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6 - 좋은 걸 봤다.
"오라버니··."
상대를 향해 직접 입으로 말해보니 언니가 자신의 말에 화들짝 놀랐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혼자 중얼거려 보거나 언니에게 언급했던 그 순간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어라··이, 이게 이렇게 부끄러운 호칭이었나··?'
오라버니라는 이 호칭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클로에 나름의 고찰과 고심이 들어가 있었다.
언니와 반대되는 '오빠'라는 말은 예의가 없어 보이고 현재 교관님과 자신의 관계를 담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한 단계 높여 예의를 차려 칭하자는 생각이었는데.
클로에는 얼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감각에 손을 얼굴에 올려보려다 교관님의 앞이라는 걸 알고 어떻게든 자제했다.
'시, 싫어하실까?'
반응을 기다리는 잠깐의 침묵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걱정에 절로 무거워지는 고개가 시각을 밑으로 고정시키고 대답을 청각으로만 기다리게 만들었다.
"크으-!"
좋다. 싫다. 가 아니라 무더위에 시원한 냉수를 들이킨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생각이 들었지만 바닥에 처박혀있던 시선의 속박이 풀리는 느낌.
살짝 시선을 들어 교관님을 보니 팔짱을 끼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분명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되지만 괜한 걱정에 확인을 위해 물었다.
"역시 이상··할까요?"
"아니! 그럴 리가! 사실 많이 가도 이름에 님을 붙이거나 아저씨? 정도를 생각했는데 오라버니는 복에 겨울 정도로 과분하지."
"아, 아저씨라니···그런!"
실제 교관님은 연상이라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건 아니었다.
몸의 완성도나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흉터들, 그리고 수업을 하며 보여주는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은 수십 년을 구른 강자이자 베테랑의 느낌이 여실하게 풍기지만.
그와 역설적으로 얼굴만 보자면 자신 보다 연상이라는 느낌만 살짝 드는 정도에서 그친다.
"오라버니라~ 싫어할 남자는 없겠지. 나는 그냥 클로에라고 부르면 될까?"
실전 수업에서 그 냉정하고 차가운 교관님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랑하고 활력이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언니의 조언대로 겁먹지 말고 직접 물어보면 싫든 좋든 꾸밈없는 반응이 나올 거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네에!"
자신의 대답에 돌아오는 흐뭇한 미소에서는 동급생이나 흔히 마주하게 되는 남자들처럼 음습한 끈적임이나 질척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문을 지고 계신 아버지처럼 엄한 분위기도 아니며.
반대로 따뜻하고 맑은 느낌까지 들어 이 익숙함은 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뜬금없지만 동생이 생긴 기분이네."
저 말을 듣고 자신도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자상함을 가진 오빠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미래에는 그런 가족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확연하게 높기도 하니 마음이 살짝 들뜬다.
"헤헤··."
미소를 머금은 채 흉터가 진 턱을 매만지던 오라버니는 자신을 응시하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물론이에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보였다. 검붉은 눈동자에 스치듯이 지나간 피로감과 불안.
숨을 내쉬며 검은 머리를 이마가 보이게 살짝 넘긴 오라버니는 금세 부정적인 표정을 지워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그렇고 내가 가까운 사람들의 안전에는 특히나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혹시나 내가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
"···네?"
순간 대화의 맥을 잡지 못한 클로에의 입에서 의문스러운 억양이 나갔다.
"무력이 아니어도 좋아. 경험이 필요하거나 재력이 간절한 순간이나 혹은 인맥이나 권력··· 클로에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에클레어가 없다면 일단은 나를 불러. 귀가 좋으니 큰 소리로 오라버니! 하고 외치면 들릴지도 몰라."
"···."
주고받는 게 기본인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 말이 안 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제안이지만 덥석 받아들이기 힘든 말에 클로에는 어쩌지도 못하고 움찔거렸다.
자신은 그만한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당장 깔끔한 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오라버니는 비밀이라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소곤소곤 뒷말을 한 줄 더 꺼냈다.
"먹고 싶은 케이크가 있는데 용돈이 부족할 때도 괜찮아."
"엣··!"
말의 끝은 자신이 봐도 알만큼 장난기가 듬뿍 들어간 말이었다.
디저트 가게에서부터 의문이었지만 자신이 달달한 것과 케이크를 좋아하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걸까.
"저 교···오, 오라버니."
습관적으로 교관님이라는 말이 나오려다 호칭을 수습했다. 얼굴에 다시 뜨끈한 열이 오르는 듯했지만 아까보다는 괜찮았다.
짧은 사이에 적응이 일어나는 것이 자신답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상황일 것이다.
"왜?"
신기한 분이다··· 이게 교관이 아닌 모험가로서 평소 모습이신 걸까? 언니의 말대로 어쩐지 알기 쉽고 감정에 솔직하다.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목소리에서 기쁘다는 게 느껴지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민감하지만 신경 쓰이는 질문을 조금은 편하게 꺼낼 수 있었다.
"제가···살이 많이 쪘나요?"
"무슨 소리야?
정말로 모르겠다는 오라버니의 얼굴. 그럼에도 클로에의 손은 조심조심 자신의 배로 향했다.
내려다보면 복부에 얹힌 손이 보이지 않게 막아서는 가슴은 가문에서 식단을 조절하며 성장기에 들어설 때부터 커지기 시작했으니 디저트와는 분명 관계가 없을 거라 믿었다.
철저하게 식단을 조절하는 언니도 사이즈가 평균보다 크지 않은가.
주물주물.
'배··뱃살은 없는 것 같은데··?'
언니처럼 단단한 복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훈련을 계속하고 있으니 잡히는 군살 같은 건 아예 없다···는 아니고 많지는 않다.
드리트나 가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그··· 디저트를 좋아하는 게·· 외, 외관에서 티가 나나 해서···."
자신의 말에 동작을 완전히 멈춘 오라버니는 큰 실수를 했다는 얼굴로 사과를 먼저 꺼낸다.
"진짜 미안! 내가 그런 부분을 신경 쓰는 게 서툴러서·· 그냥 그 나이의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게 달달한 디저트라고 들어서 그런 거야."
"아, 아니에요! 사과하실 것 까지는···!"
그런 거였구나. 자신의 어림짐작이 부끄러우면서 안심이 되었다.
··
오라버니와의 대화는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즐거웠다.
긴장감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줄었고 말을 더듬는 일도 확연하게 줄었다.
멀리서 자신과 같은 기사 학부의 생도들이 강의실로 이동하는 걸 보고 클로에는 이제 휴게 시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수업에 가봐야 한다는 말을 꺼내자 오라버니는 시원하게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클로에. 다음에 보자! 재미있었어."
마나가 옅어지는 느낌에 클로에는 차음이 끝나기 전에 인사를 하자는 생각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저도··! 즐거웠어요."
*****
잠이란 가능할 때 챙겨둬야 한다!
세리아는 오늘도 현명한 생각을 가장한 변명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겸 위안했다.
아카데미를 나오면 모험가가 될 운명인데 쓸데없는 교양이나 이론수업은 낙제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 하고.
"흐캬아아암~"
촤아아-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세면대에서 손을 빡빡 문질러 씻었다.
수업 중간부터 끝까지 졸았지만 수마는 아직도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어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루 종일 앉아서 듣는 수업들 뿐이라 억눌린 체력이 반대로 과부하를 일으키는 느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졸리네··.'
스륵- 슥-
리케나 클로에와 달리 손수건을 들고 다니지 않기에 물기는 몇 번 털어내고 정복에 대충 슥슥 닦는다.
언니가 봤다면 입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한 것과 정복에 손을 닦는 것에 깊은 한숨을 쉬었겠지만.
이것조차 투박한 모험가의 삶과 숙영에 적응하기 위한 연습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다음 수업은 뭐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론 수업일 텐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케에게 물으면 알고 있겠지.
"흠! 흠!"
숙면으로 잠긴 목을 풀어내며 복도로 나온 세리아는 창밖을 보고 있는 리케의 표정을 보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우, 웃고 있어?'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 당연히 웃겠지! 하지만 그 빈도는 모두 다른 법이다.
리케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기는 하지만 그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데 저렇게 흐뭇함까지 묻어나는 미소를 그리는 건 처음 본다.
무엇을 봤기에 저런 얼굴을 하나 시선을 따라가니 저 멀리 의자에 앉아있는 익숙한 회색 머리가 보였다.
거기에 보기만 해도 어깨가 뻐근해지는 신체의 엄청난 굴곡까지. 빼도 박도 못할 자신들의 친구 아닌가.
"클로에랑ㅡ 에엑!!"
본인도 절제하지 못한 목청으로 큰 소리를 내고는 입을 막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지금 이 복도에는 리케와 자신뿐이었다.
일단 안심한 세리아는 눈알을 유리창 밖으로 내던질 기세로 얼굴을 바짝 붙여 시선을 창문 너머로 집중했다.
"같이 있는 거··· 실전 교관님이잖아?!"
자신들을 제외하고 타인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는 그녀가 누구랑 대화를 하고 있나 했더니 맞은편에 있는 상대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특유의 분위기와 신체적 특징은 여기서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든 그림이라. 저 둘의 접점이라고는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수업이 끝 아닌가?
연령이 비슷하고 분위기가 비교적 가벼운 남자 생도들을 대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회피하는 그 클로에가!
권위나 기운의 압박감으로 치자면 남자 생도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교관님과 저리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광경이··· 현실이 맞나?
자신이 아직 졸음에서 깨지 못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흐응~ 좋은 걸 봤네."
묘하게 에로틱한 느낌이 첨가되어 있는 리케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거기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세리아는 물기가 남아있는 손으로 눈가를 닦아 정신을 완전히 깨웠다.
"교관님이랑 클로에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글쎄··? 시간 없으니 강의실로 가자. 여기서 계속 봐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평소처럼 부동심이 느껴지는 무표정으로 돌아온 리케를 보며 세리아는 덩달아 안정감을 찾았다.
"클로에 덕에 잠이 다 깼네··."
저 멀리 있는 친구에게 속으로 보내는 감사는 감사고 별개로 신기한 건 신기한 것.
세리아는 무심하게 돌아서 걸어가는 리케의 뒤를 따르면서도 클로에가 보이는 창밖을 계속해서 흘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