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33화 (133/250)

Chapter 133 - 제국의 논공행상

앨리스는 릴리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정신을 찾은 뒤.

선술집 직원에게 빌린 양동이에 물을 받아 추한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로만에게 들이부었다.

촤아악!

"푸하-!! 으으···."

사태파악을 못하고 멍한 얼굴로 토사물이 붙은 고개를 드는 파티원의 엉덩이를 앨리스가 걷어찼다.

빠악!

"커헉!"

전력이 아니어도 앨리스의 근력은 일반인을 아득히 상회한다. 화를 참지 못하고 대충 휘두른 발길질이어도 속이 꽉 찬 몽둥이 같은 위력을 내며 로만의 정신을 깨웠다.

"로·· 이 바보! 멍청아!"

당연하게 이름을 부르며 혼을 내려했지만. 무의식 중에 멈칫한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만이라는 이름을 삼키고 화를 표현했다.

"어윽··."

자신이 시킨 대로 교단의 인물이 있는지만 둘러보고 올라왔으면 이런 위험천만한 사고도 없었을 텐데!

방금 마주친 달라도 너무나 다른 로만. 그 동명이인의 남자에게 느낀 공포감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칫 또 다른 '로만'이라는 모험가의 심사가 뒤틀렸으면 둘 다 여기서 반죽음 혹은 개죽음을 당할뻔했다.

구타당한 엉덩이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던 로만은 이제야 자신의 애검이 어떻게 됐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어?! 내 검이!!"

"에델만에서 제일 비싼 명검이라고 자랑하더니··· 그냥 사기당한 거 같은데."

"아냐! 이, 이건 아버지가·· 분명··!"

단검정도의 길이만 남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무기를 보고 절망하는 로만을 보며 앨리스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무엇에 당했는지 모르지만 저딴식으로 어이없게 박살 난 검이 명검은 아닐 것이다.

조각난 쇳덩이를 잡고 굳어있는 로만에게 양동이와 대걸레를 던져준 앨리스는 선술집 청소를 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머리에 박아 넣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

'일으켜준 게 끝이라 해도 혹시 몰라.'

앨리스는 아직 테이블에 앉아있는 둘에게 다가갔다.

여기에 없는 로만이라는 모험가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봤기에.

그와 이 사람들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이쪽에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아까는 가,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딘가 동생이 생각나서··· 괜한 참견이 아닌가 싶었는데."

생판 처음 보는 모험가들에게 경어를 사용하는 건 앨리스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거기에 경어로 자신을 대해주는 인물 또한 오랜만이었고.

특히 여성 모험가이면서 어리고 신장이 왜소한 자신 같은 경우.

타 모험가들에게 만만히 보이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고생해 왔다. 몇 년을 여러 모험가들과 걸걸한 기싸움을 하다 보니 의식적으로 경어를 버리고 배에 힘을 주고 호탕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과 같이 도리와 경우라는 게 있는 법.

자신을 도와준 분홍머리의 미인과 곰 같이 생긴 남성에게 재차 감사인사를 전하자 그들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비어버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파티원이 선술집 청소를 끝내기 전까지 자신도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렸기에 거부하지 않고 자리에 착석했다.

이 자리에 없는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크기도 했고.

"아가씨도 이제 좀 진정이 됐나 보군."

본인을 금등급 모험가 라크라고 소개한 남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음식을 담을 앞접시를 건네주었다.

자리에서 목례로 감사를 표하고 접시를 받자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필 파티에 로만씨와 동명이인이 있다니 운이 나쁘다 해야 할지, 이렇게 넘어가서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파티원이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네요."

"외지에서 왔다면 모를만하지. 저 바보한테 싸움을 거는 간 큰 자식은 수도에서도 몇 놈 없거든."

로만이라는 이름이 흔하다는 건 앨리스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로 궁금하고 중요한 요점을 묻기 위해 목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저기·· 신상에 대한 걸 이렇게 간단히 물어서는 안 되겠지만··· 호, 혹시 방금 이 자리에 있던 로만이라는 분이 백금의 그··?"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네의 긍정에 앨리스는 앞으로의 미래에 커다란 산사태가 난 것 같았다.

'마, 망했다아아!!'

순간의 말실수로 백금에게 밉보인 상황이 아닌가. 기사로 치면 제국의 5기사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황이나 다름없다.

수도에서 이제 힘 좀 내보려 했는데 살기 위해서는 에델만으로 황급히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멍하니 벌어진 입으로 영혼이 빠져나올 것 같은 앨리스를 릴리네가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뒤끝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고··· 로만씨는 저래 보여도 미인한테 약하니까 이번 기회가 친해질 기회일지도 몰라요."

"에··?"

어이가 없는 말에 앨리스가 대답도 뭣도 아닌 소리를 냈지만. 라크도 크게 공감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인이 저 바보의 공공연한 약점이지. 숨길 것도 없이 수도에서 경력이 쌓인 모험가들은 다 아는 사실이고. 다음에 만났을 때 아가씨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서 인사하면 쫓아내지는 않을 거야. 남자는 위험하지만."

"···."

"아가씨가 넘어온 에델만은 어떤지 모르지만 수도의 모험가는 자고로 뻔뻔해야 한다고."

'뻔뻔함···.'

앨리스가 무어라 대답하기 힘든 이야기에 침묵이 잠시 이어지고 있으니 릴리네가 침착한 목소리로 다음 주제를 꺼냈다.

"근데 평소랑 다르게 정신이 안정돼 보인다 해야 할지··· 행동이랑 목소리에서 과장 없는 여유가 느껴지는 게 어딘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좋은 쪽으로."

탕!

기다렸다는 듯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라크는 격한 공감을 표했다.

"이야~! 말하려다 말았는데 나만 느낀 게 아니었나? 못 본 사이에 로만 이놈··· 진짜 마음이 가는 여자라도 생겼나 싶었지. 남자가 갑자기 변했다 하면 역시 여자 아니겠어?"

둘의 대화에 침묵을 지키며 끼어있던 앨리스는 다시 한번 기겁했다.

'저 상태가 좋은 쪽으로 변한 거라고?'

앨리스가 예상도 못하고 뜬금없이 마주하게 된 백금의 모험가를 단순히 느낌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을 떠나서 지금까지 실물로 봐온 몬스터들을 생각해도 견줄만한 생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한 야성적이고 거친 느낌은 자신이 가진 특유의 감각을 우그리고 찌부러뜨릴 것 같은 압박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여자가 생겼다 해도··· 저런 분위기면 여자도 막 엄청 험하게 다루는 거 아냐···?'

연인이라 해도 여성을 부드럽게 대한다는 그림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 존재감과 살벌함.

제국의 남자들이야 흔히 그러기도 하고 백금이라는 권력자가 보통 별나겠는가.

그런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떠나.

수도에서 성공한 모험가라는 미래를 꿈꾸려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떨어져 나오는 정보는 생존과 직결된 천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앨리스는 최대한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흔한 말로 좋은 게 좋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판타지 세상이라 해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턱도 없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으려는 타입이지만.

엮이게 되는 인물이 내가 아니라 내 여자가 되는 경우에는 확실히 찝찝한 것은 피하게 된다.

술에 취해서 칼을 휘두른 자를 용서하는 미친 자비로움!

여신도 감동하여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선행을 베풀고 에클레어를 만나니 확실히 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주하자마자 헤실헤실 풀어지는 얼굴근육을 뽐내며 다가갔다.

"키티~!"

"로만··· 지금은 업무 중이다."

접견실 테이블에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무늬가 아로새겨진 상자를 올려두고 혼자 기다리고 있던 에클레어를 껴안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면서도 사무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접견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허벅지에는 에클레어를 앉히니.

거부하지 않고 편하게 품에 기댄 그녀는 손으로 내 앞머리를 만지고 정리해 주며 업무를 이어나갔다.

"성수와 포션 쪽은 종류도 많고 물량이 제법 되다 보니 모험가 길드에 로만의 이름으로 맡겨두었다."

"양도 많은 걸 어떻게 가져왔어?"

"항상 따라오는 단원들이 마차에 있는 물품을 옮겼지. 단장인 내가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잡무를 하는 건 금기나 다름없다."

"다행이야. 내 여자한테 짐 옮기기 같은 귀찮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항상 말은 청산유수구나. 참으로 못된 입이야."

내 립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찌르고 당기며 작게 웃었다.

진득하고 끈적한 스킨십도 좋지만 이렇게 장난에 가까운 소소한 행위도 각별했다.

"포션은 가면서 챙겨갈게. 키티가 필요한 물약은 없어? 다 가져가도 좋고."

"괜찮다. 나도 일정량은 항상 구비하고 있으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고풍스러운 목함으로 향했다.

하사하겠다는 느낌이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이 상자 자체도 특별한 마도구라는 직감이 왔다.

내용물에 대한 예상은 하고 있지만 나는 그녀의 허리를 만지며 확인차 물었다.

"그럼 이 상자는?"

"이게 제일 중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지."

"오오!! 역시 그거?"

내 말에 미소를 간직한 채 품에서 일어난 그녀는 손가락에 마나를 모아 상자에 먹이듯이 흘려냈다.

굳게 닫혀있던 목함이 마나에 반응하며 자동으로 열렸다.

딸깍-!

"영약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