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3 - 사람이 아닌 건 어떻게 타이르지?
로버트는 직접 나서서 경험이라는 재산을 사용해 자신을 서포트 해주는 방향이 아니라 단순하게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 줬다.
마법 명문 가의 장남이자 친우인 아이작의 연구를 돕고 지원하는 명목이라 하여 선택지 중 조금이라도 안전한 한 가지를 택한 것이다.
아이작은 항상 연구자금으로 고정적인 지출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사리사욕이자 찜찜한 일을 위해 당장 돈을 당겨올 곳이 없었고.
가문의 장남이라도 아카데미를 다니며 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성적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생도의 입장.
지금도 천문학적인 돈을 펑펑 터트리고 있는데 이 이상 돈을 끌어쓰기에는 문제가 있었기에 로버트가 지원해 준 이 돈이 반갑긴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같은 배를 탄 사이인데·· 돈이 아니라 옆에서 편하게 밀어주면 될 것을.'
결정만 제대로 내렸으면 자신이 누구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도 솔직하게 알려줬을 것이다.
클로에 드리트나라 하면 같은 학부의 생도이니 로버트도 놀라긴 하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외견과 침묵으로 기품과 절제의 미덕을 지키는 모습. 거기에 현 드리트나 가문의 위세를 알고 있다면 로버트도 자신의 야심과 도전적인 감각을 인정하고도 남을 것이다.
기사를 꿈꾸는 생도이자 여자를 잔뜩 끼고 다니는 호걸이라 여겨졌던 로버트가 단순한 지원을 하고 발을 빼다니?
연구에 대한 결과가 자신의 생각보다 급하지 않은건지. 예상 밖의 소심한 행보였다.
똑똑-똑-
"그냥 들어와라."
끼익- 찰칵-!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온 남자는 확실하게 방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아이작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수도 내에서 적합한 인물을 찾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형형색색의 시약이 찰랑이는 플라스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이작은 표정을 찌푸렸다.
연구의 진척 문제가 아니라 필립의 입에서 들려오는 보고 사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필립에게는 걸고 있는 기대감이 컸는데 며칠째 이런 소식을 물고 와버리니 실망감만 커졌다.
아버지에게 필립을 보내달라 했을 때 이상한 일을 꾸미는 게 아니냐고 얼마나 추궁을 받았는지···미리 준비한 변명들을 쭈욱 나열하여 겨우겨우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결과가 이래서야 긴 시간 꾸중을 들은 보람이 없지 않은가.
"쯧··."
수도에 필립이 도착하자마자 불러낸 아이작은 긴말하지 않았다.
돈을 보여주며 일정 금액을 약속하는 것으로 충분.
미끼를 던지자 필립은 고민을 하다 마법적인 계약을 끝내고 자신의 연애 사업을 돕기로 했다.
계약 전에 설명한 내용 자체는 분명 거짓이 없고 가벼웠다. 그 내용을 듣고 필립은 호탕하게 웃으며 정 안되면 자신이 나서겠다는 말까지 꺼냈으니.
하지만 계약을 끝내고 목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들은 필립은 놀라서 제발 계약을 재고해 달라며 발작을 했지만 이미 발을 빼기는 늦었다.
사용한 패들의 뒤처리만 빠르게 하면 문제가 없다고 긴 시간을 꼬드긴 뒤에야 결국 필립은 백기를 들었다.
계약을 했으니 이미 피할 수도 없지만.
아이작은 애초에 그가 자신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필립은 가문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도박중독.
손가락을 날려먹고도 그만두지 않을 정도로 중증의.
능력이 없었다면 이미 가문에서 버려졌을 테지만 합당 한 능력이 있기에 노름에 빠져있다는 요건을 잘 구슬려 가문에 잡아 둔 것이다.
아이작은 그가 최근에도 노름으로 진 빚으로 허덕이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일의 진척이 막히는 건 예상하지 못했기에 짜증이 난다.
노름 빚을 해결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계약했는데 시원찮은 소식을 들고 오니 속에 불이 날 수밖에.
"···그만한 돈을 걸었는데 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다? 도망갈 수 있는 경로와 새로운 신분까지 준다고 했는데도?"
물론 일이 끝나면 모두 죽여서 깔끔하게 살인 멸구를 실시하겠지만.
속을 까보기 전에 겉만 보면 등록된 신분이 없는 부랑자들에게는 인생을 들썩! 뒤집을 절호의 기회 아닌가.
이 기회를 잡지 않다니? 아이작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아아-"
아이작은 안경을 벗고 입김을 뿜어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닦아내며 인상을 확 찡그렸다.
돈만 충분히 제시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쓰레기들이 불나방을 흉내 내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줄을 설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적임자를 찾지 못해 시간만 내다 버리고 있지 않은가.
"아예 지원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자들은 모두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너무 질이 떨어진다면···뒷골목의 건달 수준도 안된다?"
필립은 아이작의 말에 긍정하며 설명의 꼬리표를 이어 붙였다.
"딱 그 정도였습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을 사용하여 손쓸 틈도 없이 쓸려나가면 영애의 경각심만 올라갈 테니 첫 시작은 곧 끝이나 마찬가지. 그러니 실력자들로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
"···맞는 말이야. 기회는 딱 한 번으로 끝 두 번은 의심을 살 수밖에 없어."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하는데 두 번이나 같은 인물이 절호의 타이밍에 등장한다? 그것만큼 이상한 게 있을까.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던 인물인 자신이니 깊게 파고들면 바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1학년이라도 아카데미 생도를 압박할 실력은 있어야 하는 자를 찾아야 하는데··· 뒷골목에서 나름의 힘을 가진 자들은 자기 보신에 누구보다 필사적입니다."
"대상이 누구인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진척이 안된다 이 말이지?"
상대가 자기 보신에 철저하다면 아이작도 이해가 되는 악순환의 구조였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들은 적임자는 계약 전에 대상을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고- 계약을 하지 않으면 이쪽에서는 누구를 목표로 하는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도련님··음지에서 오랜 시간을 죽지 않고 살아온 자들은 쥐 떼와 같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재앙과 불길함을 감지하고 피하는데 망설임이 없을 것이고 수도의 그림자라면 어디에 비견하지 못할 만큼 매일이 더욱 치열했을 것입니다."
"쉽게 낚이지 않는다면···다른 방법은?"
"아예···이럴 때는 수도 쪽은 포기하고 전후 사정을 모르는 타 영지에서 인물을 들이는 게 뒤처리도 마찬가지고 일을 진행하는데도 좋아 보입니다. 규모가 작은 영지에는 자신이 최강이라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부류가 생각보다 흔합니다."
아이작은 필립의 말에 이제서야 불쾌함을 지우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부탁 좀 해도 되겠나? 내가 요즘 실험으로 조금 바빠서 말이야."
필립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실수를 꼽자면 쓰레기 같은 패로 호기롭게 노름을 즐기다 손가락 하나를 날려먹은 그날? 절대 아니.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덥석 물었다는 것이다. 베테랑이라 자부하던 자신이.
여자 하나 꼬셔보겠다고 겁을 줄 연기를 할 인물들을 찾아라···.
7살 먹은 철부지 같은 생각을 코앞에서 듣고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필립은 인내하여 참아냈다.
거기에 도와주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시원하게 하사하겠다 하니 필립의 입장에서는 역시 공부머리와 썩어날 정도의 돈밖에 없는 코흘리개 답다고 생각하여 너무 안일했다.
우스꽝스러운 계획을 듣고 액수를 보는 순간 호기롭게 돕겠다고 나섰다.
최근 여신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한 보람이 있는지 마침 쪼들리고 있는 자신에게 내려온 동아줄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겁박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들었을 때. 필립은 악마에게 속아넘어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타당한 설명을 붙여 몇 번이고 말렸지만 이 도련님은 정신나간 계획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속으로 수천 번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이미 내부 계획을 들어버린 필립에게 다른 선택사항은 없는 법.
사회경험 없이 돈만 썩어나는 철부지의 쪽팔리는 망상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자신이 해본 일 중에서 가장 어이가 없고 창피한 일이지만 액수가 가장 크게 걸려있다.
누가 볼까 두려운 쓰레기 같은 계획이지만··· 거부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을 제시해 주었으니 어쩔 수 있나.
아이작을 속으로 우습게 보고 의심없이 받아들인 건 자신이었기에 이제 길은 하나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차기 가주에게 잘 보여서 인생 좀 피려 했던 필립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호부견자 그 자체.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장남이 이런 꼴이라면···말로이 백작가는 끝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노름 빚이고 자시고 어디 조용한 영지에 틀어박혀 느긋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
이른 아침부터 특유의 상큼함을 뽐내며 아카데미로 가는 리케를 지켜보다가 마당에 돌아온 나는 자리를 깔고 앉았다.
조금 있다가 아카데미에 갈 생각이지만 그전에 글레이프니르와 최대한 소통도 해보고 훈련이나 하자는 마음.
"글레이프니르"
차르르ㅡ
한 손에 글레이프니르를 잡아 부드럽게 뽑아내고 다른 한 손은 인벤토리에 넣어 손바닥만 한 쇳덩이를 꺼낸다.
달그락.
손에 있는 이 쇳덩이- 전생에 이런 걸 흔히 '카라비너'이라 했다.
캠핑용품으로 흔히 알려진 갈고리의 친구이자 사촌 정도 되는 것인데. 이 세상에도 똑같은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두께와 길이를 내 입맛대로 줄여 제작한 고강도 카라비너를 인벤토리에 몇 개고 쌓아뒀었다.
글레이프니르를 얻기 전에 사용하던 이매망량의 쇄의 양 끝에 카라비너 혹은 샤클을 달아서 워해머와 같은 무기를 연결시켜왔고.
그 방식이 쇄(鎖)라는 무기를 사용하는데 효율적이라 느껴왔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
어제 리케와 앉아 여러 가지를 해보다 무기를 달아보지는 못했기에 오늘에서야 글레이프니르에게도 같은 절차를 밟으려 했다.
딸깍!
글레이프니르의 시작점에 카라비너을 연결하는 순간이었다.
툭-
물건을 통과하는 마술처럼 카라비너를 거는 순간 바닥에 떨어졌다.
"응··?"
다시 한번.
툭-
바닥에 나뒹구는 카라비너를 보며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누구에게 답을 구할 수도 없는 문제 아닌가.
툭!
한 번 더 시도해 보니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느껴진다. 아까는 무시하고 떨어뜨리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밀어내는 느낌이다.
마치 아이가 맛없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가 퉤! 하고 뱉어내는 듯한 행위.
'이게 어린애야 무구야···?'
막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부분이 막히니 산전수전 다 겪은 인간도 벙찌게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억지로 끼우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회유가 우선.
나는 쌓여오는 난감함을 털어내기 위해 이마를 벅벅 긁다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물었다.
"···이거 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