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4 - 알다가도 모르는 게 마음이다.
퉤-! 하고 뱉어져 나뒹구는 카라비너를 봐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하고 상기하게 된다.
나에게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걸.
글레이프니르에게 감정이 있고 인격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한다고 늘 명심해야 한다.
이 사슬이 신체라 본다면 강도에 집중한 투박한 카라비너라는 멋없는 액세서리를 몸에 억지로 착용하게 한 그런 감각일지도 모르니.
사슬한테 인간의 예법을 가르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화내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별개로 당황스럽고 난감한 건 사실이지만··.
쓸데없는 감정들은 빠르게 털어내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른다.
"···이거 하기 싫어?"
차륵-!
대륙 생활 겸 인간 주인과의 생활 1일차에 접어든 갓난 사슬은 몸을 작게 움직여 뜻을 내게 보인다.
긍정의 의사를 흘려내며 끝이 작게 들썩이는 사슬을 보면··· 한낱 인간인 나는 마른 세수를 절로 거듭하게 된다.
한 손으로 얼굴을 반죽하며 자제가 안되는 침음을 쭉 흘렸다.
"흐으음~ 으으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보육원이나 교단에 가서 전문적인 상담이나 조언이라도 받아야 하나? 아니면 대장간?
'···.'
고심 끝에 바닥에 뒹구는 카라비너를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나는 손잡이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는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바닥에 두었다.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글레이프니르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어린아이를 앉혀두고 물건의 사용법을 가르치듯이.
"자- 보면 여기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이 있지? 아까 걸려고 했던 쇳덩이는 '카라비너'라는 친구인데 여기에 서로를 연결시키기 위한 물건이야."
글레이프니르를 보며 설명을 이어가는 지금 ㅡ 생에 처음이라 할만한 아주 강력한 현자 타임이 나를 강타했다.
'와 내가 지금 뭘 하는··?'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진 보람은 있었는가.
손에 얹혀 있던 글레이프니르가 바닥을 향해 자진하여 스르륵 떨어져내렸다.
촤르르르ㅡ
설명을 듣고 한 마리의 뱀처럼 슬금슬금 바닥을 기어 움직인 글레이프니르는 바닥에 놓여있는 단검의 손잡이 아래에서 멈춰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오··?"
이 사슬을 한 명의 아이라 생각하면 교육은 자발적인 움직임에 대한 기다림과 결과에 도달했을 때 칭찬에서부터 시작일 것이다.
아마도! 애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하는 행동에 관여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내 눈에만 그럴지 모르지만 글레이프니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혼자 물건을 떨쳐내는 게 가능하면 소통이 빠르게 되는 순간부터는 일부러 끊어서 투척도 가능하겠는데?'
그게 가능한 순간부터 반대로 멀리 떨어진 물건을 주워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 손으로 글레이프니르의 모든 것을 다루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다른 무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견해로 쇄(鎖)라는 것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건 숙련의 과정, 실전의 사용에 있어 까다롭기로는 최고라고 꼽는다.
특히 나무가 빽빽한 숲이나 골목길, 계단이나 복도 같은 좁은 공간에서는 보다 높은 정밀성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고 허점을 파고드는 속도가 빠른 상대에게는 이점보다 단점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많다.
그러나 글레이프니르를 사용하여 그 모든 걸 커버하고 장점만 날름할 수 있는 양아치 전법을 어렴풋이 구상해뒀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이 꾸물거리는 아이가 장하고 귀엽기만 하다.
'조금만···!'
내 힘으로 쇠사슬 자체만 휘둘러도 어느 정도 실력자를 박살 내는데 아무 문제도 없지만 굳이 여기에 무기를 달아서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게의 중심을 끝에 두면 원심력을 이용하기가 수월한 점과 끝에 있는 무기로 오러의 전도와 일점 집중이 유려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무기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면 그것을 덩달아 장거리에 있는 상대에게 발동시킬 수 있으니 높은 질량을 사용하는 둔기와 같은 힘을 내면서도 틈을 잘 찌르면 상대의 대응 스타일이나 스킬까지 뽑아낼 수 있다.
'··힘내!'
사륵-
아까처럼 물건을 흘리거나 뱉어내는 게 가능하다면 카라비너 없이 뚫려있는 구멍에 자진하여 걸리는 것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
지금 이 순간.
그 장면이 기대가 안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꿀꺽.
숨 막히는 심리전은 제법 긴 시간이 이어졌고···울대가 움직이며 마른침이 넘어간다.
무언가를 할듯 말듯 하는 글레이프니르의 소극적인 움직임.
ㅡ참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니라.
제공자인 그녀의 말마따나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글레이프니르 나름 고심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저 주인을 약 올리는 게 아니면 된 것 아니겠나.
실제 글레이프니르와 내가 만난 건 약 하루로 아주 짧은 시간. 감정이 존재한다면 당장에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행하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겠지.
'이건 기다리는 게 답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지켜본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어제 리케와의 실험들을 통해 나는 속으로 글레이프니르의 이미지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글레이프니르는 쓰다듬어주는 것과 칭찬에 기뻐하지만 내성적인 어린아이처럼 확실한 의사 표현 없이 움직임을 멈추기도 한다.
어제 실험을 도와주던 리케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도 이 사슬을 무기이자 어린아이 그러면서 애완동물 이 세 가지의 입장을 두고 생각하기로 했다.
'구속구인 글레이프니르는 그 셋 중 어디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으나, 현재 보여주는 이미지상 어디에 끼워 넣어도 억지로 들어가긴 한다.'
지금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내 생각이 막힐 때.
머리에서 자기합리화에 유리하도록 글레이프니르에 대한 입장과 생각을 바꿔 가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라는 결론.
좀 경우가 이상하지만 하나의 애완동물이라고도 생각하니 기다리고 있는 마음에 초조함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편해졌다.
'형태로 보면 닮은 건 뱀인데···행동은 고양이나 강아지 같기도 하고···.'
나는 어린아이보다 동물을 좋아하니 거기에 대입하여 애정을 주는 게 글레이프니르를 칭찬하고 이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으며 전생에 일이 없는 날은 게임이 질렸을 때 수족관에 가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가득한 수조를 멍하니 보고 있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전생에는 개와 고양이를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으니 그 경험들을 십분 살려보자는 마음가짐.
거기에 더욱 고점이자 이점이 되는 건 글레이프니르는 평범한 동물에 비해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앉아, 기다려, 엎드려 이런 단조로운 명령이 아니라 복잡한 설명이나 문장까지 이해한다.
그런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만큼 당장에 실용성을 추구하기 보다 친밀감을 쌓을 필요가 있다.
지금 억지와 강요를 가하는 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
"무리하지 말고 다음에 할까? 지금 급하게 할 필요는 없어."
일단은 대체재로 수복이 끝난 이매망량의 쇄가 존재하고 있으니.
아직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망설이고 있는 글레이프니르에게 웃으며 말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호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면 큰 진전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무기를 다는 게 글레이프니르에게는 상당한 고역일지도 모르고.
촤륵- 사르르ㅡ
진짜 그래도 되냐는 양 작은 불꽃처럼 일렁이며 기뻐하는 감정이 내게 전해진다. 당장 어제보다 움직임이 커지고 활발해진 게 착각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좋아? 무기를 정 못 달겠으면 이 애가 있으니 시간 걱정은 말고. 천천히 해보자."
힘들거나 못할 일을 대리로 처리해 줄 아이를 보여줘 글레이프니르를 안심시켜줄 심산이었다.
인벤토리에서 [이매망량의 쇄]를 꺼내 살짝 보여주니 글레이프니르가 당황과 긴장 비슷한 감정에 의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
찰칵-!
이때까지 보인 적 없는 빠른 움직임으로 글레이프니르는 단검을 집어삼키듯이 손잡이와 결합했다.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질 그림에 나는 턱에 힘을 줘서 멍청하게 입이 열리는 걸 막고 단검과 결합된 글레이프니르를 집어 들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다른 사슬에 대한 질투? 우월함의 증명? 주인에게 가치 증명을 못하는 두려움?
도저히 이것만은 답을 못 내리겠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으쓱 거리며 어떠냐는 모양새로 단검을 흔들거리는 글레이프니르를 향한 격한 칭찬이다.
"자, 잘했어! 와! 최고! 최고다!"
*****
"흐으으··."
오늘은 분명 교관님의 실전 수업이 없는 날이다.
하지만 수업이 아닌 날에도 아카데미에 오시는 걸 몇 번이고 봤기 때문에 클로에는 강의시간이 비어 혼자가 되는 시간에 평소처럼 강의실에 가만히 있지 않고 아카데미를 돌아다녔다.
함께 다니는 둘은 학부 자체가 다르다 보니 점심시간이나 실전 수업의 날이 아니면 마땅하게 겹치는 시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1학년에 걔 아냐? 그 동생이라는ㅡ.
-닮긴 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ㅡ.
··
··
혼자 걷는 자신을 향해 시선이 강하게 쏠리는 느낌에 양손을 아랫배 쪽에 모아 꽉 쥐고 호흡을 반복하여 진정했다.
눈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보며 빠르게 걷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주위에 교관님이 있는지 확인한다.
'오늘은 안 오셨나··?'
클로에는 자신의 머리에 암기가 되어있는 대본을 얼른 사용하고 백지로 만들고 싶었다. 몇 줄밖에 되지 않는 대본이지만 잊지 않게 시간이 날 때마다 되새기니 정신에 피로감이 쌓였고.
그러다 보니 이건 암기 과목의 단어들을 시험 전에 잊지 않게 억지로 붙들고 있는 느낌에 가까워 얼른 사용하고 머리에 느슨함을 주고 싶었다.
예상치도 못한 케이크에 대한 감사의 말과 언니의 안부 인사도 함께 전해야 하고··· 이건 두 사람의 권위를 생각하면 매우 막중한 임무였다.
"앗!"
벤치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자마자 입이 자동으로 열리며 목소리가 나왔다.
부끄러움에 황급히 입을 가린 클로에는 복도의 끝에 달린 거울로 가서 옷매무새를 한번 확인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교관님! 실수하지 말고···교관님이 전번에 선물해 주신···.'
속으로 마지막이 될 대본을 무한 반복하며 벤치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혼자 앉아 계시는 지금이 확실한 기회다.
언니의 말대로 감각이 워낙 민감하다 하셨으니 저번처럼 주위를 떠돌면 이제는 알고도 저지르는 민폐가 될 것이다.
사락-
잔디를 밟으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전에 디저트 카페에서 독대한 경험 덕인지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그렇게 걱정이 되거나 불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케이크에 남겨주신 메모지 덕에 다른 생도들은 모를 교관님의 일면을 자신은 알고 있으니.
'···!'
거리가 아직 상당히 멀었는데 우연인지 정말 감각이라는 요소에 의한 것인지 자신을 보며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드는 교관님이 보였다.
그 태도에 완전히 마음이 놓인 클로에의 느릿했던 걸음이 평소와 같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