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5 - 호칭은 ■■■■?
"하아-"
내가 꿈꾸던 생활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입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최고의 여자'들' 그리고 돈 걱정 없는 한량 같은 생활. 내 기준에서 이 선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생활이 없음에도 지금은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다.
'속이 답답하네···.'
물구나무를 서서 고구마튀김을 먹어도 체할 일이 없는 강인한 몸뚱이인데 가슴에 묵직한 누름돌 하나가 얹힌 듯 갑갑했다.
날씨는 화창해도 기다리고 있는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으니 요즘은 항상 머리가 복잡하다.
'벌써 열었나? 진짜 로버트가 처리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열고 두 번째 유랑자를 만나 도망갈 수 있을 실력도 아니고.
그럼에도 경우의 수는 많았다. 안 그래도 부족한 머리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려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로버트와 아이작이 만났으니 두 번째 차원이 열릴만한 타이밍인데 이렇다 할 소식이 없으니 이 잠잠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었다.
벤치에 앉은 채로 시선을 굴려 일자로 늘어선 아카데미의 웅장한 건물들을 한번 훑는다.
눈에 들어오는 한적함은 폭풍이 오기 전 날의 조용한 밤 같기도 하면서 어떤 사건과도 연계가 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아닐까 싶었다.
"쩝··."
수업이 없는 날에 이렇게 아카데미에 온 이유는 당연하게 하나뿐. 로버트와 아이작의 동태에 관련된 문제 때문이다.
실질적인 일정은 없으니 집에서 훈련을 하며 리케를 기다려도 되겠지만 머피의 법칙은 정말로 두려운 법이다.
나는 사고와 관련된 머피의 법칙이 우연이 아니라 나태함에서 일어나는 불행이라 여기는데- 하루 게으름을 피웠다가 로버트가 사고를 터트려서 리케가 다치기라도 하면 난 평생을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에클레어가 슬퍼하는 모습도 보기 싫으니 클로에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 릴리네의 동생인 세리아는···가능하다면.
그나마 리케, 클로에, 세리아가 붙어 다니는 시간이 적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순간에는 한 번에 한 곳만 신경 쓰고 있으면 되니.
'생각난 김에 오늘도 에클레어한테 가볼까···.'
최근에 줄곧 야근 혹은 제때 퇴근을 못하고 있는지 밤에 서재를 찾아가도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어제는 리케와 글레이프니르에 대한 고찰을 하느라 날을 꼴딱 지내버려 에클레어가 퇴근하고 저택에 왔는지 확인하러 가지 못했고.
에클레어에게도 글레이프니르를 한번 보여주고 반응을 보고 싶었다.
"음~"
이번 선물은 뭘 사서 에클레어의 서재를 찾아가 볼까. 그것도 제법 어려운 고민이다.
'오늘은 선물로 와인이나 한 병?'
에클레어의 입맛이라면 당도가 적고 흔히들 드라이하다고 부르는. 탄닌감이 풍부한 와인을 좋아하겠지.
매번 부담스러우니 괜찮다고 하면서 그녀의 재력이나 권위에 턱도 없이 가벼운 선물에도 기뻐하는 게 티가 나서 빈손으로 갈 수가 없다.
그녀가 없는 날에는 서재 창문에 물건을 잘 끼워두거나 줄로 달아두고 돌아가는 방식을 고수 중인데.
최근에도 에클레어에게 남긴 물건이 사라지고 시니컬하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겨주는 걸 보면 집에 들르긴 하는데 시간이 서로 어긋나는 것 같다.
'무뚝뚝한데 나름 애정표현을 담으려 하는 모습이 귀엽단 말이야~'
에클레어가 남긴 메모를 보면 느껴지는 게 많다.
그녀의 날카롭고 딱 떨어지는 평소의 글씨체를 알기에 내게 남기는 짧은 글귀를 적으면서도 고심을 한다는 게 느껴진다.
글의 시작점에서 장시간 펜을 누르고 있어 잉크가 원형으로 번져있다거나, 무언가 표현을 하려다 머뭇거린 흔적들도 남아있어 내게는 에클레어가 남긴 메모 하나하나가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보물이나 다름없다.
가끔 본인도 밤의 감성에 잠식되는지 감성적인 글을 남기는 때도 있어 그 갭이 기가 막혔다.
만나서 그런 메모를 언급하는 건 본인도 부끄러운지 절대 허락해 주지 않지만.
'핸드폰이 없는 이 시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이자 감성이지.'
나는 악필이라 메모를 남겨도 멋이 죽어버리는 느낌이라··· 받는 당사자인 그녀가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딱히 감상을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우편이 보편적인 이 시대에 특별한 마도구가 없다면 메모는 필수적 요소.
에클레어에게만 남기는 게 아니라 리케에게도 걱정을 사지 않도록 항상 메모를 남기는 습관을 기르고 있다.
집을 잠시 비우거나 모험가 길드를 가야 할 때가 대표적이며.
정사에 지친 리케가 깊이 잠들어 있거나 아카데미에 가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선다.
리케는 그것들을 모아 따로 앨범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좀 많이 놀라긴 했다. 내 악필이 대단한 미술품인 마냥 박제가 되어 있는 게 죽을 만큼 부끄럽기도 했고···.
그만두라 하기에는 리케가 너무 즐거워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 여자가 행복하면 된 거니까.
에클레어는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정리하는 쪽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내 메모를 읽고 어떻게 처리하는 걸까.
'다음에 메모는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내 경우는 둘의 편지와 메모를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편이다. 메신저가 없는 세상이니 사람이 이렇게 되더라.
ㅡ
앉아서 감각을 아카데미 경계 쪽으로 쏟고 있으니 꽂히는 시선들 중 적개심이 없는··· 유달리 깨끗한 시선 한 줄기가 느껴졌다.
'응?'
아카데미에 올 때마다 신경을 쓰고 지켜보느라 리케만큼은 아니어도 이제는 익숙해진 존재감 중 하나.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쭈뼛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클로에가 보였다.
내 쪽으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이 마주쳤으니 손을 작게 흔들었다. 먼저 인사를 해주는 게 그녀의 성격과 입장상 편할 것이고.
동작은 작지만 확실하게 꾸벅 목례를 한 클로에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빨라졌다.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해야 할지 속도가 아니라 움직임에서 망설임이 없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여기로 오는 건가?'
탁.
벤치 앞에서 걸음을 절도 있게 멈춘 그녀는 몇 초 후. 언제 당당했냐는 듯 양손을 모아서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이 실로 내가 설정으로 알고 있는 클로에 답다고 생각이 들어 웃음이 올라오려는 걸 눌러 삼키고 먼저 화두를 던져줬다.
"잘 지냈어?"
"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내가 아니라 멀리서 클로에를 보는 끈적한 시선이 제법 많았다. 그것도 남자 학부생들.
'인기가 상당한데?'
우웅-
보는 눈들이 있으니 소리를 적당히 차음 시킨 뒤 저번 독대의 느낌을 살려 편한 말투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쉬는 시간인가 보네?"
투명하게 둘러싸인 마나의 감각이 익숙한 클로에는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꺼냈다.
"네에-! 그, 교관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리고 상담을 드릴 내용도···무, 물론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할 이야기에 상담이라·· 편하게 말해. 나야 시간이 넘치니."
아카데미에서 생도의 상담이라. 실로 수업을 제외하고 교관 다운 일이 아닌가.
'검에 대한 조언은 같이 사는 에클레어가 있으니 아닐 것 같고. 모험가나 실전에 대한 궁금증이라도 있는 건가?'
무어라 작게 입을 움직이며 준비를 하는 그녀를 가만히 기다렸다.
"교관님이 저, 전번에 선물해 주신 케이크는 정말 감사히···!"
야옹-!
이 무슨 노련함이 느껴지는 끼어들기. 칼 같다고 평가할 만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제서야 무언가 준비를 끝마치고 이야기를 시작한 클로에의 곁으로 아카데미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흰 털에 윤기가 반질반질하고 통통한 게 주인 없는 길고양이 치고는 잘 먹고 다닌 티가 난다.
불의의 일격에 말이 끊어졌던 클로에는 자신의 종아리와 로퍼에 볼을 비비며 드러눕는 고양이를 일단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교관님이 전번에 선물해 주신 케이크···!"
애오옹!
"···."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말을 끊어낸다. 클로에가 고양이를 보는 눈은 원망스러운 눈망울이었다.
'혹시 고양이랑 같이 준비한 합동 개그 같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다시 말을 꺼내도 같은 순간에 클로에를 방해할 것 같은 통통한 고양이를 손으로 잡아들었다.
"이게 돼지야 고양이야···가! 훠이!"
샤아아악!!
'딱 봐도 수컷이구만.'
남자의 손길은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하악질을 한 고양이는 저 멀리 달아난다.
"···읏."
계획대로 뭔가 안됐는지 클로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 같아 그녀가 끝마치지 못한 말을 내가 대신해서 이었다.
"어- 그래. 케이크는 괜찮았어? 거기가 유명하다고는 하더라."
"그게···으으··."
딱!
눈이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초점을 못 잡는 클로에의 정신을 핑거 스냅으로 잡았다.
디저트 카페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클로에와 이야기를 할 때는 질문으로 단답을 유도해 주는 게 좋다.
"케이크는 맛있었어?"
"···네에!"
딱! 하고 트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케이크가 입맛에 맞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케이크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거야? 굳이 안 해도 괜찮은데. 에클레어에게 전해준 보답 같은 거라."
"아, 아뇨! 그래도 감사 인사는 전해야···그리고 언니가 보내준 디저트에 대한 감사와 안부도 전해달라고 해서···."
"전해줘서 고마워. 요즘 에클레어를 못 보긴 했네. 많이 바쁘지?"
"그런 것 같아요···최근에 새벽에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 날도 많아서···."
"음음."
간단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호응하며 클로에가 머리를 정리하고 말을 이어가는 걸 기다렸다.
"오,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은 소식이었다. 마침 오늘 찾아가려 했는데 돌아가면서 와인을 두병 사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리케에게 한 병 에클레어에게 한 병.
"그러고 보니 상담할 이야기도 있다 했지. 일단 앉을래?"
"시, 실례하겠습니다."
바로 맞은편 나무에 붙은 작은 벤치가 있는데 서서 이야기를 이어갈 필요도 없었다.
시선을 1초 정도 마주치다 바닥으로 고개를 내린 클로에는 몇 번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하다 잘되지 않는지 결국 자신의 손을 보며 상담을 시작했다.
"조금·· 예의가 없는 이야기일지도 몰라서···민폐거나 문제가 된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교관이지만 속은 모험가라 그런 거 신경 안 써. 모험가들은 너무 예의가 있으면 예의가 없다는 소리를 듣거든."
말하는 대상에 따라 다르지만.
클로에라면 실전에서 익힌 팁을 물어도 무상으로 전수할 수 있다.
"전에··카페에서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디저트 카페에서 있었던 이야기라면 기억이 난다.
"그렇지?"
"미래에 언니와··그··호, 혼인을 하시거나 그 전에 가문이나 저택에 찾아오시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밖에서 만날 일도 가끔 있을 거라 생각해서··."
"혼선을 빚기 전에 미리 호칭을 정하고 싶다?"
"··네!"
문장에서 내가 정확하게 맥을 짚었는지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긴 미래를 생각하면 밖에서 만났는데도 교관님이라고 계속하기에는···.'
예전의 리케처럼 '모험가님'도 이상하다 어떻게 보면 가족이 되는 건데. 그렇다고 형부라고 하기에는 에클레어와 내가 혼인을 한 상태가 아니고.
"그래서 제가 생각해둔 게 있는데···언니가 직접 물어보라고 해서··."
"직접 물어보라니···어떤 호칭인데?"
클로에가 자진해서 이런 문제에 해답을 가져오다니. 이건 천금보다 귀하다.
"오··."
"오?"
한참 입술의 움직임을 멈춘 클로에의 얼굴에 홍조가 붉게 올라왔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