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8 - 참아야 하는데···.
근육이 꿈틀거리는 거체를 능숙하게 움직인다.
좁은 창문을 소음하나 없이 부드럽게 통과한 로만은 와인병을 책상에 올려두고 척 봐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양 팔을 벌렸다.
"키티~이리 와."
오랜만이라··? 로만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을 기점으로 화끈한 열이 오른다.
로만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리케처럼 활기차게 달려들지는 못해도 쭈뼛쭈뼛 가까이 다가가니 품에 꽉 안아준다.
"고생했어. 많이 바빴지?"
연인의 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따뜻함과 안정감이 그리웠다. 로만의 살내음에 정신이 몽롱하게 풀리며 안정감을 찾아간다.
"음··조금 바빴다. 일이 너무 많이 몰려서···아직 피곤하군."
그래·· 거리낄게 뭐 있나. 연인인데. 남한테는 못해도 로만에게는 조금 앓는 소리를 해도 되겠지.
"우리 키티~ 진짜 수고했어! 상으로 뽀뽀라도 해줄까?"
큰 손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어린이 다루듯이 하는 말투. 신기하게도 로만이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물어보는 질문에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니 쪽! 소리가 서재에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껴안은 채 한참을 천천히 앞뒤로 걷기도 하고 빙글 돌기도 했다.
딸깍-!
밤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닫고 로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키티. 나 안 보고 싶었어?"
바람 소리가 사라진 서재의 침묵이 애틋한 분위기와 감미로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알면서도 꼭 입으로 부끄러운 말을 하게 만드는 이 익살스러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찔러 응징하면서 속마음을 작게 말했다.
"···보고 싶었다."
"흐흐-"
옆구리를 피격 당하고도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보고 있다.
그에게서 들려야 할 말이 돌아오지 않으니 결국 자신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로, 로만은 내가 안 보고 싶었나?"
마치 조교를 당하는 기분. 연인의 속을 알고 있으면서도 직접 말로 듣지 않으니 허전함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분명 이러지 않았는데··· 이게 다 로만 때문인 게 확실하다. 제국에서 이런 스타일로 교제를 하고 있는 건 로만이 유일할 것이다.
'이 남자는 정말···!'
에클레어는 기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성정상 개인에게 휘둘리는 건 질색이다.
그렇기에 대우가 좋고 편한 영지의 기사가 아니라 겉으로라도 국익을 목표로 하는 제국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설명은 할 수 없지만··· 결이 다르다.
로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길은 하반신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흥분과 부끄러움을 가리고 따르기만 하면 칭찬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보고 싶었지."
겨우 다섯 글자에 마음이 차분해지며 나도 모르게 안심의 숨을 길게 뱉는다.
완전히 무장 해제된 감정이 그에게 감정을 숨기지 말라고 등을 떠민다. 그래야만 원하는 말을 최대한 빨리 들을 수 있다고.
"로만."
"응?"
넓은 가슴팍에 안겨 올려다보니 도저히 입이 안 열린다. 다시 품으로 얼굴을 내리고 들이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속삭이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원하는 말을 시원하게 해주니 입꼬리가 종잡을 수 없이 들썩였다.
이런 헤픈 얼굴을 보이지 않게 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고개를 드니 로만이 자신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꿀이 떨어지는 애정 어린 눈으로 응시한다.
이어지는 행위에 대한 기대감을 듬뿍 담아 에클레어는 자진해서 눈을 살포시 감았다.
"읍··!"
아까의 짧은 입맞춤과는 다른 농밀함.
자신의 입안을 밀고 들어오는 로만의 혀를 받아들이며 수동적인 형태를 취한다.
로만의 앞에서는 자신이 나서서 책임을 지고 지휘를 할 필요도 없고 힘들었던 것들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그저 그런 생각.
자신을 질식시킬 기세로 거친 키스를 이어가는 로만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흥분이 차오르며 아랫배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쮸읍··헤읍··!"
헌데 어째서 손은!
평소처럼 커다란 손을 이용해 우악스럽게 젖가슴을 움켜쥐거나 엉큼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둔부를 탐하지 않고 상냥하게 허리를 감고만 있는지.
스트레스와 조바심 등으로 머리끝까지 쌓여 해소되지 못한 성욕이 제발 좀 나가게 해달라고 몸부림친다.
숨구멍까지 막을 기세로 점점 차오르는 욕구에 머리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로만··! 짓궂은 행동은 그만해라··!"
입술 사이에 늘어지는 은색 실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에클레어가 살벌한 눈빛으로 로만을 쏘아봤다.
"응? 짓궂다니?"
자신의 말에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는 저 밉상의 볼을 강하게 꼬집어주고 싶었다.
"···."
"서재에서는 안된다고 해서 나는 괜히 자극하면 안 좋을 거라 생각했지."
자기가 뱉고 이처럼 후회되는 말은 오랜만이었다.
오늘만은 정말 참기가 힘든 날인데···평소처럼 뻔뻔하게 선을 넘어오려 들지 않는다.
방금 키스를 하며 스위치가 완전히 들어와서 오늘만은 로만이 저번처럼 꼬드기면 못 이긴 척 넘어 가주려 했다.
'변태··!!'
로만이 원하는 건 분명 자신의 입으로 교접을 하고 싶다는 걸 들으려는 것이겠지.
미칠 것 같아도 이성이 멀쩡하게 존재하는 맨정신에 그걸 말하는 건 리케와 달리 자신에게는 아직 벽이 높았다.
정사를 몇 번이고 이어가며 정신이 느슨해진 상태면 자연스럽게 외설적인 말을 하게 되지만 지금은···한숨만 나온다.
-어때요? 우리 주인님은 '변태'라서 이걸 마셔주면 엄청 기뻐해요.
3명이서 함께 했던 날에도. 로만이 변태라는 리케의 말에는 반론 없이 격한 동의를 하게 된다.
도대체 로만이 가진 성벽은 몇개인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자신을 보면서 어떤 특별한 흥분이나 만족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날름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클로에가 있는 저택과 서재에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던 자신이 머리에 떠오른다.
'한 마디면··.'
로만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에클레어는 갈등을 계속했다.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움직이다 눈에 들어오는 와인병. 분명 로만이 서재로 들어오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다.
"···저 와인은 뭐지?"
"그냥 선물로 사 왔어. 탄닌감이 풍부한 와인을 선정했으니 우리 키티의 입에 맞지 않을까 싶어서."
예전에도 그렇고 분명 자신의 입맛을 말한 기억이 없는데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는 게 또 기특했다.
저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 하나에 밉상이라는 이미지가 지워지는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고맙다··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저번에 말했거늘."
"그냥 같이 마시고 싶어서 사 온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보관해뒀다가 여유 있을 때 마시자."
로만의 품에 안겨 잠시 생각을 마친 에클레어는 로만의 허리를 양팔로 강하게 조여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로 향하자 에클레어는 살짝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일은 오후에 잠깐 출근해서 처리 사항을 확인만 하면 끝이라 술을 마실 여유가 있다. 하지만 로만은 내일 아카데미에 수업이 있는 날이지?"
"그렇긴 한데- 저 정도는 마셔도 문제없어. 마나로 풀어도 되고."
"클로에와 리케를 가르치면서 지금 술에 취한 주정뱅이 상태로 가겠다는 말인가?"
"아니 와인 한 병으로 둘이 마시는데 주정뱅이라니··."
"아무튼 그런 건 내가 허락 못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술이 무척이나 마시고 싶은 날이군."
자신의 억지에 화를 내기는커녕 로만은 웃으며 머리를 쓸어내려준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애정과 자상함만 남은 목소리는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줄 예감이 든다.
"진짜 귀엽긴··· 그러네~ 술을 마시고 생도들을 가르칠 수는 없지. 하지만 키티는 술을 마시고 싶고··· 어떻게 해줄까?"
"로만이 따라주는 와인을 마시고 싶지만··· 정말 아쉽게도 서재에 찻잔은 있지만 와인잔은 없지."
"내 준비성이 부족했네. 다음에는 준비해올게."
"아니··내가 준비해두지. 이번 준비성 부족에 대한 안건은 간단한 처벌로 용서하겠다."
"하하! 고마워. 마음씨가 넓네."
어떤 태도로 나와도 자신에게 져주기로 마음을 먹은 듯 로만은 헤실 거리며 자신을 귀엽다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벌이다··로만···! 오늘은 내 술잔이 되어라."
"술잔?"
이해를 하지 못하는 로만을 보고 에클레어는 시뻘게진 얼굴로 짧게 설명했다.
"이··입으로·· 와인을 조금씩 머금고··! 내게 정중하게··따르는 거다!"
이야기를 들은 로만의 눈에 짙은 욕구가 번쩍였다. 에클레어는 그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에 침을 꿀떡 넘겼다.
"좀 흥분되는데?"
퐁-!
와인병을 들어 손가락으로 코르크를 뽑아낸 뒤 바로 병을 입에 물려고 하는 로만의 팔을 에클레어가 놀라서 제지했다.
"서,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라··!"
"또 내리실 명령이라도?"
"내일 여유도 있고 와인을 즐기고 싶으니 마나를 사용하지 않을 거다·· 차음은 로만이 확실히 하리라 믿겠다··."
자신의 연인은 취하고 싶다는 뜻과 '차음'이라는 단어로 상황을 이해하고도 남을 남자다.
로만은 손을 슬금슬금 내리더니 자신의 엉덩이를 떡처럼 주무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설프게 기사 흉내를 내는 로만의 가슴을 이마로 살짝 들이박아 응징한 에클레어는 와인을 마시기 전 마지막 말을 꺼냈다.
"나는 주량이 실제로 강하지 않으니···취해서 실언을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해도 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잊도록··."
에클레어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억지스러운 전개였지만.
로만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웃다가 자신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고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