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26화 (126/250)

Chapter 126 - 사람에 따라서는 작은 일도 고민이 된다.

기사 학부에게는 필수, 검술 학부에게는 선택과목으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실전' 수업이 시작되기 전.

다른 강의보다 유독 길게 시간이 비어있다.

평소의 루틴이라면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부상을 방지할 스트레칭을 더불어 미리 몸을 움직여 근육에 예열을 하지만.

오늘은 클로에의 구조요청에 가까운 상담요청을 받고 아카데미 구석 벤치에 각자의 색이 진한 세명의 소녀가 모였다.

"죄, 죄송해요·· 소중한 시간을 저 때문에··."

"어차피 스트레칭이라 해도 셋이 서서 잡담하는 시간이나 똑같잖아? 클로에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시선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사과하는 클로에를 세리아가 다독였다.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 클로에의 표정에 세리아도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고.

재차 주위를 둘러보고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한 클로에는 본론을 꺼냈다.

"시, 실은 저 혼자서는 옳은 해답을 낼 수 없는 일에 마주했는데··· 그, 가능하다면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흠흠! 과연·· 다양한 의견이 필요한 일이라면 우리 사이에 너무 걱정 말고 편하게 털어놔봐!"

세리아가 특유의 활력과 분위기를 앞세워 클로에의 굳어있는 태도를 풀어나가자 그에 작은 목례로 감사를 표한 클로에는 우물거리던 입을 열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잘못을 저질러 사과해야 할 일이 있는데··· 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받는 당사자들도 제가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당황하게 된다 해야 할지···."

"으으응-?"

클로에의 두루뭉술한 상담내용을 들은 세리아는 의문스러운 소리와 함께 고개를 기울여 바로 옆에 앉아있는 리케의 어깨에 정수리를 붙였다.

리케는 세리아가 붉은 머리칼을 들이밀어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머뭇거리는 클로에를 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클로에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설명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거지?"

"죄, 죄송해요! 상담은 제가 부탁했는데··· 지금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거듭 사과하는 클로에를 리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듬었다.

"괜찮아. 개개인의 사정이 있는 거니깐. 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은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

"흐우우··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클로에는 아까보다 숨통이 트여 개운해진 얼굴로 리케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세리아의 정수리는 여전히 리케의 어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으으음?! 난 그런 사정없는데··."

세리아는 최대한 집중을 하고 있지만 클로에가 말하는 설명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략된 부분이 많다 보니 요점 자체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보였다.

"클로에.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계속해봐 들으면서 판단할게."

"···."

세리아의 한마디가 리케의 말에 자연스럽게 묻히고 클로에도 익숙하게 그 상황을 넘기며 뒷말을 이어 붙였다.

"그래서 제 고민은··· 그 지인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류하고 만나야 하는 관계인데 ㅡ "

리케는 클로에의 사정을 들으며 신원과 관계를 숨기는 노력은 최대한 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귀를 기울이면서도 다른 생각을 동시에 병행했다.

'아무리 자매라 하지만··· 확실히 이런 행동은 에클레어 언니랑 닮았네.'

우물쭈물한 태도로 한조각의 치즈처럼 구멍이 송송난 이야기를 털어놓는 클로에의 사정을 들으며 리케는 에클레어를 연상했다.

외형은 눈매와 분위기에서 극명하게 갈라지다 보니 자매라고 말을 듣고 나면. 그때서야 닮은 구석을 쉽게 찾을 수 있어 납득이 가는 수준이라 하지만.

리케가 드리트나 자매를 만나서 경험으로 느끼고 섭렵하여 쌓아 온 정보들과 눈에 비치는 둘의 성정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외향성과 내향성 같은 단순한 성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인간의 본성.

보통 사람이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 회피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본인만 침묵하면 언젠가 넘어갈 일도 속죄를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 선한 감정의 기인이 본인의 안위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 두 자매의 진정한 성질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 리케는 진심으로 놀랍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매는 삭막한 귀족 사회에 단물과 같은 가족애를 간직하고 있다.

"클로에가 어떤 잘못을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말대로라면 애초에 상대가 클로에의 잘못을 모르고 있는데 지인에게 사과를 하려는 이유가 있을까?"

이미 속내를 파악하고 있는 리케의 날카로운 질문에 세리아도 고개를 들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풀고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건 제, 저의 귀찮은 성격 문제인데."

"응."

세리아는 클로에를 알기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리케도 마찬가지였다.

셔츠의 밑단을 쥐어짜듯 잡은 클로에는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정리하고 준비했던 대본이 아닌 속마음을 꺼냈다.

"상담 주체인 그 지인은 정말··! 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라··· 마, 마음에 이물질을 남기고 싶지가 않아서··."

"오오-"

"쉿."

세리아가 클로에의 솔직한 말에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내뱉자 리케가 손가락으로 세리아의 입술을 꾹 눌러 조용히 시켰다.

노련하게 세리아를 진정시키는 리케를 본 클로에는 이제는 익숙한 일상의 한 장면에 편안함을 느끼며 일기장에 버금가는 자신의 깊은 속내를 열어보였다.

"리케와 세리아도 알겠지만··· 저는 사람을 대할 때 특히 얼굴이나 행동에서 티가 많이 나는 편인데 ㅡ."

클로에가 입이 마를 정도로 장황하게 늘어놓은 내용의 중점은.

'지인'이라고 칭한 소중한 사람을 진실되게 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신에서 이번 트러블을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을 내야 한다.

이대로 피하고 싶은 일에서 도망쳐 시간을 미루고 보내다 보면 분명 잊고 지내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장담컨대 중요한 순간 혹은 정말로 행복한 시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나고 말 것이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듯한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은 불시에 끝도 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때가 되어서는 분명하게 시기를 놓친 때라 사과를 할 수도, 한다고 해도 진정성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미래에 확실하게 후회할 것이라고 클로에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ㅡ제 성격이 이상해서 너무 멀리 보고 걱정하는 망상이라는 자각도 물론 있지만·· 이렇게 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클로에의 말이 끝나고 리케의 손가락이 세리아의 입술에서 떨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리아는 클로에의 풍만한 가슴에 안겨들었다.

"꺅!"

"이렇게 하루하루 강인하고 반듯하게 자라다니- 클로에··! 기사가 아니라 나와 같이 모험가의 길을··· 켁!!"

"이상한 소리로 클로에 혼삿길 막지 말고 다시 앉아."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뒷덜미를 잡아 자리에 앉히고 벤치에 다리를 꼰 채로 리케가 눈을 감고 생각에 들어가자.

세리아와 클로에는 침묵을 지키며 리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뜨이며 리케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향했다.

"클로에가 알고 있으면 상대가 당황하게 된다는 게··· 지인의 부적절한 행위를 보았거나 정보를 알고 있는 게 문제가 된다는 거야?"

"에엣···."

볼을 발그레 붉히며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클로에를 보며 리케는 질문을 바꿔서 물었다.

"지인의 범죄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목격했거나 알게 됐어?"

리케의 말에 클로에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나쁜 건 아니지만 당당하게 언급할 주제도 아니라서··."

"당당하게 언급하지 못한다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른 거지?"

리케의 말에 잠시 멈칫한 클로에가 입을 우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그, 그건··맞아요."

"만약 사과를 했을 때 클로에가 가장 걱정되는 점이 확실하게 있어? 사과를 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가 상대가 당황한다는 게 끝이야?"

"···."

"천천히 생각해 봐. 생각이 나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클로에에게 여유를 준 리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

"저는·· 다 떠나서 제가 사과를 하면 그·· 지인이 반대로 저한테 죄책감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서 무서워요···."

클로에의 말에 세리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소감을 말했다.

"어렵네··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이해도 제대로 못해서 함부로 말 못 하겠어. 미안해 클로에 아무 도움이 못돼서."

"그, 그렇지 않아요! 두 사람이 들어준 것 만으로 너무 큰 힘이 됐어요!"

자신의 사과에 당황하는 클로에를 웃으며 진정시킨 세리아의 시선이 가만히 입을 닫고 앉아있는 리케에게 향했다.

"리케는 어때? 클로에한테 해줄 말이 있어?"

"글쎄- 내 말이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지만 ㅡ."

····

한 귀로 듣고 흘려도 된다는 부가적인 설명과 함께 리케의 말이 5분 정도 이어졌고.

이야기 도중에 노력해야 할 방향성을 조금은 잡은 건지 결연한 표정이 된 클로에를 보며 리케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세리아나 내 조언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 또 들어줄게."

"고, 고마워요 정말로··."

울먹거리며 물기 어린 목소리를 내는 클로에를 본 세리아는 한쪽에는 리케에게 팔짱을 걸고 반대편에 클로에를 걸었다.

"자~ 이제 수업받으러 가자. 무서운 교관님이 늦으면 무슨 벌을 줄지 모르잖아?"

리케는 분위기상 팔짱 푸는 걸 포기하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세 명이 어정쩡한 걸음으로 이동했다.

불편하게 걷는 도중에 리케는 궁금하다는 어투로 세리아에게 물었다.

"세리아는 실전 교관님이 그렇게 무서워?"

"무섭다기보다는 앞에 서면 짓눌리는 위압감이··· 결국 그것도 무서운 건 맞지 않나?"

"흐응~"

"리케는 무섭지 않아?"

"···무섭다기보다는 남자답고 멋있다고 생각해."

"에엣?!"

리케의 말에 탄성을 지르며 놀란 소리를 낸 건 세리아가 아니라 클로에였다.

세리아는 깜짝 놀라 리케가 뭐라 대답했는지도 잊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뇨··아니에요··."

실전 수업을 향해 돌아가는 길.

클로에는 몇 번이고 힐끔거리며 리케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