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7 - 참아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교양 수업이 끝나자 자신을 제외한 기사 학부의 생도들은 각자 일행을 찾아 모여들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오는 학부생은 없기에 클로에는 물건을 챙기고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끝났다아··!'
클로에가 아카데미에서 제일 기다리는 시간은 지금부터! 바로 점심시간이다.
먹는 것에 대한 식탐이 아니라 순수하게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
삶이라는 물결이 평생 이런 느낌으로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헤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
오라버니 덕에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친구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오늘은 유달리 웃음이 헤프게 흐른다.
자신의 유일하다 할 친구 두 명은 완전히 상반되면서 자신만의 특색과 색깔이 진하다.
모두 자신에게는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어 가볍게라도 자리를 가지면 항상 배우는 게 많다.
한 명은 외모도 그렇지만 보석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눈동자가 특히나 아름답고.
자신이라면 당당하지 못할 얼굴의 흉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태도와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강인한 심력은 존경스럽고 절로 동경하게 된다.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는 시니컬한 분위기와 다르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언변에서 자신들을 생각해 주는 반전적인 태도가 묻어난다.
속뜻을 눈치채면 한발 늦게 감동하게 되어 곱씹게 되는 그 매력이 실로 무서울 정도.
또 다른 한 명은 소동물을 연상시키는 귀여운 외형에 파릇파릇한 식물처럼 녹색 빛이 나는 강인한 활기가 최고의 매력이라 할 것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거리낌 없이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교성과 실전 수업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만한 열정이라 모험가를 꿈꾼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행동으로 증명한다.
그만큼 감정이나 활기가 외부에 강하게 표출되는 스타일인데도.
중요한 순간에 기가 막히게 정도를 지키는 눈치와 제동능력은 흥분하거나 신이 나서 혼자 선을 넘어버리는 일이 있는 자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능력이라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
"···!"
집합장소로 향하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걸음의 속도를 높여 다가간다.
"기다리셨나요? 최대한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
"우리도 방금 왔어~"
활기찬 세리아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게 된다.
"점심은 어떻게 할까?"
리케의 말을 신호로 일단은 자리를 벗어나 식당이든 카페든 도서관이든 목적지로 움직이기 편한 아카데미의 중앙으로 향한다.
··
오늘은 검술 학부도 기사 학부도 실내 수업이 몰려있는 날이라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에 점심은 가볍게 카페에서 해결하기로 결정되어 누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매번 시간을 보내는 카페로 발을 움직였다.
아카데미에서 조금 거리가 있지만 사람이 없는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은 셋은 각자의 입맛에 따라 주문을 한 뒤 자리에 앉는다.
비어있는 테이블에 햇살이 큰 줄기를 그리며 가로지르는 이 시간이 클로에는 좋았다.
"클로에~"
"네에?"
평소와 같이 세리아가 조용했던 분위기를 파고들며 대화의 포문을 연다.
"우리 아까 수업 끝내고 이동하면서 클로에 봤다?"
"에~ 편하게 불러주셨으면 잠시라도 들렸을 텐데··."
오늘 검술 학부와 가까운 강의실이 있었나 수업 장소를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거리가 불러서 부를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어. 멀~리 있는 클로에가 보인 거지."
호들갑스러운 제스처가 섞인 세리아의 말에 클로에는 자신의 잿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적거렸다.
"뭐, 뭔가 부끄럽네요··."
역시 혼자 있더라도 행실을 조심해야겠구나 재차 다짐하게 된다. 자신은 혼자라 생각해도 타인이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쪼르륵-
차와 간단한 요깃거리들이 테이블을 채우자 리케가 먼저 손을 뻗어 홍차를 찻잔에 반 채우고 우유를 섞어 밀크티를 만들었다.
세리아와 클로에의 입맛은 닮은 편이라 그 자체로 시원하고 달달한 음료를 주문했기에 특별한 과정 없이 빨대를 빨기만 하면 된다.
"헤으ㅡ 이제 좀 살겠다. 공부하느라 머리를 너무 써서 단 게 필요했어."
초코 스무디를 쭈욱 섭취하며 한탄하는 세리아를 리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봤지만. 세리아는 리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침묵으로 구렁이 담 넘듯이 도망간다.
"오늘은 계속 앉아있어야 했으니·· 움직이는 수업을 좋아하는 세리아에게는 힘들었겠네요."
얼마 전부터- 습관이 되어버린 존대는 유지하더라도 이름 뒤에 '양'은 빼보자는 리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처음과 달리 두 명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는데, 거리감이 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라 클로에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라버니부터 시작해 친구를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는 건 실질적으로 자신의 사회성이 성장하고 있다는 실감이 되었기에.
"그치이~ 클로에가 나를 잘 알아! 리케도 나한테 따뜻한 칭찬의 빈도를 조금은 늘려주면ㅡ"
주제는 세리아가 말하는 것을 주축으로 소소한 잡담을 이어갔다.
식사 대용으로 주문 한 샐러드와 크림치즈 카나페를 비워내니 세리아가 녹안을 빛내며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클로에~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될까?"
오늘 오라버니의 뜬금없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거나 갑작스럽게 듣게 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질문이 무엇인지 듣기 전에 심호흡으로 준비를 끝마치니 세리아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기라도 하는 듯 리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우리가 클로에를 멀리서 봤다고 했잖아?"
"네에··그랬죠."
"그때 실전 교관님이랑 있는 걸 봤거든."
"아··엣!!"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 있는 대본을 잊기 전에 전달해야 한다는 일념에 타 학부의 생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라버니에게 향했으니.
아까 둘이 자신을 봤다는 게 그 순간이었구나.
"그···실전 교관님한테 혼이 나거나 한건 아니지?"
"생도의 휴게 시간에 불러서 혼을 낸다니. 그럴 분이 아니잖아··· 보이는 분위기도 그렇지 않았고."
홍차와 우유를 재차 리필하고 찻잔을 티스푼으로 젓고 있던 리케가 침묵을 깨고 세리아의 말을 정정했다.
"혹시 모르니 하는 말이지··다른 경우는 아예 생각이 안 나서··."
리케의 말에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쭈그러드는 세리아를 보며 클로에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도 이건 지금 대화 주제로 꺼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혼이 난건 아닌데·· 죄송해요! 저 혼자만 관련된 일이 아니라서···나중에 말해도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두 분에게 제일 먼저 말할게요!"
세리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클로에를 보다가 씨익 웃으며 바로 납득했다.
"음···그렇구나! 오히려 지금은 안된다고 확실히 말해주니 속이 편하네. 그럼 기다려야지!"
"고마워요··."
궁금하지만 친구 사이를 거론하며 농담으로라도 더 파고들지 않는 게 세리아의 장점이자 센스라 할 것이다.
"아아~ 다 떠나서 지금 맹렬하게 감동했어! 처음 만났을 때는 혼자 디저트 가게도 못 들어가던 클로에가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해주다니. 성장했구나!"
눈가를 부여잡고 우는 시늉을 하며 세리아가 클로에의 회색 머리칼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는 흉내를 냈다.
"응. 혼자만 관련된 일이 아니라서 비밀을 지키는 모습이 기사님 같아서 멋있네."
리케까지 작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 칭찬해 주니 클로에는 되려 어떤 리액션도 취하지 못했다.
무언가 몽글몽글하니 마음이 울컥 차올라 눈물이 날것 같아 클로에는 차가운 음료를 쭉 들이켜서 겨우 참아냈다.
성장.
자신이 한 없이 부족했던 부분에서 타인의 입으로 인정을 받으니 또 눈물샘이 고장날 것 같았다.
"과, 과분한 말씀을··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눈치가 빠른 둘은 자신의 상태를 알았겠지만 평소처럼 대하며 분위기를 빠르게 환기해 나갔다.
아카데미에 와서 이 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클로에는 오늘도 누차 그 생각을 가슴에 상기하고 깊게 새겼다.
*****
"후우ㅡ"
클로에와 저녁식사를 끝내고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이 되었다.
목욕을 끝내고 서재에 들어온 에클레어는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며칠간은 업무에 짓눌리며 이게 무슨 재앙인가 싶었다.
하나씩 와도 신경을 쏟아야 할 일들이 이렇게 한 번에 몰아치니 지금까지 정신이 없었다.
무력과 실적을 토대로 기사단장이 되었는데 어째 검을 잡는 시간보다 펜을 잡고 서류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 허무하다 해야 할지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힘을 낸 만큼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로만에게 내릴 황실의 보상을 관계자들과 의논하고 은익의 기사단장으로서 단원들 개개인에 대한 인사고과를 내리고 부단장과 마지막 검토까지 끝냈다.
기사들의 보급품과 봉급에 관한 계약을 시작으로 정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자잘한 업무들이 쉬지 않고 몰아쳤지만 어떻게든 끝을 내고 오늘 클로에와 식사를 한다는 약속까지 지켜냈다.
-오··라버니한테 오늘 언니랑 저녁을 먹는다고 말했는데 ㅡ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오면서 한편으로 기대가 되었다.
남자라면 기겁을 하는 클로에가 로만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다니?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동생의 성장이 흐뭇하기도 했다.
어떨까. 오늘 자신이 저택에 있다는 걸 들은 로만은 찾아올까?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충분···하지는 않다. 절대로.
성욕이라는 걸 해소하는 맛을 알고 난 뒤로는 정신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습관처럼 로만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이런 세계를 몰랐다면 그냥 찜찜한 기분으로 영문도 모르고 지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무리 급해도 서재에서는 안돼. 오늘은 만나더라도 이야기만 한다···!'
클로에가 저택에 있는데 정사를 벌이다니 말도 안 될 파렴치한 짓.
앞으로 시간 여유가 조금은 있을 것 같으니 오늘만은 자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기다리느라 집중이 안 되는 책은 바로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군.'
곧 있으면 오랜만에 로만을 만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두근거린다.
서재에 놓인 거울로 매무새를 빠르게 확인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밖에서 타고 올라오는 미약한 기척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기 그지없어 집중하고 있는 자신이 아니면 저택 내부에서 눈치를 채고 감지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콩! 콩!
창문을 작게 노크하는 소리.
한 손에 와인병을 들고 있는 로만을 보고 에클레어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며 조급하지 않아 보이는 움직임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딸깍-!
창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며 밤바람과 함께 로만이 서재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