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 두 번째 유랑자 -1-
에클레어가 기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절도 있는 걸음을 밟아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뒤.
내 여자와 귀한 시간을 즐긴 흐뭇함을 간직한 채 길드 건물로 돌아왔다.
지하의 선술집에선 여전하게 시끌벅적함이 올라오지만.
모험가가 몰려서 바쁜 특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접수원들이 있는 1층은 지금처럼 한적함이 느껴진다.
"흐흐흠~"
당장에 해야 할 일은 끝났는지 콧노래와 함께 손톱을 관리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접수원에게 다가갔다.
'저번에도 저런 상자였는데.'
실내의 벽면 한쪽에 모험가 길드의 인장이 박힌 상자들 사이. 단색으로 깔끔하고 튼튼해 보이는 상자가 두 개.
딱 봐도 저것이지만 확인차 접수원에게 물어보았다.
"옆에 저게 나한테 온 거야?"
내 질문에 하던 일을 멈춘 그녀는 경력이 느껴지는 정중한 손동작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아아-! 네! 겉면에 무늬가 없는 상자 두 개가 로만님 앞으로 온 물건입니다."
상자에 담긴 포션을 인벤토리에 대놓고 쏟아 넣을 수는 없기에 일단은 그대로 들고나가야 한다.
그전에 내용물 확인을 위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상자를 열어보았다.
부스럭-
"오-!"
이런 말도 이상하지만. 포션의 물량과 종류보다는 형태에 감탄을 했다.
알록달록한 액체를 품고 있는 유리병들 하나하나가 고상한 작품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여전하구나.
제일 많은 것은 여신을 모티브로 한 듯 날개가 달린 여성이 양각되어 있는 것들.
황실의 의뢰를 수행하던 당시 소모품을 지원받은 적이 있기에 이 독특함은 되려 눈에 익었다.
'다음엔 아예 평범한 병이라고 조건까지 말해야겠네.'
이렇게 수제 혹은 특수한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유리병은 제국의 표준 규격을 대놓고 벗어나기에 어떤 포션인지는 바닥이나 뚜껑을 봐야 용도를 알 수 있다.
받는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떨까 싶지만··· 소모품에 이런 짓을 하는 건 정말 비효율의 극치라고 생각된다.
허나 높은 분들은 이런 곳에서라도 자신들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듯하다.
"흐음-"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미용이라면 껌뻑 죽는 접수원을 위해 옛날에 노팅엄을 두들겨 패고 챙겨뒀던 재생물약을 하나 꺼내주었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간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물건을 받게 되면 주위에 체면치레는 한다.
"자 ~ 우리 고생하는 접수원에게 선물 하나."
"어머! 감사해요!"
처음부터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받아가는 손이 참 빠르다. 한번 튕긴다거나 거절을 안 하는 솔직한 태도가 시원시원하니 좋다.
행정을 담당하는 길드의 접수원과 모험가의 사이가 좋아서 나쁠 일이 없기에.
이렇게 하나씩 풀어주면 내가 잊고 있을 법한 귀찮은 일이나 갱신해야 할 정보 같은 것들을 알아서 처리해 준다.
실제로 어설픈 모험가들한테 베푸는 것보다 길드의 접수원을 챙겨주는 게 제대로 된 값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릴리네도 하나 챙겨주고··· 라크는 좀 괴롭히다가 줘야겠네.'
상자에 있는 포션 몇 가지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상자를 닫은 뒤 그 위에 다른 상자를 올려두었다.
"좋아. 그럼 잠시 내려갔다 올게. 저 물건들 누가 안 건드리게 좀 봐주라."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뜻밖의 횡재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접수원을 뒤로하고 지하 선술집으로 향했다.
끼익- 끼익-
속이 문드러져 정겨운 소리를 내는 목재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다.
아까 테이블에서 주워 먹은 밥값을 치르기 위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다행히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크와 릴리네가 보인다.
그리고 예상외의 인물도 테이블에 합석해 있었지만 모험가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저런 게 모험가긴 하지. 어디··· 청소는 하고 있고.'
썩은 표정으로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니 술은 완전히 깼나 보다.
나를 보고 뒷걸음질을 치며 놀라는 동명이인을 지나.
라크와 릴리네 그리고 한 소녀가 자리한 테이블로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오늘은 오래 있네. 의뢰 안 나가는 날?"
"히익-!!"
뒤를 돌아 내 얼굴을 본 까무잡잡한 소녀는 한쪽 눈을 가린 금발이 들썩일 정도로 발작을 하며 놀랐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오래 있으면 기절하겠네.'
리케보다 왜소하여 어려보이지만 세리아를 생각하면 막상 그것도 모를 일.
소녀의 반응에 신경을 안 쓰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시선을 돌려 릴리네에게 고정시켰다.
"오늘 저녁에 출발할 것 같아요. 로만씨는 일 끝나셨나요?"
"어~ 뭐 그렇지. 또 나가야 하지만 당장 하나는 끝."
"로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는데 자리에 앉지 그래? 음식도 시켜줄 테니."
"뭐?"
"밥이든 술이든 좀 더 먹으라는 이야기지. 앉아 앉아!"
뜬금없이 무료로 밥을 사겠다고? 이것보다 수상한 일은 없다.
지금 라크의 미소는 어딘가 음흉한 것이 기분 나쁜 아저씨 그 자체였다.
'어우- 보기 힘드네.'
에클레어를 보다가 밥맛이 싹 가시는 남정네의 얼굴을 마주하니 괴롭히다가 포션을 주겠다는 생각도 바람처럼 가셨다.
"바빠서 이제 가야 돼. 이건 아까 먹은 밥값."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유리병을 하나씩 받은 둘의 눈이 커졌다.
"···로만씨! 이건 너무 과해요!"
"액체를 버리시려면 하수구나 화장실에 버리면 됩니다. 유리는 저기에 술병 버리는 곳이 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릴리네의 어깨를 잡아 다시 앉히며. 필살기 '안 마실 거면 버려라'를 사용하자.
"진짜 치사하게···."
그녀는 오리처럼 입을 내밀며 가죽 가방에 포션을 챙기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로만씨. 정말 감사해요- 요긴하게 잘 쓸게요. 보답도 할 거고요."
"보답? 기대 안 하고 기다릴게."
릴리네와 훈훈하게 꽃향기 나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라크가 거대한 성량으로 사이를 파고들었다.
"크하하! 이번에 크게 한탕했냐? 돌려달라 해도 안 준다!"
라크의 말은 깔끔히 무시하고 돌아가려던 나는 이 파티에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챔버스도 있었지. 하나 챙겨줘."
"오우! 확실히 전해주마!"
라크에게 포션 하나를 추가로 던져주고 바로 옆에서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소녀의 앞에 내용물이 찰랑이는 포션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의문과 공포가 섞인 얼굴로 나를 천천히 올려다보는 소녀에게도 포션을 하나 던져주자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의문이라는 감정이 더 진해졌다.
탁-!
"모험가라는 게 이렇게 뜬금없는 행운도 있고 아까 같은 불상사도 있는 거다."
"호오오~"
"쉿··!"
눈치 없이 흥미롭다는 목소리를 내는 라크를 릴리네가 팔꿈치로 툭툭 건드려 조용히 시켰다.
"앞으로 자주 볼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렇게 다니려고? 고개 들고 어깨 펴고 다녀. 끝난 일이잖아."
"··아! 감사··합니다!"
"죽지 말고 오래 살아라. 난 일 보러 간다 고생들 하고."
테이블에 인사를 대충 던지고 그대로 선술집에서 올라온 나는 양팔에 상자를 하나씩 끼고 길드를 빠져나왔다.
이제 아카데미에 가서 정보길드에서 소개받은 인력을 돌려보내고 지겨운 경계근무를 설 시간이다.
··
··
"고생했다."
"저런 애송이들 보는데 고생은요. 긴장감도 없는 일을 하고 이만큼 받는 것도 죄송할 정도임다. 아차··! 물론 깎아드릴 수는 없슴다!"
진짜 이름도 모르고 만날 때마다 목소리에 모습까지 다르지만 일 하나는 잘하는 녀석.
내가 다시 뺏기라도 할까 금화가 든 주머니를 황급히 숨기는 속물적인 태도에 속사포 같은 빠른 말투는 여전했으나.
보유 중인 스킬 혹은 아티팩트를 사용했는지 신장과 뼈대는 저번보다 작아져있다.
거기에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아카데미 정복을 입고. 위화감 없는 새로운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채 습관까지 바꿔서 행동한다.
정말 지나가다 본 것 같은 흔한 얼굴이라 신기할 따름.
"이제 가봐."
"예입! 고생하십쇼!"
다른 건 몰라도 발하나는 빠른 녀석답게 뒤도 안 돌아보고 쌩 사라지는 걸 확인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무슨 일로 내가 저것들을 관찰하는지 절대 궁금증을 가지지 않는 것.
그게 정보길드를 포함해 길드에 엮여있는 인물들의 명줄이 긴 이유일 것이다.
"후우-"
내가 오기 직전에 수업을 빠진 둘이 아카데미 부지와 이어진 숲 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상기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조차도 아직 확정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로버트와 아이작이 동행해서 움직일 경우는 높은 확률로 실험에 연관되어 있을 터.
'이런 곳에 돈 아끼는 건 미친 짓이지.'
오늘 로버트와 아이작에 눈을 붙여두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시기를 놓쳐서 일어나는 사고와 관련된 불행은 나태함이나 안일함에서 온다는 신념을 더 깊게 새겼다.
'타이밍만 잘 보면 '그것'도 뺄 수 있겠는데?'
아카라이트 주인공인 로버트 볼트의 특전은 훌륭한 스킬과 신체, 재능, 성장속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작 로버트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게임에서는 일회용 길잡이나 도움말처럼 보이는 볼트 후작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아티팩트는 '족보'.
가문의 인원 한 명당 한번 사용이 되는 일회용이지만 현실에 대입하면 상당히 거슬리는 물건이다.
능력은 이름을 새겨 넣고 피를 흘려 넣으면 당사자가 볼트가의 직계 혹은 방계라는 혈통을 증명한다.
로버트가 태어났을 당시에 조금 크자마자 등록이 되었을 것이다.
게임을 하다가 막히는 순간 알 수 있지만 아티팩트인 족보의 진짜 힘은 그게 아니다.
볼트가의 '직계' 인물을 해하려 하는 생물이 직계를 죽이는 데 성공하거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커다란 상처를 주는 유효한 성과를 냈을 경우.
그 상대에 대한 정보가 족보 한 페이지에 기입된다. 이 정보는 제법 상세하여 남의 손을 빌려도 배후가 드러난다.
게임에서는 벽이 되는 스토리나 적에 대한 공략법이 되는 도우미 느낌의 아티팩트이지만.
현실에서 내가 족보에 기입되면 무슨 정보가 들어갈지 모른다.
'혹시나 일이 터져도 손 쓰기가 껄끄러웠는데 이번에 족보를 빼두면 편해지겠어.'
지금 로버트의 실력을 생각하면 아이작과 협공을 한다 해도 두 번째 유랑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최소 네 번째 차원까지는 열어줬으면 하는 게 나의 소망이니 팔다리 하나쯤 날아가도 죽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죽으면··· 본인의 책임이니 어쩔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