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30화 (130/250)

Chapter 130 - 울보의 공감과 이해

실전 수업에서 항시 대기 중인 교단의 사제님들에게 치유를 받으면 타박상이나 눈에 보이는 상처들은 사라지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나 소진된 지구력과 기력이 차오르는 건 아니다.

그게 가능한 교단의 인물도 있다 들었지만 그런 대단한 인물이 아카데미에 있을 이유도 없고 일개 생도인 클로에가 만나봤을 리는 만무.

"흐우우··!"

리케와 세리아에게 가벼운 부축을 받아 기사 학부 강의실에 돌아온 클로에는 자리에 앉는 순간 다시 일어날 여력이 나지 않았다.

남은 수업이 있는 상황에 뒤를 생각하지 않고 실전 수업에서 기진맥진을 해버린 난감한 상황.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기절하듯 수면에 빠져들 것 같은 몸 상태였지만··· 정말 우연처럼 아침식사 시간에 언니가 챙겨준 포션이 생각났다.

딸깍-

버튼을 풀고 가방을 열어 손을 넣었다.

가방 깊숙한 곳에 약과 함께 천을 감싸서 보관해 둔 유리병이 잡힌다.

'컨디션에 관련되어 있다 했으니. 활력 포션의 일종일까?'

포션의 종류는 교과서를 통해 기초적인 지식을 간략하게 배운 적이 있지만. 언니가 자신에게 건네주는 포션의 외관은 항상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

금색 뚜껑에 화려한 장식이 양각되어 있는 유리병은 대놓고 꺼내는 순간 생도들의 시선을 받을 것 같다.

가방 안에 두 손을 넣어 뚜껑을 분리한 뒤 고개를 돌려 포션을 단숨에 들이켰다.

꼴깍- 꼴깍-

"푸하!"

얼마 되지 않는 내용물을 넘긴 뒤 손에 들린 빈 병을 보고 클로에는 고민했다.

'이거··· 다시 챙겨가야겠지?'

시중에 판매되는 포션은 구분이 용이하도록 종류에 따라 규격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화려한 병은 사치품이라는 느낌까지 들어 역시 언니의 위치는 남다르다는 걸 여기서도 체감할 수 있다.

내용물이 비어버린 병을 다시 천으로 감싸 가방 안에 넣어두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몸에서 포션의 효능이 느껴졌다.

"···!"

언니가 준비해 준 포션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벌써부터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눈꺼풀에 묵직하게 얹혀있던 수마가 물러나고 안개와 먹구름이 짙게 끼어있던 정신이 깨어난다.

한 방울도 남지 않고 퍽퍽하게 말라버렸던 기력의 바닥이 촉촉하고 말랑한 물기를 품으며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전된 몸상태 덕에 수업 시간에 졸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강의를 기다리며 실전 수업에 있었던 일을 복기할 수 있었다.

오늘 실전 수업에서 오라버니와 한 대련에서 자신이 꺼낸 문제점의 해답은 사적인 고민상담에 가까운 영역이었지만.

자신이 놓치고 막막해하고 있던 부분을 독특한 비유를 통해 시원하게 긁어주면서.

낮은 자존감으로 무의식 중 눈을 돌리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어조를 피해 자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부드럽게 타일러 주었다.

질책을 들어도 이견이 없는 상황에 위안과 해결책까지 받아버렸으니··· 수업이라 해도 다른 생도에 비해 편애를 받았다는 감각은 확실히 있다.

'오라버니께 감사와 사죄를 다 전해야 하는데···.'

그나마 용기를 내서 약속을 잡은 건 큰 수확이자 진전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정확한 일자는 정하지 않았지만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

··

아카데미를 끝내고 저택에 돌아온 클로에는 사용인들을 통해 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편한 복장으로 빠르게 환복을 끝내고 책상에 앉아 그날 서재에 자리하지 못한 책을 다시 꺼냈다.

위장용 서적 사이에 끼어있는 성인용 로맨스 소설. 그 첫 페이지를 시작으로 다시 한번 눈동자를 움직여 글을 읽어나갔다.

샤락- 샤락-

"···?"

집중하여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클로에는 처음 이 소설을 완독 했을 때와 전혀 다른 감상을 받고 있었다.

결말과 갈등의 해결을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아니다.

감성이 짙어지는 늦은 밤이 아니라 해가 떠있는 오후라서? 아니다.

흥분감을 최대한 죽이고 차분한 정신으로 글을 눈에 담아 나간다.

이제는 야릇한 삽화와 적나라한 신음, 욕망을 분출하는 대화문이 아니라.

서로의 육신은 당연하거니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열게 되는 감정에 대한 묘사가 눈에 들어오고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ㅡㅡㅡ

자유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레베카와 있는 시간은 나에게 '감정의 해방'이라는 카타르시스를 가져왔다.

근엄함을 지켜야 하는 기사의 특성상 타인에게 한탄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어깨가 무거웠던 내게- 레베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나를 옭아매는 모든 속박을 잊고 진실된 행복을 느끼게 했다.

명문 귀족가의 장남이자 제국의 유망한 기사라는 목줄은 언제나 나를 편하게 거동하지 못하게 했고.

나는 타인의 평가와 반대로 마음이 실로 나약하여 내 몸 하나만을 이끌고 건사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분에 맞지 않는 재능과 장남이라는 위치는 등을 떠밀며 억지로 가파른 산을 오르게 했다.

끝이 안 보이는 오르막.

언제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길을 계속해서 걸으며, 나는 당장 오늘이든 내일이든 마음이 망가지는 순간이 오리라 예감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정신이 부서지는 것으로 짊어지고 있는 많은 것에서 손을 놓을 수 있도록.

타인에게 동정을 살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에 낳아준 부모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조각나기 직전의 심장.

그걸 유일하게 내비치고 박살 나기 직전의 정신을 환기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험가의 앞이었다.

ㅡㅡㅡ

왜 처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을까.

유독 이 한 페이지가 언니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자신은 울보에 눈물이 많으니까.

소설을 읽으며 감정을 이입해 혼자 방에서 운 적은 셀 수 없이 많긴 했지만. 지금 자신의 눈물샘을 고장 나게 하는 감정은 결이 완전히 달랐다.

등장인물에 대한 동정 혹은 감동이 아니라 언니가 이때까지 고생하며 지내왔을 시간들.

언니가 힘들었을 거라 알고는 있지만. 얼마나 어떻게 힘들었을지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연상하는 것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 흐으··."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 오라버니를 통해 공감과 이해가 주는 위안의 따뜻함과 힘을 깨달았는데.

자매로서 언니의 고단함에 공감을 해주고 이해하고 싶지만 자신에게는 그것조차 허락이 되지 않았다.

"언니이···."

패앵-!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에서 맑게 흐르는 액체를 쿨쩍이며 정리한 클로에는 리케의 조언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를 꺼냈다.

리케의 이야기를 통해 당장 며칠 사이에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해했기에.

공부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대화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깔끔하게 필기로 남겼다.

*****

"오빠아~ 언니한테서 편지 왔어!"

리케가 마당에서 글레이프니르를 휘둘러 보고 있는 나를 불렀다.

에클레어와 리케가 서로 편지를 제법 주고받는 건 알고 있지만. 편지가 왔다고 나를 부른다는 건 에클레어가 내 앞으로 보냈다는 뜻!

"잠시만 들어가 있자."

촤르륵-!

글레이프니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하자 내 말을 들은 사슬이 허공을 뚫고 빠르게 몸을 숨겼다.

'이제 제법 친해졌나···?'

친밀도가 수치로 보이면 좋을 텐데··· 글레이프니르의 감정은 은근하게 전달되어 오지만 사이에 진전이 있는지 묻는다면 확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아직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쓰다듬어주면 기뻐하며 현재 무기로서의 역할은 훌륭히 수행하니 만족스러우면서도 찜찜했다.

이게 쓰다듬는 감각이 좋아서 그냥 말을 듣는 건지.

내게 티끌만큼의 친밀감이나 신뢰도가 생겨서 말을 듣는지 그 사항은 아직 명확한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후우-"

벗어뒀던 상의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집에 들어가자 리케가 총총 다가와 편지를 내게 건네고 품에 안겼다.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킁킁거리다 피부를 혀로 핥는 가려운 감각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땀 흘려서 냄새날 텐데?"

리케는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선분홍색의 혀를 살짝 보이며 눈웃음을 그렸다.

"그래서 좋아."

다시 얼굴을 파묻는 리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편지를 뜯어 에클레어 특유의 글씨체가 가득한 편지지를 읽어 내렸다.

"흐음··."

내가 침음을 흘리자 리케가 재차 고개를 들어 물었다.

"왜 그래? 언니한테 편지가 왔는데 아쉬워 보이네?"

"사적인 내용은 아니고··· 저번에 같이 일 다녀온 것에 대한 추가 보상이 정해졌으니 모험가 길드에서 만나자고 하네."

물질적인 보상을 준다는 편지보다. 개인적이고 특별한 감정이 담긴 편지를 더 좋아하는 나이기에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만.'

애정표현이 없는 편지가 아쉽긴 해도 만날 기회가 생겨났으니 그것만으로 설레긴 한다.

내 성격을 잘 아는 리케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중요한 요점을 찔렀다.

"편지에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

"없네~"

나는 리케의 말에 장난스러운 어투로 아쉽다는 티를 냈다.

"에클레어 언니는 진짜 부끄럼쟁이니까. 그래서 귀여워."

연상인 에클레어를 진심으로 귀엽다고 평가하는 리케를 보면 둘의 사이가 상당히 가까운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다.

"그치? 아쉬우니 만나서 직접 들어야지."

"백번 듣고 와."

손을 살짝 내려 내 몸을 고양이처럼 핥고 있는 리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자 그녀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흐응··!"

"평등하게 오늘은 리케한테 백번 들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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