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2 - 동명이인 -2-
"로만··· 이 멍청한 놈아!! 빨리 올라와!"
정말 한순간이었다.
시끌벅적했던 선술집이 자신의 한마디에 조용해지고. 싸늘해진 공기는 피부에 닭살이 돋을 만큼 소름 끼쳤다.
어떤 모험가는 눈동자에 공포감을 담고 자신이 아닌 다른 쪽의 눈치를 보았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자들 또한 흥미로움을 숨기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한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급변한 분위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들도 보였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신입인 햇병아리 모험가 거나 외지에서 자신들과 같이 승급을 노리고 온 모험가들.
드륵-
한 근육질의 남성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벅- 저벅-
자신의 앞에 섰다.
한참이나 높은 시선에서 빤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의문을 담아 짧게 물어왔다.
"왜?"
앨리스는 자신의 앞에 서 뜬금없이 '왜'냐고 묻는 남자의 말에 입을 멈췄다.
'···갑자기 왜? 왜라니? 무슨 질문이지?'
에델만에서도 수도에서도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음심을 가지고 꼬드기려는 남자들과 달리 사심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눈길은 악의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앨리스의 몸에 흐르고 있는 용인족의 피를 자극하며 이 자는 정말 위험하다는 경고를 미친 듯이 울렸다.
상대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지 않으나 선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기에.
존재 자체만으로 겁을 먹게 되는 초월적인 공포.
그건 그녀가 살아생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살면서 만난 자 중에서 제일 위험하고 가장 강한 자라는 걸 본능으로 깨달았고.
뜬금없이 마주한 위기의 순간.
방어 마법이라도 꺼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되는 와중 본능이 그래서는 안된다며 막아섰고.
혼잡한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건 부모님과 했던 대화였다.
····
과거 에델만에서 로만과 모험가 의뢰를 죽어라 해결하고 다니던 시기에 부모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날은 분명 자신이 은등급 모험가가 되어서 부모님과 소소한 축하자리를 가졌을 때.
진심으로 자신의 성장과 승급을 축하해 주는 가족과의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기에 거리낌 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
자신이 모험가를 한다고 폭탄발언을 했을 당시 어떻게든 말릴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리 시원하게 허락해 준 것이냐고.
ㅡ이 아비도 그렇지만 순혈이 아닌 용인족들은 겁이 많아 무슨 일을 해도 위기를 잘 피해서 장생한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아버지는 자신이 순혈 용인족이었다면 모험가의 길을 죽어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연방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강자로 꼽히는 순혈 용인족들은 강자와 투쟁하는 걸 즐기기에 위험한 곳을 자진해서 찾아다닌다고 들었다.
용인족이라는 종족이 탄생한 태초에는 살아남기 위해 발달했을 위기와 강자를 감지하는 감각.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쩌다 성질머리가 그렇게 진화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감각을 역이용하여 평생을 전장에서 살고 싸우다가 죽는 게 자칭 명예롭다는 순혈 용인족들의 특성이다.
자신과 같이 반쪽도 안 되는 연하디 연한 용인족의 피는 모험가라는 직업에 최고로 적합할 것이라 아버지는 말했다.
단순하게 강인한 신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위기를 감지하고 강자를 판별하는 용인족 특유의 감각은 남아있지만.
순혈 용인족이 가지는 투쟁심은 쏙 빠져있다.
과정이 추하더라도 생존을 최고 목표로 해야 하는 모험가에게 적격이었다.
"어이 거기- 앨리스한테서 떨어져라. 이 이상 헛짓거리를 하면 베겠다."
"···뭐야 이건?"
자신의 불호령에 여자 모험가 사이에서 술을 받아먹던 로만이 다가와 남성의 뒤를 잡고 섰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마신건지 취기가 돌고 있는 로만의 얼굴은 시뻘건 색으로 변해있었다.
술기운을 간직한 로만이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올리자 근육질의 남성은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고- 그와 동시에 선술집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어났다.
우당탕탕!
-오오오!! 이게 얼마만이냐!!!
-역시 외지의 젊은것들은 겁이 없어서 좋다니까!
-애꾸눈 노팅엄 이후로 도전자가 있다니··.
-모험가 길드의 유니콘이 떴다아아-!!!
··
··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모험가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더니 술병과 음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자들이 주위를 둘러싸듯이 모이기 시작했다.
-배팅은?
-결과가 뻔한 일에 배팅을 왜 해?
-하긴··· 그래도 재밌으면 된 거지!
-애송아! 힘내라! 혹시 죽으면 시체에 술은 뿌려줄게!
··
··
괴상망측한 소리를 하며 우르르 모여드는 모험가들을 보며 앨리스는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뭔가 이상···아니, 위험해!'
그녀가 수도의 모험가 길드에 있어본 결과로 지하 선술집에서 모험가끼리 박 터지게 싸우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텃세를 부리는 수도 모험가와 타지의 모험가들이 주먹다짐을 했을 때도 다들 재밌다며 웃고 환호성을 내며 즐기는 분위기였긴 했지만.
눈동자에 이 정도로 기대감을 품고 미쳐서 날뛰지는 않았다.
발을 빼지 못하게 하려는 듯 분위기를 달구기 시작한 광기. 남자의 뒤에 서서 칼을 잡아버린 자신의 파티원인 로만도 이질적인 상황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앞에 서있는 남자는 이 분위기가 익숙한 듯 귀찮다는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이용해 귀를 파고 있었다.
잡고 있는 검의 손잡이가 들썩이는 로만을 보고 앨리스는 황급히 그걸 막으려 했다.
"자, 잠깐만! 멈춰!"
"괜찮아. 앨리스. 힘조절은 할게."
로만의 손에서 검이 뽑혀 나오며 취기에도 몸이 기억하는 궤적을 그리며 검이 휘둘렸다.
····
째앵-!
"우웁!! 우에에엑··!!"
동체시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눈으로도 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상대를 베고 지나가야 할 로만의 검이 깨진 유리처럼 박살이 나서 흩어지고.
복부를 부여잡은 로만은 무릎을 꿇고 쓰러지더니 입에서 질척한 토사물을 뱉어냈다.
-우우!! 벌써 끝이냐!
-꼬맹아! 힘 좀 써봐!
주위에서 모험가들의 야유가 쏟아지자 근육질의 남성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며 주위에 엄포를 놨다.
"입 닥치고 전부 자리로 돌아가. 시끄러워서 이야기를 못하겠잖아."
-크흠···.
-아~ 음식이 식겠네.
-바, 밥이나 먹자고!
벌떼처럼 몰려있던 모험가들은 그의 말에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일절 반발도 하지 못하고 깔끔하게 흩어졌다.
각자의 개성이 강하고 말 안 듣는 꼴통들이 대부분인 모험가들이 젊은 남자의 말에 통솔되는 그 어이없는 광경이 그녀의 공포를 더욱 가증시켰다.
"어디에서 온 모험가지?"
"에, 에델만···."
그는 토사물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로만의 뒤통수를 밟은 채 턱을 긁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흐음- 에델만이라. 그래서 왜 불렀지?"
아까부터 서로의 어딘가가 어긋난 느낌.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자 농담을 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추파를 던지는 행색도 아니었다.
"그냥 파티원을 찾으러 내려왔는데···."
"이거?"
그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로만을 가리키자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머리에 떠오른 게 있는 듯 재차 물어왔다.
"이놈 이름이 뭔데?"
"로··만이요."
평소 같은 모험가들에게 사용하지 않던 경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뱉더니 이제야 개운해졌다는 얼굴로 답을 내줬다.
"내 이름도 로만이다."
동시에 앨리스의 머리가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아!"
그리고 정말 혹시나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단번에 도달했기에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어버버 거리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본인의 이름이 로만이라 밝힌 남자는 훈계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몇 번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서로에게 오해가 일어난 건 알겠어. 물론 그쪽한테 잘못이 없다는 것도."
"···!"
이 상황을 빌미로 자신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지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던 남자는 마지막에 발에 밟혀있는 로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이야기를 풀기도 전에 대뜸 칼을 휘두르는 이 녀석은 용서를 못하겠는데."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상대를 먼저 공격한 건 자신의 친구였으니.
"그- 죄송해요! 제 파티원이라··!"
"걱정 마.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니··· 손버릇이 나쁜 건 팔 하나정도로 용서할까. 교단으로 빨리 가면 붙일 수 있으니 교훈 정도는 되겠지."
박살이 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로만의 검을 주워 든 남자는 절대 농담을 즐기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칼을 들자 뿜어져 나오는 진지한 분위기가 앨리스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었다.
'어, 어떡하지! 말로 사과를 더 한다고 받아줄까··?'
결국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있는 재산이라도 털어보려던 앨리스에게 내려온 구원의 줄은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또각- 또각-
"로만님. 오늘 오시기로 한 손님이 오셨어요. 바쁘시면 손님은 접객실로 일단 모실까요?"
접수원이 업무적인 한마디를 하자 무심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허술한 웃음을 보이며 풀어졌다.
길드의 접수원은 계단을 타고 내려와 이 폭력적인 장면을 봤지만 딱히 놀란 눈도 아니었다.
"아 그래?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 바로 갈게."
한 손에 반토막이 난 로만의 칼을 들고 있던 그는 미소를 그리고 있던 표정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땡강-!
"쯧- 좋은 일 전에 손에 피 묻히면 안 되겠지··· 거기 일행."
바닥에 검을 버린 그는 자신에게 시선을 쏘아내며 확실하게 지목했다.
"에읏! 네, 네엣!"
"나중에 이놈 깨어나면 선술집 전체 청소시켜. 안 하고 도망가면··· 뭐 기대해도 좋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 것뿐.
그것에 만족했는지 토사물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로만의 뒤통수를 밟고 있던 신발을 치운 그는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척척 밟고 올라갔다.
"하아···!"
계단에서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멈추고 있던 앨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당장 일어설 여력이 없다.
토사물에 얼굴을 박고 정신을 잃은 친구를 멍하니 보고 있던 앨리스에게 분홍머리를 한 여성과 곰 같이 생긴 남성이 다가왔다.
"아가씨. 저 놈이 무슨 일로 이렇게 쉽게 넘어갔는지 모르지만··· 파티원은 운이 좋았네."
"괜찮아요? 로만씨가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네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미는 분홍머리 여성의 손을 잡고 앨리스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