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4 - 영약이 향하는 곳
딸깍-!
목함이 열리고 안에 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외견으로 봤을 때 섭취하는 식품이라기보다 보석에 가까운 형태였다.
안에는 단단해 보이는 푸른 덩어리 두 개가 있는데 크기는 엄지손톱 정도로 비슷하지만 모양은 가시가 돋친 듯 삐뚤삐뚤하니 제각각이었다.
그 작은 것들은 전생에 모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을 사면 함께 넣어 주는 드라이아이스처럼 뿌연 한기를 내뿜으며 목함 밖으로 서늘한 수증기를 흘려냈다.
굳이 감정을 할 필요도 없는 익숙한 기운은 내 고단했던 과거를 자극하며 이름을 말하게 했다.
"···빙정?"
에클레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설명을 하기도 전에 알아차리다니. 정말 해박하지 않나."
화정 혹은 빙정 그리고 뇌정 등.
정(晶)은 대기의 마나와 자연의 정기가 모여 응축되어 돌이나 보석처럼 형태를 이룬 특별한 물질이다.
정확하게 어떤 조건이 있어야 생겨나는지 알 수가 없고.
실험 자체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변수가 무한하다 할 만큼 많아 인공적인 제조가 불가능한 영약 중 하나다.
하룬 제국이 '제국'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전형적인 패권주의 정책을 앞세워 야만족들을 쓸어내고 얻어낸 드넓은 산천초목.
그곳에서 얻는 이점은 단순히 토지가 넓어지는 것을 떠나 귀한 재료가 되는 몬스터들은 물론이요 이렇게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약류도 포함된다.
"빙정은··· 하나만 해도 고맙게 받았을 텐데 왜 두 개나 주는 거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지금은 연방국을 견제하느라 제국은 강자를 잡아두는데 혈안이다."
"하나는 아예 리케를 신경 써주는 티를 내는 거네?"
이제는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던 사항이지만 황실은 리케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대강 알고 있다.
"기분이 상한 게 있으면 풀라는 사과의 의미도 있을 거다. 실제로 림노에 향하는 대가와 조건은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않았나. 위에서도 그만큼 급했다는 이야기지만."
"그건··· 그렇지?"
리케나 내가 그리 조심성 있게 행동하지 않았으니 걸릴만하긴 했으나 그걸 빌미로 삼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었다.
조건이 마음에 들어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빙정이 분명 귀한 물건이긴 해도 추가 보상으로 꺼내줄 정도로 황실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니."
림노로 향하는 의뢰에 걸린 조건이 적힌 황실의 서신 같은 것들은 원래라면 에클레어가 알 수는 없는 부분들이었지만.
연인이 되어 사이가 깊어지고 생각나는 대부분을 서슴없이 공유하다 보니.
에클레어는 내가 놓치거나 유추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는 황실의 행동에 따르는 의미와 속뜻을 금방 투영해 줬다.
내부의 분위기와 사정은 그쪽에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니 신용도 확실했다.
하지만 자연의 결정체인 이 빙정에는 문제가 있다.
"귀한 물건을 받은 건 기쁘지만··· 곤란하네."
"무슨 뜻이지?"
"옛날에 빙정을 섭취했거든."
"···!"
실제로는 빙정에 더불어 화정까지 섭취한 상태다.
앞의 두 가지를 제외 한 뇌정이나 풍정 등의 결정체들은 게임에서도 드롭되는 위치가 매번 변하는 변동성을 보유하고 있어 아직까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고정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있던 건 빙정과 화정.
이것들은 모두 아카라이트의 히든 피스에 속해있는 물건이라 내 몸에 두 개의 정(晶)이 들어앉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같은 속성의 정(晶)은 중복해서 복용하면 효과가 없어. 알고 있지?"
"이미 그것도 알고 있었나··? 나도 오기 전에 설명을 듣고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애초에 빙정이라는 물건을 보상으로 내어주는 이유는 이게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게임에서는 후반에 가면 변동성을 가지고 있는 뇌정이나 풍정, 석정이 여기저기 드롭되어서 섭취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내 앞에 놓인 빙정이 귀하다 해도 제국이 북방의 야만족을 쓸어내고 지배하게 되면서 제법 많은 수의 빙정이 황실에 굴러왔을 것이다.
몸에 좋다고 하는 걸 높으신 분들이 하나만 먹어보고 끝냈을 리가 없으니 중복 복용이 불가한 것도 알사람은 아는 사실.
"나는 됐으니. 하나는 리케를 주면 되고 하나는 키티가 먹자."
그녀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나도 이미 북부에서 야만족과 전쟁을 치르고 무훈으로 빙정을 수여받아 섭취를 했다."
이건 또 의외의 상황이지만 그녀의 업적을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하나를 어쩐다?'
남은 빙정을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처리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다른 영약과 교환하려 해 봐야 시중에 돌아다니는 영약은 예전부터 주시하고 있었기에 솔직히 큰 기대도 안되고.
빙정에 비견되는 영약을 섭취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곳이 황실이나 고위귀족을 제외하고 존재하기는 할까?
있어도 신용과는 거리가 있는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리저리 찌르고 다니기엔 리케까지 귀찮아 질지도···.'
혹여 소문이 난다면 내 손에 죽을걸 알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덤벼드는 막장 쓰레기들에 가짜나 싸구려 영약을 들고 와 흥정을 하려는 사기꾼들이 녹은 사탕의 개미떼처럼 꼬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귀찮은 상황에 턱을 긁던 나는 급작스레 떠오른 한 가지 묘수에 에클레어를 품에 더 밀착시켜 귀에 속삭였다.
"남은 하나는 클로에한테 주자."
밥이라도 먹자는 투로 가볍게 던져진 말에 에클레어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금세 진중한 표정이 된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와 숨결이 교환되는 지근거리에서 눈을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로만. 아무리 그래도··· 후우- 그대가 즉흥적이고 사치에 큰 관심이 없는 건 물론 알고 있다."
그녀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응."
"그래서 하고 싶지 않은 실로 속물적인 이야기이지만. 빙정을 가치로 환산하면 수도의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넓은 저택쯤은 여유 있게 구입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잘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
사실 에클레어가 뭐라 해도 빙정이 향할 곳은 이미 정해졌기에. 나는 그녀와 있는 이 귀중한 시간을 무겁지 않고 최대한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집이 너무 넓은 건 청소가 힘들어서 내 취향이 아닌데. 사용인을 고용하기도 싫단 말이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ㅡ!"
진지한 이야기를 위해 품에서 벗어나려는 에클레어를 더 강하게 안고 입을 잠시 손으로 막았다.
"네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클로에에게 좋은 일이라도 에클레어가 넙죽 받을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이런 점이 에클레어의 매력이기도 하니.
막고 있던 손을 떼니 그녀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침묵을 지키며 나를 보고 있다.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나는 내 생각을 나긋한 어조로 피력했다.
"키티. 저택은 필요하면 의뢰를 해서 사도 되고··· 내가 당장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렇겠지."
"나한테 진짜 특별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은 평범한 모험가의 의뢰를 완수하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 그런 게 반대로 가치를 가진다고 봐야겠지."
특별히 사치를 부리지도 않는 내게 금화는 이미 썩어버릴 정도로 충분히 있고 정말 부족하면 의뢰를 하면 된다.
내 수준에서 위협이 되지 않는 몬스터 토벌 의뢰만 수행해도 차고 넘치는 돈을 벌 수 있다.
"미래의 처제한테 점수 좀 따야지. 그게 수도의 저택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거 아냐?"
허리를 만지던 손을 슬쩍 내려 에클레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살을 덧붙였다.
"그리고 클로에가 강해지면 혹시모를 상황이 생겨도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겠지?"
에클레어도 내 막 나가는 성격상 클로에가 빙정을 받지 않는 길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에클레어는 양손을 뻗어 내 얼굴을 잡더니 그대로 입술을 부딪혀왔다.
"읍-!"
"하읍··헤읏··쯉··."
질척하게 엮이는 혀는 그녀가 키스에 능숙해진 걸 증명했다.
손으로 몸을 탐하지 않고 서로 허리를 감은 채 타액만을 주고받던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떨어뜨렸다.
에클레어의 축축해진 입술을 만져주며 나는 우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영약 하나에 키스 한 번이라. 내가 무조건 이득이네."
에클레어는 붉은 눈동자에 열기를 활활 태우며 내 농담을 정정했다.
"이런 걸로 빙정에 대한 값을 치르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귀엽긴."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하고 나니 부끄러운지 에클레어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애초에 영약을 값어치로 환산하여 내가 무언가를 하려 하면 그리 내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이제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네."
이건 내 취향이지만. 나는 내 여자가 마음에서 우러나 자진해서 행동하는 걸 제일 좋아한다.
말을 안 해도 자발적으로 메이드 복을 입는 다던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준다던가?
그 외에 '대가'라 하면.
연인에게 디저트나 와인 같은 소소한 선물을 해주거나 요리 같은 걸 해주고 야릇한 이벤트나 스킨십 혹은 애정 어린 말을 듣는 것은 물론 좋아하지만.
내 여자에게 억지로 값비싼 물건을 쥐어주고 진지하게 그 대가를 받아내는 건 당연히 내키지 않았다.
리케도 에클레어도 내 들쑥날쑥한 성향 중 그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처음부터 그러려 했지만··· 영약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감정과 마음에 대한 값을 평생에 걸쳐 치르겠다. 드리트나 백작가의 차기 가주로서, 클로에의 언니로서, 로만의 연인이자 미래의 배우자로서."
그녀의 말에 담긴 감정은 내 마음을 찡하게 울릴 정도로 진했다.
속에 차오르는 이 만족감과 고양감을 당장에 온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나 그 욕망을 겨우 억누르고 분위기를 이었다.
"좋아. 그럼 사랑한다고 백번 듣기부터 해 볼까. 길드에 오기 전부터 듣겠다고 다짐하고 왔거든."
내 다짐을 듣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며 키득거린 에클레어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아왔다.
"하여간 바보 같기는··· 천 번도 해주마."
오늘도 업무에 있어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에클레어와 접견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함께 접견실을 나서기 전.
흐트러진 제복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 이틀 연속으로 일을 쉴 것 같다는 에클레어의 말에.
그전까지 시간이 안 난다면 그때 글레이프니르를 소개해주고 이노센스를 제대로 볼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끝나면 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잡담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