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1 - 동명이인 -1-
리케는 아침 일찍 빵집에 들렀다 아침밥을 같이 먹고 아카데미에 갔고.
실전 수업이 없는 나는 마당에서 훈련을 좀 하다가 에클레어를 기다리기 위해 모험가 길드에 왔다.
로버트가 은근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오늘을 대비해 정보길드에서 더럽게 비싼 인물 하나를 고용해 로버트 쪽에 붙여놨기에 그나마 걱정이 덜했다.
'돈은 역시 이렇게 써야지.'
오늘 모험가 길드에는 어떤 놈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까.
타지에서 왔다는 놈들이 수도 모험가들과 싸움판을 터트리고 있으면 구경거리가 있어 시간이 잘 갈텐데.
····
모험가 길드에서 얼굴이 자주 보이던 모험가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경우.
대체적으로 그냥 객사를 했거나 부상 같은 이유로 모험가를 그만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소리소문 없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어지간해서 결과의 뚜껑을 열지 않는다.
암울한 현실이 들어있다면 언젠가 올지 모르는 미래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기에.
모험가의 삶은 희극을 표방하며 유쾌한 척 살아가는 인간들이 모여있다.
인간을 주식으로 삼거나 습격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의뢰를 실패한 뒤에 시체나 유골을 수습하는 것에 성공하면 그것만으로 무척 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평가할 정도니.
이건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불문율 비슷한 것으로.
의뢰를 떠난 후 성공했다는 소식도 없고 충분히 시간이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모험가들 사이에서 그 모험가는 죽었다고 취급한다.
드물게는 일을 터트리고 수습을 못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연방국이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독립국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모험가도 그렇고 모험가를 관리하는 길드도 다사다난한 직업이다 보니.
사이가 괜찮은 모험가들을 오랜만에 만난다면 그만큼 반갑기도 하다.
'오늘은 느낌이 괜찮은데?'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담배냄새가 나지 않는 기적이 나를 반겨주어 근거 없는 직감에 좋은 느낌으로 박차를 가했다.
응대로 바쁜 접수원의 눈인사를 받고 발을 어디로 움직일까 서서 짧은 고민을 했다.
'내려가볼까.'
아직 시간은 제법 여유가 있어 지하에 있는 선술집으로 내려가자 타지의 모험가들과 신입이 늘었다는 소문대로 뉴페이스들이 확연히 늘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익숙한 분홍색 머리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릴리네~ 오랜만이네."
"아! 로만씨!"
나야 주에 한번 실전 수업에서 세리아를 가르치는 입장.
아카데미에서 세리아의 근심 없는 활기찬 표정을 보고 언니인 릴리네가 별 탈 없이 지낸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릴리네도 내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속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것만으로 생존신고가 된다는 것이다.
"로만! 나는 안 보이냐?"
"어어- 그래. 살아있었네. 경사야 경사."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라크에게 대충 대꾸를 해주고 비어있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이 파티에는 챔버스라고. 라크보다 젊고 교양 있는 이야기를 나눌만한 녀석이 있는데.
술로 사고를 거하게 치더니 금주를 한다며 선술집에 드나들지 않고 있다. 그 다짐이 제법 오래가고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모험가의 금주발언은 당장에 사라지는 연기나 허상과 같은 것인데.
"라크. 잘 먹을게."
예전에는 자주 있는 그림이었지만 내가 리케와 지내게 되면서 이 상황도 오랜만이었다.
라크도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당연하게 먹는 나를 보고는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기가 찬 웃음만 지었다.
"참나- 마음대로 해라. 그래도 위치에 맞게 좀 행동하는 게 어때?"
제국에서 손꼽히는 최고 모험가들.
'백금'답게 행동해라? 꼴리는 대로 사는 게 모험가인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내가 누구의 말도 아니고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는 것부터 어이가 없었다.
"그럼 금에 머무르고 계신 라크님이 제게 존경을 담은 경어부터 사용해야 위치에 맞는 품위가 살지 않을까요?"
"···."
예의가 듬뿍 들어간 내 말에 그것만은 싫다는 티를 팍팍 풍기는 남정네를 무시하고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음식과 음료를 한잔 비워내자 릴리네가 슬쩍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로만씨. 세리아는 그···."
예상한 질문에 나는 수업 중 세리아에게 느끼는 소감을 그대로 전했다.
"잘하고 있어. 그 열정에는 내가 화상을 입을 정도야."
열심히 한다는 말에 릴리네는 싱긋 웃고는 있지만 일직선으로 모험가라는 직업만을 꿈꾸는 동생에 대해 걱정이 많아 보였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로만씨가 하는 수업에만 흥미가 있나 봐요. 이론 수업은 낙제만 피하려고 하는 둥 마는 둥··· 식견을 좀 넓혀서 여러 직업의 가능성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는데 큰일이에요··."
"그건 이상하네. 내 수업은 제법 힘들 텐데?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것들도 가득하다고."
붉은 머리 소녀는 모든 수업에 그런 열정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론에는 또 약한가 보다.
릴리네와 정반대의 성향이라 하니 쉽게 예상이 가는 그림이라 그녀의 걱정이 이해가 되면서 웃기기도 하다.
내가 킥킥 웃으니 릴리네가 어깨를 찰싹 때렸다.
"심각한 일이니 웃지 말고요··! 휴우··! 세리아가 요즘 다른 모험가들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걸 보면··· 로만씨는 남을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진짜 대단한 건 가르친 적이 없는데··· 다 기초야 기초."
리케를 성장시키는 건 수업을 떠나 집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 정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클로에는 에클레어의 동생이기도 하고 오라버니라 부르며 조심조심 따르는 모습이 귀여워 리케 다음으로 편애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그렇다면 세리아는···? 그냥 세리아가 열심히 하는 만큼 정확하게 돌려받는 것일 뿐이다.
"이런 부탁을 하면 정말 안 된다는 거 알고 있는데··· 세리아가 경제나 연금술 같은 이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ㅡ."
릴리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도중 날카로운 목소리가 선술집에 울리며 그녀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로만··· 이 멍청한 놈아!! 빨리 올라와!"
에클레어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
ㅡ미안하다··· 우리 둘은 연방국에서 혼혈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 왔기에··· 혼혈인 부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볼 자신이 없었어···.
어느 날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곳은 볼라센 연방국이라 했다.
제국에서도 연방국으로 망명하는 무리가 있는 만큼 나의 부모님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
아버지는 용인족과 인간의 혼혈이고 어머니는 다크엘프와 인간의 혼혈.
어중간한 혼혈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그건 다종족을 포용하고 있는 연방국도 다르지 않다.
순혈이 아니라면 숨기지 않고 인간제일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에서 유능함을 보여 허가를 받은 이종족으로 살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겉으로 혼혈도 포용하는 척을 하는 연방국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감에 내가 말도 못하던 당시 망명을 했고.
지금은 노력을 한만큼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놀랍게도 겉으로 보기에는 두 분 모두 인간과 다를 바가 없지만.
아버지는 스킬이나 마나를 사용하면 용인족의 특성인 뿔이 돋아나고 눈과 어금니 등 신체에서 용인족 특유의 형태를 보이며.
어머니는 미의 종족과의 혼혈답게 누구보다 아름다우시면서 마법에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계셨다.
그 피를 이어받은 나는 그야말로 이도저도 아닌 혼종.
거울을 보면 항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
'나는··· 인간? 용인족? 엘프?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걸까?'
어머니를 닮은 외모, 특정 속성 마법에 재능도 있었지만··· 피부는 햇빛아래에서 하루종일 뛰노는 아이들처럼 브라운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었다.
항상 건강해 보여서 좋다고 둘러대는 아버지의 위로가 더 신경 쓰인다.
거기에 마법이나 과하게 마나를 사용하면 뿔이 돋아나오고 눈도 어금니도 용인족의 그것처럼 변한다.
그래도 일상에서 마나를 사용할 일 자체가 드문 것이.
마나를 이용해 신체강화를 하지 않아도 자신은 강하다.
단순한 근력으로 돌을 가루로 만들 수 있고 검을 배우지 못한 일반인들이 휘두르는 날붙이 따위로는 피부도 뚫지 못한다.
어릴 적 자신을 납치하려던 노숙자에게 잡혀 몸부림을 쳤을 때 자신이 놀라서 마구 휘두른 주먹에 노숙자의 안면이 함몰되어 죽은 일까지 있었으니.
자신이 그런 유별난 혼혈이라 해도 일상에 큰 문제는 없었다.
부모님이 고생하며 깔아 둔 길이 있었다.
아버지는 순수한 체술을 가르치는 작은 무투가 길드를 운영하고 어머니는 마법의 재능을 살려 이름 있는 마법사 길드에서 연구직과 가정주부를 겸하셨다.
다재다능한 부모님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녀는 모험가의 길로 향하기로 결정.
에델만에서 남들은 혼사를 준비하거나 귀족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에 자신의 파티는 금등급에 도달했고.
제국 모험가 중 최연소는 아니지만 에델만에서는 유례없이 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자신은 부모님에게 받은 재능이 있기에.
'내가··· 백금이 된다면···.'
아직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혼혈인 부모님에 대한 차별.
부모님은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 부당한 차별에도 웃어넘기지만 자신은 바꾸고 싶었다.
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 제일 빠른 방법은 백금이 되어 혼혈임을 당당하게 알리고 선행과 무용담을 쌓아가는 것.
음유시인들의 입을 타고 퍼지기 시작하면 그 유명세는 차별받는 자들에게 분명 힘이 될 것이다.
마음에서 판단을 내리고 같이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이자 파티원을 불러 말했다.
"로만. 수도로 가자."
"···갑자기?"
"그럼 여기서 만족하려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로만.
아버지의 무투가 길드 반대편. 퇴역한 금등급의 모험가가 운영하는 검술길드의 둘째 아들로.
그도 부모님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검에 훌륭한 재능이 있어 우리는 함께 파티를 이루어 2인조로 활동했다.
자신과는 달리 평범한 인간이지만 자신과 부모님을 보는데 차별적인 시선을 하지 않았고 실력도 좋았다.
"금등급 이상을 노리고 있는 우리에게 에델만에 떨어지는 의뢰로는 한계가 있어."
"음···그냥 이대로 지내도 좋지 않을까? 벌이도 나쁘지 않은데···."
가끔 이런 우유부단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기에 설득을 하기보다 통보를 했다.
"마음대로 해··· 나는 혼자라도 갈 거야. 수도에서 파티를 구해도 돼."
"수, 수도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런 건 모르겠고. 당장 내일 떠날 거야."
펄쩍 뛰며 자신을 제지하는 로만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집으로 향했다.
··
··
부모님을 설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걱정하는 티는 팍팍 냈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막지 않는 부모님이다.
편지를 자주 하고 의뢰를 쉴 때 가끔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준비를 마치고 에델만을 떠나 게이트를 타고 로만과 수도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향한 모험가 길드는 확실히 위험도가 높은 일거리가 넘쳐났다.
자신과 동급인 금등급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었지만 로만과 자신이 제일 어리다는 건 확실했다.
에델만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서는 보기 힘든 실력자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런 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청금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베테랑이라 부를만한 경력을 가진 금등급.
같은 금이라도 자신들 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명확했다.
베테랑들을 마주할수록 고위 모험가에 대한 소녀의 기대감에 부채질이 이어졌다.
'운이 좋으면 청금이나 백금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청금이면 아버지보다 강하려나?'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다.
소문으로는 로만과 동명이인으로 백금에 최연소로 도달한 유명한 모험가가 있다고 했고 자신도 들어서 알고는 있다.
혼자서 위험천만한 의뢰를 해결하고 다니며 최연소로 백금에 도달한 정말 거짓말 같은 존재.
'열심히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그는 솔로답게 업적에 대한 정보를 찾기도 힘들었고.
딱 봐도 정보를 가리기 위한 이상한 소문들만 퍼져있어 백금의 모험가 로만의 무위에 대한 정보를 찾는 건 지금까지 소득이 없다.
가끔 일이 있으면 길드에 나타난다고 수도의 모험가들이 말했지만··· 그런 걸 쉽게 믿을 만큼 자신은 순진하지 않다.
이런 추레한 길드와 탁한 공기의 지하 선술집에 청금 혹은 백금이나 되는 대단한 인물들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청금의 모험가만 돼도 금등급과는 아예 다른 대우를 받으니 고급스러운 양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면 접수원들이 의뢰를 들고 저택으로 직접 찾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도 그들과 동급이 되어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달려야 하는데.
"아! 진짜···!"
내려가서 같이 임무를 수행할만한 교단의 인물이 있는지 확인만 하고 올라오라 했더니 로만은 한참이 지나서도 소식이 없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모험가들의 시선에 짜증이 난 소녀는 지하에 있는 선술집을 향해 화를 담아 쿵쿵 발을 굴리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저 멍청이··!!'
구석에 여자 모험가들 사이에 앉아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술을 받아마시고 있는 로만을 보는 순간 눈이 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매번 우유부단한 로만을 다그칠 때처럼 배에 힘을 주고 큰 목소리로 로만을 불렀다.
"로만··· 이 멍청한 놈아!! 빨리 올라와!"
자신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선술집에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응···?'
급변한 분위기에 그녀의 분노가 증발하며 정신이 들었다.
공포감을 가지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듯한 시선과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간직한 흥미진진한 얼굴들.
드륵-
한 근육질의 남성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벅- 저벅-
자신의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