를 훌렁 벗어 나무에 정성스럽게 걸어두고 무기를 뽑아냈다.
"글레이프니르."
촤르르ㅡ
백날천날 허공에 휘두르는 것과 다르게 실전에서만 쌓을 수 있는 무기의 숙련도가 있다.
나찰이나 백염을 사용하면 그 자리에서 한방에 녹아내릴 데가넬로지만.
대충 쓰고 버리기에는 귀중한 샌드백이다.
힘조절 없이 마음대로 휘둘러도 되고 유랑자는 죽고 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인간을 대상으로 살의를 가지고 글레이프니르를 휘둘러 볼 기회는 귀했다.
탁-!
늘어지게 긴 사슬을 양손에 들고 돌바닥에 안착하니.
데가넬로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와 주위를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푸화아악!!
부정적인 영향을 주려는 듯 검은 안개가 내 몸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찰에서 오는 내성 때문인지 앞으로 걸어가니 검은 안개가 도망치듯 갈라졌다.
"준비는 다 됐고? 아직 안 됐으면 계속해."
"미친 새끼. 크큭··."
눈 전체가 검게 물든 데가넬로가 낄낄 웃었다. 아까보다는 제법 볼만해진 꼴이다.
피부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코와 눈에서 검붉은 피를 줄줄 흘리는 게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는 행색.
생명력을 태워 도핑하는 이 태도는 흑마법사들과 닮아 반가운 마음까지 든다.
"다 됐으면 빨리 발악 좀 해봐."
데가넬로가 주력으로 다루는 악령의 힘은 물과 바람.
끈적한 검은 안개가 요동치며 날카로운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카아악-!!"
피비빅- 픽-!
칼날처럼 날아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이 순간.
셔츠가 찢어지지 않게 벗어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악··! 으어··?!"
질척한 피를 뚝뚝 흘리는 데가넬로의 입에서 일어난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혈귀(流血鬼)가 발동합니다.]
'저놈한테 이 이상은 바라면 안 되겠지.'
생명까지 태우며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을 텐데 상처가 너무 얕아서 당장이라도 아물 것 같다.
피부만 살짝 찢어진 정도라 능력치의 상승폭도 느끼기 힘들만큼 미미하다.
그래도 이 종이 한 장처럼 얇은 힘이 새로운 길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요즘 좀 갑갑해서 진심으로 휘둘러 보고 싶었는데 잘 됐어. 딱 10초··? 아니 5초만 버텨봐."
촤륵! 촤르르-
첫 실전을 맞이한 글레이프니르와 최대한 소통한다는 느낌으로.
이때까지 열심히 합을 맞춰온 것을 보여주자는 마음가짐이 전해졌을까.
휘두르면서도 손에 딱딱 달라붙는 느낌을 즐기며 속도를 더욱 높여갔다.
붕- 부웅! 치직-! 파지직!
바람을 묵직하게 가르는 소리가 점점 날카롭게 빨라지고 오러까지 흐르기 시작하자.
데가넬로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코에 흐르는 걸쭉한 피를 닦으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
··
"후우~ 개운하네."
쇄(鎖)를 다루는 방법에 새로운 깨달음이나 소득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확답은 못하겠다만.
글레이프니르를 잠시지만 마음껏 휘둘러보니 속은 시원하다.
잠시를 버티지 못하고 수십 갈래로 찢어진 데가넬로는 유랑자 특유의 죽음을 맞이했다.
파스스- 파삭!
첫 유랑자였던 로메리우스와 같은 형태로 데가넬로 또한 조각조각 깨지며 사라지기 시작한다.
"예스! 이거지."
데가넬로가 완전히 증발하고 자리에 남겨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이번 유랑자가 남기고 간 물건.
[ 디북 박스 ]
▷담아낸 영(靈)을 타락시킵니다.
▷완전히 타락시킨 영(靈)은 사용자에게 종속됩니다.
-엑소시스트들이 악령을 구속하기 위해 사용한 물건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주도권이 넘어갔다.
-악령의 상자라 불린다.
흑마법사들의 제물함과 비견되는 이 불길한 악령의 상자를 어떻게 쓸 것인가? 용도는 확정적으로 정해져 있다.
게임에서는 로버트가 디북 박스를 교단에 가져가면 사제들이 이 불길한 물건은 뭐냐고 난리법석을 떨며 성법술을 이용한 정화의식을 하게 된다.
교단과의 친밀도도 올리고 갇혀있는 정령들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제일 중요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어설픈 성법술 보다 백염이 더 확실하겠는데?'
게임에서는 없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내 직감을 건드린다.
성법술은 아니지만 '갱생'이라는 키워드를 품고 있는 백염만큼 확실한 정화도 없을 것이다.
제일 귀찮은 건··· 교단에 이걸 가져갔다가 얼마나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른다.
'좋은 일을 했다면서 형제님~ 형제님~ 하며 귀찮게 달라붙어 올지도.'
선의를 가지고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사제들은 악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놈들보다 대하기 힘들다.
화륵-!
타닥·· 탁··
손에서 일어난 백염이 주인을 잃은 디북 박스를 태우기 시작했다.
나무가 타는 소리는 들리지만 연기도 나지 않고 불꽃의 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쿵! 끼기익-! 끼익! 쿵! 끼익!
악령을 품고 있는 장롱의 문이 벌컥!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오컬트계 초능력 다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보여준다.
"효과 좋네."
게임과 똑같은 장면이 일어나는 걸 본 나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아아아-!!
인간의 것이 아닌 음울한 비명소리가 숲을 서늘하게 울리다 잦아들었다.
악령의 상자가 완전한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지자, 풀려난 영(靈)들이 내 주위를 춤을 추듯 빙글빙글 맴돌다가 흩어진다.
이게 두 번째 유랑자 데가넬로가 남기는 보상.
[ 정령과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
··
··
[ 정령을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