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0 - 이름을 불러주세요.
게임에서 히로인들이 전용 무기를 사용하며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묘사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리케는 바니타스를 사용하며 자신의 무기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고 늘 말해왔다. 혈마법을 연구할 때도 그렇고 대낫이라는 비주류 무기를 다루는 동작을 보조한다든가.
머리로 이미지를 흘려주며 서포트를 해주는 감각을 줄곧 받아왔다 한다. 에클레어의 이노센스에 대해서는 기회가 없어 아직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내 관점에서 귀속 무기라는 건 살아있니 죽었니 한쪽으로 보기는 힘들어도··· 소유자를 돕고자 하는 의지이자 시스템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이름도 알고 부르면 달려오니 귀속 무기이자 애완 무기 같은 느낌? 내 짧은 식견으로는 뭐라 정의하기 애매하다.
일단 평범한 금속 덩어리가 아닌 증거로 바니타스나 이노센스는 감정서가 통하지 않으며 보통의 무기처럼 상태창을 볼 수 없다는 시점에서 무언가 다른 물체이긴 하다.
하지만 리케에게 이미지를 흘리지만 의지를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에고 소드처럼 말을 하는 무기는 개념상으로는 존재해도 일단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부에 실존하는 에고 웨펀은 없었다.
전생에 이슈가 되었던 익명 게시판의 내부 직원 폭로로는 IP를 이용한 타 사업을 준비하느라 손 볼 곳이 많아 에고 웨펀이나 신화적인 물건인 묠니르, 롱기누스 같은 DLC나 패치는 예정이 아예 없다고 못을 박았었다.
당시 게임의 행보를 봤을 때 신빙성이 아주 높은 이야기였고 내가 테헤란에서 마지막 게임을 하던 시점에도 그런 패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신화적인 물건을 마주하고 있다.
··
··
쇠사슬은 둥실 떠다니며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쓸고 지나갔다. 사람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비며 지나가는 감각이었다.
허공에서 길게 흘러나온 사슬의 굵기는 한가닥 한가닥 모두 제각각이었다. 새끼손가락 보다 얇은 구간이 있고 당장 항구에서 배를 묶을 때 사용할 만큼 두꺼운 부분도 있다.
"이 아이는 모순적이고 유일무이한 것들을 품고 있는 쇄(鎖)이자 격이 높은 존재를 구속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노라. 아해가 원하는 날붙이처럼 생물에게 해를 가하기 위한 무기라 여기기엔 힘들지도 모르지. 허나 쥐는 자의 역량과 의도에 따라 이루어내는 형태는 다르지 않겠느냐?"
차가운 쇳덩이 같은 외견에서 느껴지는 감각도 마찬가지.
비단처럼 부드러운 부분도 있지만 사포처럼 까슬까슬한 부위도 있으며 새끼 고양이의 발바닥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촉감도 존재했다.
멍하니 말을 듣기만 하며 사슬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충고를 한줄 알렸다.
"그 아이는 사용자의 격에 따라 한없이 단단하고 강인한 힘을 가지겠지만 반대로 갓난 아기의 손길에 끊어질 만큼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이게··· 잘릴 수가 있다고?"
신화에 나오는 무구가 인간의 손에 잘려나간다니. 예상도 못 한 이야기다.
"순수한 집약체란 그런 것이다. 소유자의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힘이 좌우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구. 그것조차 모순적이지 않느냐? 구속구이면서 '열린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이다운 모습이라 감동적이지 않은가··· 으음-! 실로 낭만이로다!"
나를 골려주려는 농담이 아니라 진정 그녀는 감동한 목소리를 공간에 메아리치게 했다. 기실 나는 이해하지 못할 기괴한 감정선이다.
일전의 사슬이 동강났던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눈가를 좁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파손되거나 잘리면? 붙거나 수복은 되겠지?"
"하하-!! 당연한 것이다. 지금 아해가 가지고 있는 삿된 것들이 갇혀있는 사슬도 가능한 걸 이 갸륵한 아이가 해내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느냐. 혹여 잘려나가거나 파괴되어 붙이는 때는···."
"그때는?"
"이 몸도 그 아이가 대가로 무엇을 원할지 모르지만···참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니 그리 대단한 걸 원하지는 않을 거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만으로 넘길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신화적인 물건이니 수리를 위해서는 수명이나 영구적인 신체 결손을 원할지도 모른다.
'전지는 개뿔이. 자기가 주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네. 응? 잠깐···.'
그런데 저 말에 언급되는 사슬이 내 인벤토리에서 자고 있는 이매망량의 쇄를 말하는 거라면··· 형상에 관련된 시간이나 일부가 아니라 내 일상 전체를 관음 당해온 건가?
"잠시만. 이야기가 새는 것 같아 미안한데··· 말도 없이 남 일상을 지켜보는 건 좀 자제하는 게 어때? 냄새나는 남정네의 삶은 보는 재미도 없을 텐데."
"본좌의 진전을 이어가는 자라면 이 몸이 감독에 있어 소홀할 수 없지 않겠느냐."
여기가 모험가 선술집이었으면··· 당당한 태도로 저딴 미친 소리를 찍- 뱉는 순간 술병을 들어 머리통을 찍었을거다.
하지만 눈앞에 탐나는 물건은 양도받지 못한 상태. 성격을 꾹 누르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까 두 번째 과업을 이어가는 건 다시 생각해 보자며? 그러니 이제 안 보는 걸로."
내 말에 입을 꾹 닫은 그녀는 반박할 말이 딱히 없는 듯 의자를 톡톡 두들겼다.
예상외로 무구를 주지 않겠다느니 하며 인질로 잡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니 뭐니 하더니 자신이 가진 무구를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끙···본좌에게 그리 야박하게 굴 필요가 있느냐?"
그만 따지고 적당히 한발 물러나 달라는 태도였다.
"야박하고 자시고···."
허공을 유영하는 사슬을 강아지 마냥 슬슬 쓰다듬으며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느껴지는 촉감이 마디마다 달라 중독성과 더불어 재미가 있었고 신기하게도 이 아이? 물건? 도 기뻐하는 것이 느껴져 보람까지 있다.
'신기하네···진짜 살아있는 것 같잖아.'
리케가 바니타스가 하나의 생명인 것 같다고 말하는 감각을 나도 이제 공감할 수 있다!
그 기쁨과 별개로 입으로는 앉아있는 그녀에게 조금은 퉁명스럽게 질문을 이었다.
"아니···납득이 안되니 반대로 물어보자. 애초에 봐서 뭐 하는데?"
"···."
지금까지 없었던 긴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의 입은 돌처럼 굳어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남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건 아니라고.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허락할 리가 없잖아."
"···이다."
워낙에 작은 목소리라 내 예민한 청각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때까지와 달리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짜증이 오른 나는 인상을 더 찌그러트렸다.
"뭐라는 거야?"
"···심심하다고 하지 않느냐!! 수십 년인지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얼마인지도 모를 세월을 이 공간에서 혼자 기다렸다! 그런 몸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이런 본좌에게 동정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해의 가문에는 필시 차가운 도깨비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누가 칼 들고 심상을 만들라고 협박이라도 했나? 본인이 자신의 진전을 이을 자를 찾으려고 심상을 만들어놓고 심심하다는 이유 하나로 남을 관음 해?
귀싸대기를 한대 후리고 안된다고 하고 싶은데···.
'한 판 뜨면 내가 무조건 지겠지?'
아까라면 승산이 없어도 달려들지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직 저 무구를 양도받지 못한 상태인데 쫓겨나기는 싫다.
솔직히 탐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턱을 긁으며 고민한 나는 합의를 제시했다.
"그럼···나랑 약속 하나는 하자."
"말해보거라··."
현자타임이 왔는지 손으로 자신의 감은 눈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쭉 빠져있었다.
"내가 내 여자들이랑 있을 때는···항상이니 애매하고. 정사를 나누는 건 보지 말 것.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 여자들은 안돼."
"후후~ 뭐 좋다! 그 정도야. 외견과 달리 참으로 여자들에게 지극정성이구나."
허락의 말에 기분이 갑자기 확 좋아졌는지 그녀는 그걸로 충분하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감정의 기복이 이때 동안 만난 누구보다 심하고 기이했다.
'혼자 있다가 생긴 조울증인가?'
사실 허락을 받지 않아도 말을 안 하고 쭉 지켜봐도 될 것을 이리 약조하는 것만 해도 의외. 속으로는 이 여자에게 연신 놀라고 있다.
말의 무게를 중시한다는 점은 신용이 가는 요소. 이 공간에서 한 약조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몸소 체감하고 있어 더욱 신비하고 이해가 불가했다.
내가 손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사슬과 교류하고 있으니 감고 있는 눈가를 움찔거린 그녀는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며 손을 움직여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 이 몸이 이걸 빠트릴 뻔했구나. 이건 중요한 충고이니 집중해서 듣거라!"
"···?"
"본좌는 삿된 것이 들려있다 해도 무구라면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바. 오늘 만난 아이가 아닌 또 하나의 쇄(鎖)에는 나찰의 백염을 절대 사용하지 말거라."
아직 컨트롤 미숙으로 날붙이나 둔기 이외에는 백염을 써본 적이 없다.
애초에 게임에서도 쇠사슬은 오러를 흘려 사용하는 무기의 반경에 들어가지 않았고.
사용하려 들면 움직임과 모양도 보통 무기보다 복잡하고, 휘둘리는 반경이 워낙에 유동적이라 평범한 오러를 흘려보내는 것조차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백염은 아직 꿈도 꾸지 않는 상태. 하지만 언젠가는 써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당연하게 의문을 가지고 되물었다.
"어째서?"
"산천초목의 미물이나 사특한 것들이 갇혀있는 물건인데 '갱생'의 힘을 가진 백염을 좋아할 것 같으냐? 본좌에게는 그들의 공포가 들리고 느껴지는 것이다. 나찰의 힘을 보유한 순간부터 그 아이는 혹여나 자신에게 불꽃이 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중요한 정보였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둘의 힘은 어울리지 않는다.
"···충고 고맙다. 명심할게."
"후후- 감사의 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아해라 생각했는데 할 수 있지 않느냐."
고맙다고 해야 할 짓을 해야 고맙다고 하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샤르륵ㅡ
이제야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내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사슬이 움직여 내 팔을 칭칭 감고 올라와 어깨와 목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비벼댔다.
애교스러운 한 마리의 뱀 같기도 하면서 장난기가 있는 앵무새 같기도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하고 귀속시키면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이곳은 그런 자리 아니더냐?"
"흐음~"
돌아가는 조건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후후··· 그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 쉽게 이름을 알려줄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몇 년은 여기 있어야 할지도? 본좌에게 까칠함을 버리고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려 앞으로 제대로 된 예를 표한다면 도움 정도는 ㅡ···"
"글레이프니르(Gleipnir)"
촤륵! 차르르르ㅡ
사슬이 요동치며 그녀의 옆에 뚫려있던 허공에서 쭈욱 뽑혀 나와 내 손으로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왔다.
이제 이 아이는 내 몸의 일부라는 감각. 팔과 다리처럼 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게 느껴진다.
"어,어··?"
우우웅ㅡ
심상의 하얀 공간보다 밝은 빛이 내 주위에서 뿜어져 나왔다. 멍청한 소리를 내며 당황하는 그녀에게 나는 손을 흔들었다.
"수고해라."
찬란한 빛이 몸을 감싸고 정신의 부유감이 사라진 뒤, 감았던 눈을 뜨니 앞에 집중한 얼굴로 공부를 하고 있는 리케가 보였다.