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 이건 분명 과몰입하고 망상해 온 부작용이다!
쿵! 쿵! 쿵!
문짝을 부수려는 듯한 신경질적인 노크소리.
아이작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재료들이 널부러진 바닥을 천천히 돌파하여 기숙사의 방문을 열자 냉랭한 표정으로 서있는 로버트가 보였다.
"로버트. 내가 알기로 기사 학부는 지금 한창 수업을 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아이작은 자신의 방에 찾아온 로버트를 보고 의문스러움에 인사가 아니라 제일 먼저 질문부터 던졌다.
"그건 대충 처리해 뒀으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수업 빼는 게 뭐 어렵다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풀풀 풍기며 아이작의 방에 들어온 로버트는 의자를 신경질적으로 빼서 앉았다.
"로버트. 사람의 기분에 눈치가 없다고 하는 내가 봐도 저기압으로 보이는데. 누구와 언쟁이라도 있었나?"
"···딱히. 그래서 언제 할 수 있지?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려줬다고 생각하는데."
로버트에게 막대한 재화를 지원받은 입장에 아이작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저 태도 또한 돈을 받고 필립과 계획을 짜느라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이들어 합리적으로 생각하니 불쾌하지는 않았다.
"음··! 그렇지. 여기서 아예 계획을 잡아볼까?"
자신과 계획을 짜고 있는 필립은 수도가 아닌 타 영지나 바깥을 돌며 밑바닥 인재들을 등용하느라 최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전까지는 아이작에게 시간여유가 있다.
"계획이고 자시고 그냥 뒷산에 가서 해보면 되는 거 아냐? 처음에 기숙사에서 마법진을 가동해 봤는데 돌아와서도 아무 일 없었다니까?"
"로버트. 확실히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정보가 없는 실험에서 가정과 안전 대책이란 제일 중요한 거야. 차원이 연결되었다고 해도 저번과 같이 어떤 위험도 없는 공간과 연결될 가능성은··· 무엇도 장담하지 못해."
"···."
"위치에 의해 연결되는 공간이 변하는지, 시간, 기상, 마나의 총량, 어쩌면 그저 사용하는 대상에 한정되는 것인지 지금은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단 말이지. 그러니 안전에 만전을 기한 다음 기상과 ㅡ ···"
눈에 광기를 빛내기 시작하는 아이작을 보며 기겁한 로버트는 뒷말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전에 고집을 꺾었다.
"그만··! 알았으니 그, 안전 대책? 인지 뭔가 하는 것까지 준비를 끝내면 언제 실험이 가능한지 그것만 말해봐."
"결국 공수하는 물건의 배송속도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수도에서 다 구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하겠지만 믿을 수 있는 재료라 하면 우리 영지에서 조달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수도라 해도 재료가 꼭 좋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고···"
겨우 끊어낸 수다가 또 길어지는 낌새에 로버트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그냥 준비가 되면 내 기숙사로 우편 보내."
문을 나서는 로버트를 보며 아이작은 수다가 끊어진 게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쯥·· 뭐 그러지! 조심히 가라고~ 금방 소식이 갈 거야."
*****
자신보다 어깨의 위치가 한참 낮은 세리아를 들어 올리듯 팔짱을 끼고 걸으며 클로에는 푸른 눈동자를 슬쩍 굴려 리케의 옆모습을 보았다.
함께 있으면 늘 보여주는 시니컬한 매력이 느껴지는 무표정이지만 실전 수업을 향하는 지금.
의식했기에 느끼는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의 저 밑바닥에서 열기가 도는 것 같다.
ㅡ··· 무섭다기보다는 남자답고 멋있다고 생각해.
'깊은 뜻은··· 없겠지?'
리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 발언이 클로에의 감각을 조류의 깃털 끝으로 간질간질하게 스치듯 건드렸다.
평소 이성에게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리케가 한 말이기 때문인가?
아니. 그건 자신도 그렇고 세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오라버니와 언니의 사이를 숨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서 오는 난감함?
이건 정답일 확률이 제법 높은 답안이다.
그러나 이 감각이 무엇이라고 클로에는 한 가지의 단어로 딱 집어 고를 수 없었다.
'리케는 약혼도 본인 의지로 파기했다고 했었는데···.'
세리아 덕에 자신과 친구가 되기 전.
힘없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모양으로 기력이 없던 리케를 클로에도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의 변화는 생각할수록 거듭 놀랍다.
리케가 어느 순간부터 쇠한 죽은 눈을 버리고 생기를 찾으며 외모가 빛을 내기 시작하자 아카데미에 은근하게 떠돌던 볼트 후작가와 스카디 후작가 사이 약혼에 관한 입소문도 있었지만.
현 기사 학부의 로버트 볼트 생도와의 약혼은 없던 일이 된 지 오래라고 세리아와 자신에게 리케 본인의 입으로 말해줬었다.
'리케는··· 진짜로 사모하는 남성이 생기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네··.'
언니의 허락을 받고 저택에서 세 명이서 하루 머물던 날에도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할 바에 자결하겠다.'며 대쪽 같은 태도를 보였기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날 연심이라는 감정에 누구보다 진심을 보여준 리케는 극단적이고 언변에 과격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소녀'라는 단어에 누구보다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오늘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언니를 보며- 감정과잉과 함께 무의식 중 뽑아냈던 푸른색의 오러와 같이 거창하지는 않지만.
내면에서 생각이 정돈되는 깨달음 비스름한 걸 느꼈기 때문인지 감정과 분위기에 대해 전보다는 기민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느낌이다.
만약! 혹시! 정말! 아니겠지만!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리케가 오라버니에게 연심을 품는다면 자신은 어떤 포지션을 잡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혹여 언니와 오라버니 사이를 여전히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데 그런 대사건이 터진다면···?
'클로에 드리트나··· 이 바보! 멍청이! 지금은 이딴 망상을 할 때가 아니잖아··.'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고 세리아가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의 미련한 잿빛 머리통을 두들겼을 것이다.
친구가 가볍게 한마디 뱉은 걸로 말도 안 되는 막장 소설 같은 망상이나 하다니. 이때까지 읽어온 로맨스 소설들에 과몰입하고 망상을 해온 부작용일 것이다.
생각과 시선이 단적이고 외길이라 할 만큼 좁은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며 클로에는 세리아에게 이끌려 발을 움직였다.
··
··
아카데미 실내에 들어오자 이제야 세리아의 팔짱이 풀리고.
남은 시간을 확인한 셋은 간단한 스트레칭을 겸해 수업에 사용할 아카데미 보급형 무기를 각자 챙겼다.
"후! 역시 검을 들면 진정이 되네."
숏소드와 단출한 원형방패 들고 세리아가 녹안을 빛내며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리케는 이제 당연하게 봉을 꺼내 들고 붕붕 돌리며 손목을 풀고 있었고.
스릉-
마지막으로 벽에 걸려있는 심플한 롱소드를 꺼내든 클로에는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다가올 수업에 대한 걱정을 지우는데 힘썼다.
오늘은 어떤 수업을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오라버니와의 개인 대련을 토대로 한 피드백 주고받기.
'···오라버니를 걱정시키면 절대 안돼!'
클로에는 손에 식은땀이 나는 걸 느끼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언니도 오라버니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초월적인 감각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어딘가 어색하거나 고장 난 듯한 행태를 보인다면 오라버니도 아침의 언니처럼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리케가 해줬던 조언을 머리에 새겨 넣는다.
앞 문이 열리며 생도가 아닌 교단의 사제님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생도들이 단체로 인사를 하자 사제님들은 허허실실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고.
마지막으로 오라버니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집합!!"
실내를 우렁차게 울리는 오라버니의 목소리에 생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첫 수업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 집합을 하면 예전과 같이 잡담을 꺼내는 간 큰 생도도 없다.
"각 학부에 열외 인원이 있다면 보고하도록."
자신과 독대를 했을 때와 달리 수업에서는 위압감과 냉기를 풀풀 풍기는 오라버니를 보며 클로에는 되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 학부는 열외 인원 없습니다!"
자진해서 큰 목소리를 내는 세리아를 보며 오라버니는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학부는 열외 하나. 로버트 볼트 생도로 사유는 병결입니다!"
1학기 첫 수업에 잇몸이 박살 나게 맞고 군기가 바짝 든 브롬 바스티의 목소리에 오라버니는 바닥에 놓인 펜과 종이를 집어 들어 이름을 찾는 듯 눈동자를 움직였다.
"로버트·· 로버트 볼트. 저번에도 빠졌었지···."
열외자 체크를 마치고 종이와 펜을 던져둔 오라버니는 생도들을 한번 훑으며 물었다.
"따로 특이사항이나 몸이 좋지 않은 생도가 있나?"
"""없습니다!!!"""
타고난 높은 콧대를 접을 줄 모르던 고위귀족의 자제들이 1학기와는 다르게 완전히 기강이 잡힌 모습에 클로에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역시 오라버니는 대단하시네··.'
벽에 걸린 보급형 롱소드를 가져와 지휘봉처럼 손바닥을 일정한 박자로 내려치며 설명을 이어간다.
탁-! 탁-!
"오늘도 한 명씩 돌아가며 대련을 할 거다. 하지만 오늘은 각자가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되는 무기를 말하면 그 무기를 들고 상대해 주며 대응하는 방식을 전수하는 수업으로 갈 거다."
기사 학부와 검술 학부가 서로 벌어져 있는 줄 사이를 가로지르니 바로 옆에 서있는 생도들은 압박감에 숨을 멈췄다.
"대련을 하지 않는 인원은 개인 훈련과 교관에게 지적받았던 내용을 보완하는데 힘쓰도록. 오늘은 기사 학부부터 한 명씩 시작한다. 이상."
'이상'이라는 신호와 함께 익숙하게 생도들이 흩어지고 제일 앞줄에 있는 기사 학부 생도가 긴장한 얼굴로 검을 들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